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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1930년대 모터스포츠를 그랑프리의 황금기라고 불렀다



제조사들은 무제한에 가까운 예산으로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괴물을 만들어냈고


그런 괴물들을 상대로 용감하게 맞섰던 영웅의 시대였기에



"그는 말 그대로 두려움을 몰랐고, 때때로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루돌프 카라치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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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국경 근처에 위치한 독일의 작은 마을인 링엔


1909년 가을, 한 정비사의 집에서 그의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


정비사의 직업환경 덕분에 자동차와 오토바이는 자연스레 어린 아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11살 때 몰래 아버지 차를 몰아 이웃 마을을 놀러갔다가 경찰에게 붙잡혔고

16살엔 오토바이로 스턴트를 시도하다 운전면허를 딴지 하루도 안돼서 정지를 먹는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들의 기행 덕분에 부모님의 속은 타들어갔지만

그가 폭주족 생활만을 이어온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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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린 나이에 오토바이 운전을 마스터한 그는 

13살엔 형과 함께 아마추어 오토바이 레이스에 참가해 항상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종종 소규모 대회를 개최해 직접 경기에 참가하는 등 아마추어 레이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1년 6월, 

경기를 앞두고 크게 부상당한 오토바이 팀인 췬다프의 주전 선수

그의 대체자를 구하고자 팀이 온 마을에 뿌린 입단 테스트 공고문은 

막내 아들의 아마추어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테스트에 참가한 그가 당당히 시트를 따냈고, 프로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남겼으니


30년대 독일이 가장 사랑했던 드라이버, 베른트 로제마이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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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왕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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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마이어의 첫 경기는 올덴부르크 그라스 트랙 레이스로 250cc 클래스였다.


비록 프로 경기지만 오프로드 레이스인 만큼 로드 레이스에 비해 선수 수준은 낮은 편이었고

이미 아마추어 레벨이 아니었던 그는 손쉽게 클래스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10번의 경주에서도 로제마이어는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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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프로 데뷔 후 베른트는 더 큰 물에서 놀기 위해 형 욥과 함께 로드 레이싱으로 눈을 돌렸다.

금전감각에 무지했던 동생을 대신해 계약이나 금전적인 문제는 욥이 처리했고

혈육의 서포트 덕분에 로제마이어는 BMW, NSU 팩토리 소속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우승을 차지하여 로드레이스에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던 중

그를 눈여겨본 명문팀 DKW(데카베)가 1934년에 어린 로제마이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데카베가 베른트에게 제공한 것은 두 바퀴가 아니었다.




격변의 30년




당시 오토바이 명가이자 자동차 제조사인 데카베 DKU.

전륜구동 자동차의 성공으로 아우디까지 인수하는 등 데카베의 사업은 해가 지날수록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미국발 대지진이 오기 전까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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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을 버티기 위해 1932년,

데카베와 아우디는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군소업체인 반더러, 호르히와 합쳐야 했고 

네 개의 로고는 원이 되어 이때부터 아우토 우니온이라는 하나의 개체로 불리게 되었다.



지각변동은 소규모 업체 뿐만 아니라 메르세데스 벤츠에서도 일어났다.

경제위기로 체질개선이 필연적이었던 메벤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감행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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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엔 모터스포츠 부서와 SSK 후속, RR기반의 서민차 같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밀던 프로젝트 역시 수익성에 대한 임원진들의 의문 속에서 취소될 수 밖에 없었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 1926년, 포르쉐 박사는 다임러에서 나와 슈타이어 오토모빌로 이적했으나 

대공황으로 회사가 파산하면서 3년만에 나와야했다.


그래도 2년 후인 1931년, 

레이서이자 사업가인 아돌프 로젠베르거와 변호사 안톤 피에히의 재정 후원을 받아 

포르쉐 박사는 슈투트가르트에 엔진 및 자동차 컨설팅 사무소를 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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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엔 데카베 반더러 NSU, 췬다프 등 다양한 업체에서 의뢰를 받아 성공적인 가도를 이어나갔지만, 

생명보험금까지 영끌한 소형차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사무소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심 끝에 포르쉐 박사는 고성능 부서를 새로 설립하여 


1935년 그랑프리 규정*에 맞는 새로운 레이스카를 기획해 국내외 제조사들에게 어필했으나 

모터스포츠에서 너도나도 발을 빼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 누구도 설계도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공차중량 750kg 이하 only)


위기의 포르쉐 사무소는 대역갤 차은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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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히틀러가 내건 공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일의 모든 국민이 탈 수 있는 국민차를 배급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35년 재개되는 유러피안 그랑프리 챔피언쉽에서 우승할 수 있는 차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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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차 개발에 사활을 걸었던 만큼 첫 번째 의뢰는 포르쉐가 가져갈 수 있었고 (폴크스바겐)


두 번째 의뢰는 독일 최고의 자동차 제조사인 메르세데스 벤츠로 넘겨졌다.

그 대가로 메벤은 나치 정부로 부터 약 50만 마르크의 지원을 약속 받았지만


1934년에 그들이 받게된 보조금은 이에 절반인 25만 마르크에 불과했다.


3명의 훼방꾼 때문에


P-Wa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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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슈투크,


베르그쾨니히(산의 왕)로도 불렸던 그는


당시 잘나가던 힐클라임 레이서자 메르세데스의 워크스 드라이버였으며

히틀러, 괴벨스와 같이 사냥을 나가는 등 나치당 인사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0년 메르세데스가 모터스포츠에서 철수하면서 시트를 잃은 슈투크는 

히틀러에게 만약 정권을 잡는데 성공한다면 그랑프리 팀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히틀러 역시 이를 약속했다.


하지만 1933년 육군 원수 발터 폰 브라우히치의 조카 만프레드가 등장하면서 일이 꼬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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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US 서킷에서 은색 SSK를 몰아 강한 인상을 남긴 이 전도유망한 다이아수저가 

결국 메르세데스의 시트를 차지해버린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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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드라이버인 루돌프 카라치올라와, 

페라리(알파로메오)에서 주가를 올리던 루이지 파지올리가 시트를 선점한 상황에서 


슈투크에게 돌아갈 시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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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슈투크 앞에 나타난 로젠베르거


로젠베르거는 사업가 이전에 20년대 벤츠에서 활약했던 슈투크의 동료이기에

그는 슈투크에게 포르쉐 박사를 소개하면서 새로운 팀의 퍼스트가 될 것을 제안했고, 

이를 승낙하면서 슈투크는 포르쉐 소속의 첫 정규 드라이버가 되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쩐주 역시 로젠베르거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아우토 우니온의 대표이사 클라우스  1폰 외르첸 남작은

회사 체급도 커졌겠다 나치에게 인상을 남길만한 프로젝트를 원하고 있었고,

투자자 중 한 명이었던 로젠베르거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포르쉐의 레이스카는 아우토 우니온 로고를 달고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미 메르세데스에게 가버린 보조금은 포르쉐 박사가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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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관저에서 진행된 회의에 참여한 포르쉐 박사는 

한 팀이 독주하는 것보단 두 팀이 경쟁하는 것이 흥행에 더 도움이 되며, 

두 팀 모두 독일 팀이라면 독일에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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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박사의 제안에 동의한 히틀러는 아우토 우니온에게도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문제는 메르세데스가 약속받은 금액의 절반인 25만 마르크를 떼어 두 팀에게 지급했다는 점이었다.


이미 W25 개발을 끝내 보조금만 기다리던 메르세데스는 이 소식에 격분했고, 

그들이 같은 국적의 팀이었음에도 목숨까지 걸 정도로 경쟁이 과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TYPE-A



레이스카 컨셉으로 메르세데스의 개발 책임자 한스 니벨은 FMR 구조를, 

아우토 우니온의 포르쉐는 혁신적인 MR 구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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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니벨은 과거 트로펜바겐의 실패를 통해 미드쉽 대신 안정적인 디자인을 택했지만,

직접 몰아본 로젠베르거는 코너링에서 트로펜바겐의 무궁무진한 포텐셜을 느꼈고,

포르쉐 박사에게 미드쉽으로 설계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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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P-바겐은 트로펜바겐과 유사한 물방울 모양의 MR 레이스카로 디자인 되었으며,

대신 거대한 V16 엔진이 시트 뒤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최첨단 레이스카에 걸맞는 최첨단 드라이버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스타 드라이버 한스 슈투크는 그럭저럭 적응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아우토 우니온 레이스카를 제대로 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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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58%의 하중이 리어액슬로 몰린 RR구조와 스윙액슬의 조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는데

독립 서스펜션 특성상 접촉면적 증가에는 도움이 됐지만 

고속코너에선 마치 진자운동을 하는듯한 심각한 오버스티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랑프리 베테랑인 폴 피에히 조차 레이스카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에 애를 먹는 등

본 시즌을 1년 앞두고 드라이버 수급에 큰 빵꾸가 뚫려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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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 데카베가 본 희망이 바로 이 어린 오토바이 선수였고,

로제마이어는 자신의 첫 사륜 커리어를 아우토 우니온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첫 테스트



1934년 10월 24일


다른 11명의 드라이버와 함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테스트에 초청받은 로제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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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빌리 봘브, 페르디난트 포르쉐, 베른트 로제마이어)


당시 테스트를 주관하던 감독 빌리 봘브는 나이도 어리고 운전 경력도 없는 로제마이어가 영 탐탁지 않았다.


(25세였으나 당시 드라이버들은 보통 20대 후반~30대에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래도 데카베가 추천했으니 태워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부른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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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는 다른 선수들이 다 도착했을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드라이버들이 트랙에 나설 때가 되어서야 레이싱 장비도 없이 정장 한 벌만 입고 도착했다.


봘브가 OOTD에 대해 묻자 로제마이어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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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프리 레이스카 탈 수 있는 엄청난 기회인데, 당연히 그에 걸맞는 옷차림을 해야죠!”



봘브 왈 이때 송장 하나 치우겠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송장은 로제마이어가 아니라 본인이 될 뻔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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뮐렌바흐 코너에서 로제마이어는 전속력으로 진입하다 스핀했고,

코너에서 선수들을 지켜보던 봘브는 도랑으로 뛰어들어 몸을 피해야했다


이전보다 10배나 많은 마력을 다루게 되었지만, 그에겐 아우토 우니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베른트는 빠르게 적응해 다음에는 완벽하게 코너를 돌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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봘브는 로제마이어에게 이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베른트는 신호를 무시하고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 달렸다


그리고 노르트슐라이페를 11분 20초만에 주파했다. 이는 베테랑 폴 피에히과 같은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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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쥐드슐라이페 테스트에선 로제마이어의 기록은 피에히보다 1.6초 느렸다.


보고서에서 봘브는 베른트의 운전 스타일에 대해 "뻔뻔스러운 우월함"과 같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잠재력을 높이 사 로제마이어를 1935시즌 리저브 드라이버로 채용했다


괴벨스가 강력히 추천한 드라이버인 시몬스를 제치고 선발된 쾌거였다





겨울방학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