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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Fighting for the Enemy: Koreans in Japan's war 1937~1945. by Brandon Palmer.




오늘날 한국의 국가적 역사관에 의하면, 당시 일본군에 입대한 한국인 지원자들은 가혹한 식민지 체제가 휘두른 철권의 희생양이다.

전쟁이 점차 일본에게 불리해지자 그들은 한국인 지원자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일본군에 입대하는 한국인의 수는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38년만 해도 한국인 지원자의 수는 2,946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수는 1년만에 거의 4배로 뛰어올랐다. 1939년 일본군 입대를 지원한 한국인의 수는 무려 12,348명에 달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을까? 조선총독부가 첫 2년간 대대적인 강압책에 의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1938년과 1939년, 물론 수가 증가하기는 했으나

일반적으로 봤을 때 지원자는 결국 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의 한국 젊은이들이 그들의 목숨을 일본에게 바치는 데 별반 관심이 없었고,

총독부 또한 그리 다급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제도는 장기간에 걸쳐 시행될 예정이었고 초기 지원자들이야말로 진짜 자원자들일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0년 이후부터, 식민지 체제는 점차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0년 지원자의 수는 84,443명에 달했고 1941년에는 144,743명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습은 육군과 식민지 체제가 지원병 제도를 대하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때부터 도쿄와 총독부는 더 많은 지원자를 요구함으로써

추후 한국인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942년 육군은 254,273명의 지원자를 받아들였고 1943년 추가로 303,294명을 수용했다. 이러한 지원자의 급증은 육군이 부분적으로 관여한 결과다.

그들은 한국인이 징병제도를 지지한다는 인식을 퍼뜨리고자 했다.



많은 지방 관료들은 지원자 수를 과장함으로써 관할 학교와 마을이 정부 정책을 준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려 했다.

그들은 합법성 여부와 상관없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 지원자 수를 늘렸고, 이를 통해 병역에 대한 지지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과거 일본군 병사였던 김행진씨의 증언을 예로 들겠다. 그에 의하면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이 학교에서 1명은 지원서를 내야한다고 통보했다.

그때 그의 교실에는 4명이 있었고 제비뽑기가 시작됐다. 김행진이 패배했고 그는 지원해야 했다. 경찰이나 교육자가 대신 지원서를 제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사자 동의조차 받지 않고 미리 지원서를 제출하는 사례도 존재했다.



한편 당시 35세로 지원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던 임용운씨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 관료들이 30장의 지원서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모인 지원서의 수가 부족했다. 관료들은 임씨에게 접근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혹시 그의 이름을 ‘빌릴’수 없겠는지 물어봤다.

그는 동의했고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에서 드러나듯, 관료들은 적법한 실제 자원자를 모집하는 것보다 통계적 목표수치를 채우는 데 더욱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이 얼마나 퍼져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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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나타난 한국인 지원자 수의 천문학적 급증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초래된 종합적인 현상이다.

하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교화 작업(indoctrin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수준의 채찍과 당근을 통해 진행된 ‘열렬한’ 설득 작업이었다.



정부 기관들, 특히 경찰이나 학교, 애국단체(patriotic units)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봉사정신’의 발효를 고취시켰다.

지역, 그리고 국가 기관은 꺼려하는 이들에게서 지원서를 받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특히 지원을 거부하는 젊은이가 있는 경우,

관료들은 보통 그의 약점(가족, 학업, 수입)을 어떻게든 찾아내 굴복시켰다.



1943년이 되자 총독부는 지원자를 모으기 위해 더욱더 강요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기타 미심쩍은 방법들도 이용했다.

한 증언에 의하면 경찰이 학생에게 백지를 내밀고는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백지는 이후 해외출생 학생들에 대한 통계자료를 작성하는데 쓰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백지는 육군 지원서로 둔갑했다.



또 다른 사례에서, 당시 학위논문을 집필 중이었던 대학생 정기용씨는 서울에서 열린 신병모집 집회에 참석했으나 지원서 제출을 거부했다.

그러자 곧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정씨가 지원하지 않을 경우, 정부 차원에서 집안 사업을 망쳐버리겠다며 정씨의 부모를 위협했다.

정씨는 결국 지원했으나 곧 도망쳐 친구의 집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친분이 있던 일본인 가족이 그를 찾아내 경찰에 넘겼다.

심지어 검을 찬 교관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협해 지원서를 작성하도록 만든 사례까지 존재한다.




식민지 관료들은 1943년 학도 특별지원병제도를 공포하며 학생들의 열렬한 충성과 무수한 자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의 반응은 상당히 미적지근했다.

정부의 선전 속 세상은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들이 특별지원병제도를 갈망하고 있다 주장한 고이소 총독으로썬 상당한 낭패였다.

총독부 장학사 곤도 히데오는 턱없이 모자란 지원자 수에 혐오감까지 느꼈다.



“반도 학생들이 즉시 행동에 나서도록 우리가 뭔가 조치하지 않을 경우, 이는 비단 한 학교뿐만 아니라 반도 내 전 학교의 수치가 될 것이다.

그들의 명예가 여기 달려있다. 즉시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내 (조선에서의) 15년이 모두 무위로 돌아갈 것이고 나 자신 또한 할복으로 (천황께) 사죄해야 할 것이다.”




고이소 총독 또한 분개했다.



“반도 학생들 중 ‘지원병’의 의미를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자원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 또한 있는 것 같다...

결국 조선인들이 생각을 바꾸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




이 발언은 당시 사용된 “자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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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



1943년이 되면 총독부는 한국인을 일본군에 지원시키기 위해 모든 사회적, 경제적 무기를 총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완전한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식민지 관료들은 결국 다수의 지원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반발과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경찰은 한국인 여론을 조심스럽게 감시했고 혹시 모를 저항이나 지원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고등경찰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지원자 중 거의 절반이 강요로 인해 지원했고, 이들은 지원제도에 대해 상당히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1941년 정부조사에 의하면 모든 지원자 중 1/3만이 진정한 ‘자원자’였고, 55%에 달하는 수는 강요로 인해 지원한 이들이었다.



조사관들은 명백히 강요된 지원자를 걸러내고 대신 ‘애국심’과 복무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 이들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육군이 한 남자의 지원서를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가 먼저 육군에 입대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야 했다.

사실 스스로 강요당해 지원했다고 대놓고 밝힌 55%를 뽑아가는 것은 육군 입장에서도 터무니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1941년엔 145,046명의 지원자가 있었지만 육군이 실제로 받아들인 인원은 3,208명에 불과했다.

모병관들은 79,672명의 강요당한 지원자 대신,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고 성장배경에서 친일적 사고방식을 보여준 50,184명의

‘진짜 자원자‘ 중에서 실제 입대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 자원자들은 진정으로 일본에 충성하는 ‘애국자’거나 경제적 기회주의자였다. 일부 자원자는 일본의 선전과 범아시아주의, 대동아공영권을 진심으로 믿었고

일본의 길이야말로 모든 아시아인들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부모나 교육자에게서 배운 제국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복무야말로 모든 일본인 남자가 거쳐야 하는 의식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한국인 남성들은 남자다움의 추구, 혹은 생계유지를 위해 육군에 입대했다.



중일전쟁 초기부터 진주만 직후까지, 일본군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민족주의적 열광을 고무시켰다.

어떤 한국인 젊은이들은 그 열광의 일부가 되고 싶어 했고 그들에게 지원서 제출은 목표로 향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길이었다. 한 익명의 한국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린 또한 일본인이기도 하기에, 병사로써 천황의 방패가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 했다.”




한국인 법대 졸업생 마츠바라 타카노부(Matsubara Takanobu)는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에 겨워 뛰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과거 한번 체력문제로 탈락했으나 정기적인 운동을 통해 최소한도를 맞추는데 성공했다. 또 다른 일본군 출신 원조장씨는 당시 정부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부모와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황과 그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다고 전후 인터뷰를 통해 증언했다.



최소 한명의 자원자는 군이 자신의 지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자살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당시 일본이 시행했던 교화 작업의 효율성과,

일부 자원자들이 일본을 대하는 신실한 태도를 생생하게 드러내주는 사례다. 이들은 또한 모든 지원이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1941년에는 그 누구도 한국의 독립을 예상하지 못했고, 따라서 일부 한국인은 일본군 입대를 최고의 직업으로써 선택했다.



한편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자원자” 중 일부는 또 다른 내면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입대했다.

즉 역설적이게도 한국인들은 지원제도를 이용해 개인적, 민족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했다. 한 자원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면접에서...한 일본 장교가 왜 일본 육군에 입대하려 하는지 그 동기에 대해 물었다. 난 어떻게 하면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한 나라란 조선인의 나라를 의미했다. 그 장교야 일본이라고 해석했을 테지만.”



1943년, 한 만주국 신문기사에서 또 다른 확인되지 않은 한국인이 자신의 동기를 밝혔다.



“난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 육군 지원병에 자원하고자 한다. 많은 조선인들은 무기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난 일본군에서 그 방법을 배워와 조국 독립을 위해 사용하려 한다.”



자신의 자원을 들여 적군을 훈련시키는 꼴. 이것야말로 일본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였고, 분명 실존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고등경찰은 한국인 자원자 중 많은 이들이 개인적인 여러 금전적, 사회적 이유로 인해 군대에 자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독립에 대한 희망을 버렸고, 설사 자신들의 행위가 식민지 정부에 부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계급체제의 밑바닥 신세였던 한국인들에게 군 복무는 경제적, 사회적 출세를 향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지름길처럼 보였다.

여기에 정부 또한 일용직 노동자나 농부들을 대상으로 군 복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홍보했다.



자원자 다수는 궁핍과 기아에서 탈출하기 위해 입대를 선택했다. 1941년 지원자 중 거의 44%에 달하는 이들은 전 재산이 1,000엔을 넘지 못했다.

자원자들에게 있어 가난은 매우 강력한 결정 동기였다. 일단 육군에 들어가면 안정된 수입과 규칙적인 식사가 보장됐다.

전신장치 다루는 법, 트럭 운전법과 같은 소위 잘 팔리는 기술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일본어를 더 갈고닦을 기회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들과 군 복무 기록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한 이점이었다. 군복무자는 평균적인 한국인 남성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일부 자원자들은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는 농장에 남아있느니, 차라리 군대에서 복무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족을 위해 입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독부는 아들이 복무 중일 경우, 해당 가정에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식민지 관료들은 병사의 가족에게 사회적 존중과 물질적 이득을 제공했고, 이것으로 해당 가정의 사회적 지위를 올릴 수 있었다.



병사의 아버지는 담배나 도장 같은 소정의 선물을 받았고, 가정은 통상적인 관료적 차별에서 약간 자유로웠다.

이러한 장려책은 물론 사소해 보이지만, 기아 직전에 놓여 있는 몇몇 시골 가정으로썬 이정도마저도 충분한 대가였다. 그들은 아들을 군대로 보냈다.



주민협회와 시청은 병사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했고, 몇몇 경우에는 육군에 입대하는 자원자들을 축하하기도 했다.

육군은 심지어 입대자 가정에 현수막을 증정해 집밖으로 걸어놓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수막은 존경의 표시였고,

이들 가정에게 있어 영광과 자부심, 사회적 평등을 상징했다.




몇몇 자원자는 혈서를 쓰기도 했다. 육군 당국에게 혈서는 일본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써 받아들여졌다.

또한 혈서는 이를 작성한 자원자들의 민족적 정체성이 상당히 흐려져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미나미 총독 아래에서 부총독을 지낸 오노 로쿠이치로는 이러한 피의 맹세들을 근거로

당시 ‘모든’ 한국인이 일본군 복무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후 인터뷰에서 그는 혈서를 제출한 이들을 수사적으로 언급하며 다음 같은 말을 남겼다.



“국가 방위에 조선인들을 동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 불공평한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군 입대를 요구하며 군에 혈서를 보낸 한국인은 1944년 2월까지 총 293명에 달했다. 안승찬씨는 이런 내용의 혈서를 작성했다.


“전 진정으로 병사가 되고 싶습니다.”



미래의 한국 대통령 박OO는 이렇게 적었다.




“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신민이 될 준비를 마쳤고, 기꺼이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I am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ready to be a japanese subject and am willing to give my life for the emperor.)




식민지 시대 잡지 ‘조광’은 해군 지원병제도가 공포되자 혈서가 파도처럼 쇄도했다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이런 내용의 혈서도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해있는 지금, 전 일어나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아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위대한 병사가 되고 싶습니다.”




서울 훈련소의 한 방에는 1.8m 길이의 두루마리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1938년 기수가 거기 피로 커다랗게 글씨를 적어두었다.

이 맹세를 통해 그들은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죽겠다 약속했다.



한국인 자원병들의 혈서는 지원자들을 착취와 교화의 희생양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학자들에게 있어 큰 고민거리였다.

많은 한국인 학자들은 ‘모든’ 지원이 강요, 위협, 혹은 공갈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인 학자와 다수의 전 지원자들은,

혈서와 같은 사례는 일본의 교육 시스템이 진짜 자원자들을 “세뇌”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흑백논리는 역사적 분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우쳐져 있다. 실제 역사에서 한국인들은 지원병 제도에 대해 모든 유형의 반응을 보였다.

일부 한국인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다른 일부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나머지는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원자 개개인의 동기를 일일이 모두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배자 일본의 눈치를 봐야 했던 식민지 시절은 물론,

친일발언에 대한 성토가 심했던 독립 이후까지...일본군 자원자 주변은 솔직한 의견을 자유로이 밝히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일본의 동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인으로써의 민족의식 대신 일본인으로써의

정체성이 서서히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전후 한국인은 오직 소수에 불과했다.



많은 자원자들의 개인적 동기는 사실 분명하지 않다. 1943년, 일본 내 10개 현에서 894명의 한국인이 육군에 지원했다.

이중 732명이 면접 및 체력검정에 참가했고 470명이 통과했다. 심사를 받은 732명 중 595명은 그들이 “선두에 서서”

다른 이들을 위한 “선례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다른 120명은 다른 사람들의 충고로 인해 오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들의 이러한 발언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은 한국인이 좀 더 나은 정치적 대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한국인들이 유능한 병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선두에 선다”는 발언은 행동을 통해 사회적 차별에 맞서고자 한,

한국인으로써의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총독부는 대부분의 지원자 (1941년은 55%)가 실제로는 “지원 당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들 강요된 지원자의 비율은 1942년과 1943년에도 증가하면 증가했지 결코 감소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식민지 정부는 해군, 학도지원병을 포함한 모든 지원제도에서 강요와 강압을 사용했다.

이들은 그렇게 지원자의 서류상 통계수치를 늘림으로써, 한국인들이 군복무를 지지한다는 여론을 형성하려고 했다.



육군은 경찰, 애국단체, 교육자, 관료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고, 집으로 쳐들어가고,

심지어 가족들을 협박함으로써 젊은이들이 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제주도의 이공석씨의 사례를 보면, 그는 경찰과 교육자로부터 육군, 혹은 해군에 지원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는 결국 해군에 지원했고 체력검정에 합격해 입대했다. 손태수씨의 경우, 그와 20명의 학우들은 선생의 지도하에 진해 해군 훈련소로 현장학습을 떠났다.

그러나 막상 훈련소에 도착하자 그들은 지원하라는 강요를 받았고, 결국 그대로 4개월간 훈련을 받아야 했다.



총독부는 지원을 받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성역은 없었다. 특히 1942년 5월 한국인에 대한 징병선언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한국인들이 징병제를 지지한다는 주장에 근거를 대기 위해선 높은 수준의 지원자 비율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도지원병제도는 비록 전쟁이라는 압력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식민지 체제가 어떻게 법을 새로 만들고, 바꾸고,

심지어 무시함으로써 사람들을 군에 지원하도록 강요했는지 생생하게 드러내는 사례 중 하나다.



1943년 9월 21일, 도쿄 정부는 일본인 비과학 분야 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대략 130,000명의 일본인 학생들이 그대로 군대에 투입됐다. 하지만 한국인 학생들의 징병유예는 아직 그대로였다.

그들은 일본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43년 8월, 한국인 징병령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징병유예는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가 1943년 10월 20일 조선학생 특별 학도지원병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공과계가 아닌 한국인 학생들의 징병유예는 유지되지 않았다. 한국인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이 제도의 도입으로,

이제 학생들에겐 육군 복무에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헌정”되었다.



정부 관료들은 징병과 근로동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따라서 학도병제도는 설렁설렁 시행된 사실상 최후의 수단이었다.

6,771명에 달하는 징병유예 학생들은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학도병제도를 조사하다 보면,

식민지 정부의 동원 체제를 두고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복종과 저항 사이 여러 가지 복잡한 반응들 또한 잘 드러난다.



평시에 육군은 대부분의 한국인 학생을 거부했다. 군은 한국인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 일본군은 전쟁 때문에 인력이 부족해졌고,

그들은 더 이상 이 사람이 강요당했는지, 자원했는지, 혹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특별 학도지원병제도의 시행과정은 강요와 억압이 따랐다는 점에서 보통 지원제도가 보여준 시행과정과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학도지원병제도의 경우 학교가 특히 중추적 역할을 했다. 고이소 총독은 ‘지원제’라는 명목상의 형식을 지키고 싶어 했고,

따라서 그는 교육자들로 하여금 학생들이 스스로 ‘자원’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라며 책임을 부여했다.



총독은 교육자들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권위를 이용하면 학생들을 군에 지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장의 교육자들은 학생들에게 지원서를 배부하고, 군복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이점을 홍보했다.

학생들이 군에 입대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교장들의 이러한 작업은 성공적이었다. 기술학교 교장 마츠다 미치요시는 세 명의 뛰어난 학도병을 배출했다.

그 중 한명이었던 나츠야마 마사요시(하문화)는 처음으로 학도지원병 지원서를 제출한 학생이었다.



그는 이후 순회강연을 돌고 여러 심포지엄에 참석하며 다른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독려했다.

그의 어머니 또한 공개적으로 군복무를 옹호했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식을 길러 국가에 바치는 것은 행복이다”는 말을 남겼다.



전후 나츠야마는 부역혐의로 고발당했으나, 그는 필요시 군 복무를 조건으로 자신을 병적에 추가했던 것은 마츠다 교장이었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나츠야마의 일화는 교장이 효과적으로 학생들을 군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생생한 사례다.



마츠다의 또 다른 학생이었던 타케히라 타다오는 혈서를 제출한 최초의 학도병이었다. 1943년 11월 2일, 그는 피로 쓴 두 장짜리 편지를 제출했다.

그는 천황이 보여준 자비와 마츠다의 지도를 지원의 동기로써 꼽았다.



세 번째 학생, 카와타 세이지 소위는 특공 조종사로, 1945년 5월 29일 시고쿠 미나에사키 상공에서 B-29 폭격기에 충돌, 전사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마츠다는 카와타의 용맹을 언급하며 한국은 그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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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학생의 이야기는 전쟁 중 한국인들이 보여줬던 다양하고 복잡한 행동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학도지원병 제도 역시 100%, 순수하게 강요와 억압에 의해서만 진행되었던 건 아니라는 사실 또한 다시금 드러내준다.



한국인 학도병들은 일반 지원병들에 비하면 지원동기가 될 만한 이유가 훨씬 적었다.

학생들 중 군 복무를 통해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추구한 이들은 극소수였다. 결국 대부분의 학도병 지원은 정부차원에서 가한 압력의 결과였다.

이것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간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업을 연장함으로써 군복무를 피해오고 있었다.



일반 지원제도와 학도 지원제도 간 공통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증언에 의하면 다수의 지원서는 정부의 박해로부터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제출되었다.

다만 정규 지원제도와는 달리, 학도 지원병들은 특별 훈련소에 입소하지 않았다. 정부는 학도병들이 일본어와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에서

충분한 학문적 훈련을 이미 받았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1944년 1월 20일, 그들은 곧바로 군에 투입되었다.



1943년 12월 19일 마감일, 6,771명의 학생 중 6,203명이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중 4,385명이 입대했다. 거의 70%에 가까운 입대율이었다.

이 수치에는 700명의 최근 졸업자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중 335명이 입대)



입대하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전공을 바꾸거나 징용산업체에서 일했다. 48개의 지원서 중 47개가 반려되곤 하던 시절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변화였다.

식민지 관료들은 학생들의 순응을 얻어내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사회적,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별다른 사전 숙고도 없이 법을 개정했고, 이후 거대한 국가적 힘을 7,000명도 되지 않는 학생과 최근 졸업자들에게 쏟아부어

그들로 하여금 군대에 입대하도록 강요했다. 이 제도는 조선 총독부 관료체제의 민낯을 드러내는 가장 극명한 사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