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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경 기습남침 이후, 28일경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1950년 7월이 되자 전열을 가다듬어 한강 도하를 감행하였다. 

이때 국군은 개전 초 인민군에 당해 사방팔방 흩어지고 무너져 혼선을 빚고 있던 부대들을 모아 6월 28일 시흥전투사령부를 급조하여 방어에 나섰다. 

여기에 500필의 말로 구성된 기마병대대도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유일하게 대오를 갖춘 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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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부대를 지휘했던 자는 항일유격대 출신이자 중국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한 장철부 대대장이었다.

기갑부대들과 도보대대들이 인민군들의 공세에 속절없이 녹아내릴때 기병대대는 장철부 중령의 지휘 하에 천호동에서 압구정동에 이르는 정면을 방어하였으며, 최후의 철수 부대로 남아 후퇴하는 아군을 마지막까지 엄호하면서도 끊임없이 인민군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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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꿋꿋이 마상에서 지휘를 하며 통솔했다.

장철부 대대장은 척후병을 운용하며 정찰로 적군의 병력 및 위치등을 알아내어 말로 운반한 기관총과 박격포로 정확히 타격하는 등, 기동성을 극대화시킨 승마보병의 저력을 보여주며 북한 인민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켰고, 인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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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로 7월경 금강 방어작전 당시, 미 63포병대대 B중대가 수백의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장철부는 직접 기병부대를 지휘하여 적의 배후를 급습했다.

그런데 이때 장철부 대대장이 구사했던 전술은 현대적인 기병 운용과는 달리 무모하면서도 대담한, 1800년대 유럽 기병들을 연상케 하는 돌격 전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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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명령을 받은 기병대대는 즉각 인민군에게 돌격했으며, 인민군 대열에 난입하여 충격력으로 깨강정 부수듯 박살을 내 버렸다.

덕분에 인민군은 혼미백산하여 도망쳤고 미군 포병 중대는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또한 7월 15일에는 미 제24사단 제34연1대 제3대대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자 심야의 폭우를 무릅쓰고 후방을 기습, 이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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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철부 대대장이 그렇게 과감한 돌격전술을 구사한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9일 한강 순찰 중, 그는 거룻배로 도하하는 인민군의 소대를 기습, 돌격하여 전멸시킨 적도 있었으며 공주에서는 정찰 경계 임무 중에 적 1개 대대가 침입해오자 기습하여 섬멸시키고 적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하기도 했다.  

그렇게 분전하기는 했지만, 돌격전술을 구사하던 국군 기병부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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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초기에는 기병 훈련이 부족해 총성에 놀란 말들이 전투 중에 달아나 버리기도 했으며 아측 전투기의 오인 사격을 받아 말과 기병들이 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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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심각했던 점은 말먹이와 편자 등 보급에 지장이 생겼고, 닮아버린 편자를 갈아줄 방법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말을 버리고 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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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악한 와중에서도 장철부 대대장의 기병부대가 분전을 하며 아군의 후퇴를 돕고 적을 타격하는 등 유격전 활동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북한 인민군은 정예 12사단을 동원하였고, 김일성의 수하 오진우가 직접 766여단을 동원해 기병부대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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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병부대는 경북 청송의 전투에서 3000여명의 인민군에 포위되어 전투를 벌이던 중 상당수의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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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원들 모두 이를 악물고 적들의 공세를 막아보려 노력했지만, 기병대대에 새로 보충된 보충병들도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가 보급 역시도 발목을 잡았기에 인민군의 공세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없다.

장철부 대대장과 기병부대원들은 전투중 극히 불리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야간에 기습한 적들을 뿌리치고 포위망을 벗어나려 애썼으며, 포위망을 돌파하는 와중에도 사단 사령부를 기습하는 등 기염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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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와중에 장철부 대대장은 적들의 탄환에 중상을 입었다.

팔과 복부에 총살을 입고도 적들에게 사격하며 지휘하던 장철부 대대장이었지만 끝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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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는 수치와 불명예 대신에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


북한 766여단 소속이었던, 과거 항일유격대에서 함께한 옛 전우들의 간곡한 투항 권유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긴 장철부 중령은 1950년 8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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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부 대대장의 전사 이후, 잔여 기병들이 북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1.4 후퇴 이후로 기병대에 기록은 찾아볼수 없게 되었으며 기병 부대는 1951년 7월경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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