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은 편이었다.


집이 가난한 편이었는데 책은 꼬박꼬박 샀다.

어릴때는 당연히 위인전, 동화책 이런거 읽었지.


에디슨이 마냥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크고 보니까 사실은 쌍놈이더라고...ㅋㅋㅋ


아무튼 위인전, 동화책을 넘어서 잡다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나는 소설보다는 잡지에 치중했던 거 같다.


특히 과학잡지 같은 것들.

광활하고 미지가 가득한 우주에 매료됐던 시기임.


과학잡지 내용 태반을 이해하지 못해도 우주와 행성, 생물체의 해부도 따위를 그린 삽화와 사진만 봐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중딩쯤 됐음.


그때부터 나는 게임에 빠졌다.


리 니 지.


지금은 엔씨가 씨발놈들이지만 그때만해도 굉장히 좋은 게임사였음.

리니지 운영도 우리나라에서는 독보적이었고.. 지금처럼 과금유도도 없는 순수한 월정액제였고.


리니지 출시가 98년이거든?

그리고 본격적으로 유저수가 폭발한게 00년대 즈음인데.


그때만 해도 센세이셔널했어.


기사와 요정, 군주, 마법사가 살아 숨쉬는 신비의 판타지 세계.

인간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용이 날아다니고, 여러 사람이 군주의 지휘를 받으며 성을 공략하고.

여기저기서 혈맹끼리 혈전이 벌어지고. 척살령이 난무하고.

강력한 보스를 잡고 희귀한 아이템을 얻고.


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져?

지금이야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리니지라는 게임이 단순히 게임을 넘어서 판타지적인 감성을 채워주기 충분했음.


당시에 리니지 동시접속자가 10만을 넘어서 20만을 바라보는 시점이었거든.

국내 최대였음. 그래서 리니지 커뮤니티 사이트들이 많이 생겼음.


뭐 다들 아는 플레이포럼(현 인벤의 전신) 같은 큰 사이트도 있었고.

개중에는 팝린이라고 소형 사이트도 있었다.


나는 팝린을 자주 기웃거렸음.


거기는 되게 자유로운 분위기라 (요즘처럼 인터넷이 날카롭지 않았음. 다들 하하호호 떠드는 분위기였지)

나도 자유롭게 뻘글을 쌌음.


무슨 뻘글을 쌌냐. 리니지 세계관을 변용해서 소설을 썼음.

그때 파일을 따로 저장하지 않고 그냥 내키는대로 써서 게시판에 올린게 전부라 글이 남아있지는 않네.


대충 자유기사가 아덴 월드(리니지의 배경이 되는 대륙)를 여행하며 자기가 모시는 군주를 찾는다,

그 와중에 늑대도 해치우고, 산적도 죽이고 뭐 그런 이야기였음.



근데 이 팬픽 비스무리한 무언가를 당시 팝린 이용자들은 나름 재미있어 했어.

지금보면 정말 조악하겠지. 근데도 그때는 자기가 하는 게임을 근간으로 하는 소설이니까 그냥저냥 봐주는 분이 많았어.


그래서 매일 500~1천자? 정말 짧게라도 찔끔찔끔 썼어.

잘 봤다는 댓글이 달리니까. 뿌듯하잖아.


그때 게시판에 리니지 팬픽 소설로 나름 유명했던 양반이 있는데

그 양반은 나중에 결국 판타지소설 작가가 되더라고. 요새는 글을 안 쓰시는거 같더라만..


하여간 그렇게 글을 쓰다보니까 자연스레 다른 글도 많이 읽어보게 됐어.


고딩이 된 뒤부터 학교에서 맨날 대여점 책을 빌려 읽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새끼가..?


친구들하고 딱딱 정해서 "야 너는 레이센 1권 빌려와. 나는 2권 빌려올게." 이지랄하면서..ㅋㅋㅋ

그렇게 빌려온 책을 하루종일 돌려 봄.


서너명이 그지랄을 해야하니 당연히 빨리 봐야했음.

내가 늦게보면 친구들은 책을 못보잖아ㅋㅋㅋ



뭐 그렇게 별에 별걸 다 읽었음.


이드 아린이야기 아이리스 레이센 드래곤하트 용검전기

힐름 드래곤남매 시조드래곤엘테미아 유판디아대륙전기 비스트로더 또 뭐 있냐...



근데 시발 이게 다 좋은데 너무 느린거야.

당시에는 책이 2개월에 1권이 나오면 굉장히 빠른 거였거든?


완결 안 난 책을 빌려 읽으면 신간 언제나오나 목빼고 몇개월을 기다려야 했음.

가령 이우혁 작가님의 치우천왕기는 뭐 거의 한 3~5년에 1권씩 나왔던거 같아.


그래서 그때부터 연재속도가 빠른 소설을 찾게 됨.

바로 조아라. (당시 이름은 유조아. 아마 조아라 -> 유조아 -> 조아라 순으로 사이트명이 바뀐걸로 아는데 당시에는 유조아였음.)


그때까지도 인터넷 문화가 유했거든?

그래서 작가와 독자간의 댓글 소통이 굉장히 많았음. 서로 좀 친목질도 하고.


요즘에야 친목질이 인터넷 커뮤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라고 인식해서 거의 배척하는 분위기지만

그때는 뭐 그런게 아니었지.


아무튼 유조아에서 판타지 소설들 읽으면서 서서히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도 써보고 싶은데....'


그래서 유조아에 필명을 만들고 글을 끄적였는데

그때 어느 출판사한테 출간 제안을 받았어.


조건은 진짜 어마어마했음.

1권 낼 때마다 60만원 지급. 인세 없음. 끝.


지금보면 완전 개씹날강도 같은 조건임.

사실 그때 기준으로도 인세가 없다는 거 자체에서 열악한 조건이었음.


그래도 나는 아무튼 출간제안을 받았으니까 기뻤지.


근데 고민이 생김.


출간을 해? 말아? 근데 나는 대학은 가야하는데...?

출간 계약하면 글을 죽어라 써야할텐데 그럼 수능은 어쩌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수능 공부함ㅋㅋㅋㅋ

나름 괜찮은 대학에 갔다.


당시에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라인으로 이어지는 문과 특유의 대학 서열이 확고하지 않아서 일률적으로 비교는 힘들지만..

대충 지금의 연고대 하위라인~중앙대 상위라인 정도는 되는 학교를 갔음.


처음에는 대학교가서 글을 써보자 이런 생각이었는데

정작 대학교 가니까 또 마음이 바뀌더라고.


봄바람은 살랑이지, 여학생들은 눈 돌아가게 예쁘지.

남고에서 3년동안 시커먼 새끼들만 보다가 화장한 여학우 보니까 뭐..


마침 전공도 내 생각보다 재밌었음.

그래서 전공 공부하면서 대학교 활동을 하다보니 소설이 점점 잊혀짐.


그렇게 몇년이 지나고 군대 갔다오고 대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 시작.


근데 직장생활이라는게 엿같잖아.


요새야 뭐 MZ식 직장생활이다 어쩐다 하지만..

사실 여전히 대우 박하고 군기 강하게 잡는 회사도 많거든?


내가 첫 입사한 회사도 군기가 강했어.


상사가 하관한테 반말하는건 당연한 거고

주 3~4회씩 회식하고, 회사 기념일에 장기자랑 재롱잔치 준비해야 하고.


임원들 무슨 일 생기면 얼른 달려가서 의전해야 하고.

임원들 가족 장례식, 생일, 결혼 등 경조사를 회사 직원들이 전부 강제로 챙겨야 했음.


그러다보니까 이게 순기능.. 순기능 맞나? 하여튼 예절 하나는 빠삭하게 배웠어.

뭐 술 따를 때 소주 라벨을 오른손으로 가리고 왼손으로 술병을 받쳐서 따라야 한다 이런 거.


만고 쓸모없지. 존나 병신같은거야.

근데 이런걸 알아두고 티내면서 써먹으면 이게 나이든 분들한테는 은근 잘 먹힌다?


우습지만 현실이 그래ㅋㅋㅋㅋ


하여튼 사회생활에 찌들고 연봉하고 승진에 시달리는 시점이 됐어.

대리 달고나니까 완전히 퍼져버림.


몸 건강도 만신창이고, 회사 업무는 압박감의 연속이고.

내가 뭐 여기서 더 올라간들 바뀔 건 없어보이고.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회사에서 나름 일 잘 한다고 인정받고 있기는 했는데..

그냥 회사생활 자체에 환멸을 많이 느낌.


정확히 말하면 '우리 회사'가 싫어졌어.

지금 돌이켜보면 사내문화가 뭣같긴해도 그나마 괜찮은 회사였거든?


근데 그때는 너무 지쳐서 전부 엿같이 보였음.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게 웹소설이야.


그때도 회사다니면서 마땅히 취미생활 할 건 없으니까

컴퓨터 게임하고 웹소설을 조금씩 하고는 있었거든.


조아라 말고 문피아에서.


조아라는 옛날 생각나서 가보니까 판타지, 무협은 없고 뭔 BL만 천지더라고.

그래서 그냥 본진을 문피아로 옮겼지.


아무튼 문피아 독자로 꾸준히 소설을 읽고 있던 터라

나도 은근슬쩍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도 어디가서 글 못쓴다는 소리는 안 들어봤는데... 나도 글로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회사 다니면서 습작을 쓰기 시작했음.


첫 작품은 48화까지 썼는데 대차게 말아먹음. 투베도 못듦ㅋ

두 번째 작품은 24화까지인가 쓰다가 내가 도중에 한계를 느껴서 그만 둠. 역시 투베 진입 실패.

세 번째 작품은 32화까지 쓰고 투베도 들었어. 계약 제안도 받았고. 근데 성적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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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쭉쭉 습작과 연중을 반복하다보니 이것도 스트레스가 되더라.


스트레스를 주는 회사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한 글쓰기가 스트레스가 되니까

정신이 홰까닥 돌아버린 거임.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기였음.


그래서 회사에 사표를 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회사 : ?????????? 시발 갑자기 왜???????

나 : 그냥요. 지쳤으니까 좀 쉴랍니다.


내심은 회사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미친짓임. 유효한 성과를 거둔것도 아니면서 고정 수입을 버리고 전업 작가가 되려 한 거니까.


그때 회사가 참 많이 배려를 해줬어.


회사 : 지쳤어? 그럼 너 한 3~6개월만 쉬다 와. 네자리 비워놓을테니까 푹 쉬었다가 복직해. 아니면 그냥 한달정도 유급휴가 줄까?


이것만 봐도.. 회사가 뭐랄까.. 내부 문화가 정말 수직적이고 빡빡한 곳이지만 또 나름의 정은 있는? 그런 곳이었어.

근데 나는 당시에 이미 회사한테 정나미가 떨어진 상황이라 그냥 퇴사를 해버림.


혹시 몰라서 회사 사람들하고 연락은 꾸준히 했지.

정말 망하면 돌아갈 구석은 남겨놔야 하니까.


근데 그거도 1년반쯤 지나니까 연락이 끊기더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게, 회사 입장에서 퇴사하고 1년 넘게 자리를 비운 놈을 마냥 기다려 줄수는 없잖아?


이거는 뭐 형평성의 문제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퇴사하고 2년 가까이 됐는데도 나는 유료를 못갔어.


사실 중간에 유료를 갈 기회가 두어번 있었는데... 나는 욕심이 좀 많았음.


500전환? 이런거갖고 어떻게 벌어먹고 사냐. 내가 여태 쏟아부은 매몰비용이 얼만데.

적어도 한 2천 전환 정도는 돼야지.


대충 이런 마음가짐이랄까..

그래서 500~1500전환 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흘려보냈다.


문제는 돈이지.


퇴사하고 3년 가까이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니 숨만 쉬어도 돈이 줄줄 샘.

급여 저축한거하고 퇴직금이 다 떨어져감ㅋㅋㅋㅋㅋㅋㅋ


씨 발 좆 됐 다 !

어쩌지?


갈팡질팡하다가 회사에 슬쩍 연락해봄.


회사 : 너 재입사 하고싶다고? 그래? 그럼 와.

나 : 진짜요?

회사 : ㅇㅇ 대신 너 본사에는 자리가 없고 지사로 가야함. 업무 분야도 바뀔 수 있음. 발령 내줄게.


이것만 해도 정말 고마운거지 사실.


본사에서 내 자리가 뜯긴거는 당연한거고..

3년 가까이 회사를 쉬었으니 동기들이 과장급으로 승진할 동안 나는 직급도, 연봉도 예전 수준으로 받아야 했지만 그게 어디야.


다시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나이가 차서 돌아갈 수도 없겠지만 항상 회사의 번영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고 있읍니다...


내 인생 첫 회사이자 영원한 마지막 회사...


아무튼 그때 나는 고민이 심해짐.

아.. 지금이라도 좀 쪽팔린거 감수하고 복직할까.

여기서 더 뻐팅기면 진짜 위험한데 ㅅㅂ


근데 그때 기가 막히게 유료화에 성공함.

성적은 2천 전환 조금 넘겼다.


물론 유료 첫작인 만큼 유료연독은 썩 좋지 않았지만.. 아무튼 숨구멍이 확 트임.

그래서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음.


그렇게 글쓰다보니 여기까지 옴.


지금 돌이켜 보니 참... 어리석은 범부의 판단만 반복했네.

용케도 살고 있다ㅋㅋㅋㅋㅋ 정말 까딱했으면 굶어 뒤졌어야 할 인생인데 말이야.


인생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