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찰스 1세 재판에 대해 알아보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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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윤석열 내란 재판에서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당했다"고 언급된 영국의 왕 찰스 1세

나무위키 실검에 오르며 화제가 되고 있어서 간략하게 찰스 1세 재판에 대해서도 다뤄보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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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문서)

우선 찰스1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영국 의회의 성립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음.

보통 영국 최고의 명군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거론된다면 최악의 암군으로는 1199년 즉위한 존 왕이 입방아에 오르곤 함.

존 왕은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교황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등 민심을 잃을 짓을 골라했고

결국 1214년 존왕 본인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프랑스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참고 있던 대다수 사람들과 귀족들의 분노는 극까지 터져버렸음.

이에 집단행동에 나선 귀족들은 새로운 세금 징수는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하고 체포와 구금 또한 적법한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들이밀었고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존 왕은 딱히 대처할 방도가 없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대헌장에 서명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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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265년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의 주도하에 귀족, 성직자, 기사,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처음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절대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고

14세기 중엽에는 양원제가 자리잡고 평민들의 목소리도 반영하게 되며 의회는 점점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감.

물론 왕권신수설에 익숙했던 몇몇 왕은 이러한 흐름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1603년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완고한 절대왕정 신봉자였음.

대표적으로 그는 "국왕 역시 법률의 보호를 받는 존재"라고 설명하던 대법원장 에드워드 쿡에게

"왕이 법률을 수호하는 것이지 그 반대일 수는 없다"며 분통을 터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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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 역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집권했는데

그가 마그나카르타를 준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전쟁 자금을 마련하거나 마음대로 체포를 남발하려 들자 의회 대표들은 의회와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를 다시 한번 공인하는 '권리 청원'을 제출함.

참고로 이 '권리 청원'엔 왕이라고 해서 계엄령을 함부로 발동할 순 없다는 취지의 조항도 포함되었는데, 21세기에 "왜 내가 대통령인데 내 권한인 계엄령 발동했다고 난리임?"을 시전하는 윤석열의 논리는 먼 옛날 영국 법률로도 위헌임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음.

찰스 1세는 일단 '권리 청원'을 승인하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왕인 자신이 세금 부과나 의회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존나 더럽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음.

그런 찰스 1세에게 합법적으로 의회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묘안이 떠올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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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가 꼴보기 싫다고? 의회를 안 열면 되잖아?"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이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만들었지만 노태우가 걍 소집을 안하는바람에 사문화되었듯이

그냥 왕이 의회를 소집하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기적의 논리로 10년 이상 의회 문을 닫아둔 채 버팅김.

그러나 1639년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정부군이 수세에 몰리자 급히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결국 의회를 소집하여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

하지만 그동안 소집 한번 되지 않은 채 속으로 분을 삼키던 의회 의원들은 순순히 협조해주지 않고 기브 앤드 테이크를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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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이 별도로 소집하지 않아도 3년에 한번씩은 의회가 열리도록 하고 왕이 마음대로 해산하지 못하도록 규정해둘것

2. 현재 왕의 핵심 측근들은 간신배들로 보이니 반역자로 처단할것

크게 보자면 이 두 개를 요구하면서 들어주지 않으면 군자금도 줄 수 없다고 나왔는데, 찰스 1세로서는 혹 떼러왔다가 혹 붙인 격이 되었고

그 10년 이상 의회 구성원들 역시 급진 세력인 청교도들이 대다수가 되는 바람에 이전보다 강성파가 되서 왕에게 거침없이 맞섰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일랜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찰스 1세가 이 반란을 배후조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의회는 왕이 아닌 의회가 반란진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그런데 이때 의회 의원 중 몇명이 그 소문을 퍼뜨리는 데 가담했다는 카더라가 나돌면서 마침내 찰스 1세의 인내심은 한계치에 다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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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찰스 1세는 1642년 1월 4일 직접 근위병들을 통솔하고 불시에 의회로 들이닥친 뒤 몇몇 핵심 의원을 반역죄로 체포하여 본때를 보이고자 함.

그러나 윤석열의 계엄 계획이 사전에 질질 새어나갔듯이 찰스 1세의 친위쿠테타 계획도 사전에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원래 잡고자 했던 의원들은 다 튀어버린 후였고

당황한 찰스 1세는 하원의장에게 그들이 어디로 튀었는지 대라고 지시했지만 하원의장은 단호히 거부했을 뿐더러 의회 경비병들 역시 근위병들의 진입 시도를 저지하려는 무빙을 보임.

민의를 대표하는 장소인 의회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무단으로 칩입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에 분노가 극에 달한 런던 시민들은 마침내 봉기했고, 신변의 위험을 느낀 찰스 1세는 런던을 탈출함.

이후 옥스퍼드를 거점으로 삼은 찰스 1세 세력과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 세력 간 내전이 전개됨.

내전의 결과는? 의회파의 승리. 찰스 1세는 포로가 되어 햄프턴궁에 유폐되기에 이르렀고, 이제 그의 운명은 의회에게 달려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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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해서 일단 여기서 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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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찰스 1세 재판에 대해 알아보자(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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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 초상화)

내전에서 패배한 왕당파의 수장 찰스 1세는 비록 일시적으로 유폐되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왕조국가에서 왕을 폐위시키거나 사형시킨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의회의 핵심 지도자들은 처음에 찰스 1세를 왕 자리에서 끌어내리거나 죽이기보단

찰스 1세가 계속 국왕 자리에 머물도록 하되, 왕권이 의회로부터 견제받을 수 있는 각종 장치를 마련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음.

그러나 독불장군형 군주였던 찰스 1세는 유폐된 후에도 이 부분에 있어 비타협적으로 나왔고

근본적으로 "왜 모든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왕이 의회와 대화와 타협이라는 걸 해야 하는지" 좀처럼 납득하지 못함.

왕과 의회 간 협상은 지지부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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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의회 의원들은 물론이고 왕의 측근마저 참을성이 바닥나는 사이

찰스 1세가 은밀히 후원하는 왕당파 잔당들의 마지막 저항이 전개되었고 때맞춰 불안정한 정국을 틈타 외부(스코틀랜드)의 침공도 개시되면서

왕당파의 정신적 지주인 찰스 1세를 반역죄로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이 대두됨.

이에 의회에선 찰스 1세 재판을 위한 고등법원을 설립하는 법령을 통과시킨 뒤 135명으로 구성된 재판정을 구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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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변하는 중이라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현대의 대통령과 달리 과거 영국의 국왕은 의회와 사법부의 상위에 있는 존재였고

그들간의 관계 역시 1차적으론 '군주와 신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왕을 피고로 법정에 세워 재판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음.

때문에 심적 부담이 컸던지라 실제 재판에 참석한 인원수는 135명 가운데 70여명 남짓에 불과했다고 함.

아무튼 1649년 1월 20일, 영국 의회 의사당의 웨스트민스터강당에서 찰스 1세를 대상으로 한, 그것도 죄명이 대역죄인 재판이 시작됨.

이때 재판장 존 브래드쇼와 찰스 1세는 대강 이런 공방을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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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 혐의 내용을 낭독했으니 이제 니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는지 답변할 차례임.

왕

찰스 1세: 그보다 너네들이 어떤 적법한 권한이 있어 나를 이 재판장에 끌고 왔는지부터 알아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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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정은 너를 왕으로 뽑은 영국 국민의 이름으로 죄를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함.

왕

왕으로 뽑은 ㅇㅈㄹ ㅋㅋ 영국 국민은 단 한번도 왕을 선출해본 적이 없고 천년 동안 세습해왔는데 니들이 뭔 논리로 나를 왕으로 뽑았다는 거임? 난 판사가 이 나라의 왕인 나를 재판장에 오가라마라할 권한이 있는지부터가 의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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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법정에 있는 모든 이들은 너 뿐만 아니라 전임 왕들 모두가 책임을 지는 영국 국민이 부여한 권위에 따라 모인 거고, 그에 따라 재판장으로 너를 소환한거임.

왕

그런 선례가 영국 역사 어디에 있었음? 의회가 이런식으로 사법부 행세를 하는 게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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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하라는 변론이나 대답은 안하고 법정의 권한을 따지고 드는데 말돌리지 말고 본인에게 적용된 혐의를 인정하냐니깐? 인정할거면 인정하고 반박을 할거면 반박을 하세요

왕

재판장 너는 어떤 권한으로 지금 그 자리에 앉아서 나한테 질문하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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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가...말대꾸?

왕

죄수? 나는 평범한 죄수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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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식으로 찰스 1세는 본인을 변호하기보단 일관되게 재판정의 권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함.


결국 재판장은 찰스 1세가 스스로 변호권을 포기하고 기권한 것으로 간주, 그의 반역죄를 인정하여 공공의 적으로 판정한 뒤 사형 선고를 낭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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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선고가 내려진지 사흘 만인 1월 30일 속전속결로 집행됨.

비록 무능한 왕이었지만 가오 하나는 충만했던 찰스 1세는 자신이 추운 날씨 때문에 덜덜 떨게 되면 자칫 죽음을 두려워하는 쫄보로 비춰질까봐 걱정했고, 따뜻한 셔츠 두 벌을 껴입은 채 사형장으로 향함.

가오는 사형대에서도 여전해서, 그는 마지막으로 기도를 담당한 사제에게 "나는 이제 타락할 수 있는 왕관을 버리고, 이승의 번잡스러움이 없는 곳에 있는 결코 타락할 수 없는 왕관을 향해 간다."로 간지나는 말을 남김.

모자와 망토를 벗은 뒤 참수대를 내려다본 찰스 1세는 사형 집행인에게 "빨리 끝나겠지?"라고 짤막하게 물어봤고 집행인은 그럴 거라고 대답함.

참수형은 집행하다가 운이 없으면 목덜미가 아닌 뒤통수에 도끼가 박히거나, 혹은 여러번 내려쳐야 비로소 숨이 끊어지는 끔찍한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고

또 집행하는 사람이 고의로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악의를 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한때 모셨던 왕이라고 사형 집행인은 단 한번의 도끼질로 깔끔하게 찰스 1세의 머리와 몸을 사맛디 아니하게 만듦으로써 약속을 지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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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의 머리는 다시 몸통에 봉합된 후 성 조지성당에 안치됨.

당초 의회는 찰스 1세의 처형으로 국가적 혼란이 종식될거라 기대했지만

그렇게 미웠던 왕이라도 일단 자신들의 손에 처형당하고 나자 착잡해진 국민들에 의해 동정론이 일어 오히려 국론은 더 분열되었고

특히 공화정 체제 수립 이후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이 금주령을 내리고 교회 예배 참석을 의무화시키는 등 비민주적이고 금욕과 규율을 강화하는 정치를 펼치자

반대급부로 "새로운 정권도 억압적인건 매한가지고 이래저래 ㅈ같은데 걍 왕정복고하죠?" 란 여론이 거세짐.

그 과정에서 잠시나마 찰스 1세는 "자유를 위해 노력했던 순교자"로 역사적 복권이 시도되기도 하였는데

사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사상을 가졌고 자유 이념과는 거리가 먼 군주였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현상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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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크롬웰이 죽자 영국 사회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데려와 옹립하면서 다시 왕정으로 회귀했고

찰스 1세를 처형시켰던 의회 지도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거나 종신형에 처해짐.

하지만 시대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고, 이후로도 영국을 절대왕정 체제로 돌리려는 왕들의 시도는 거센 역풍을 맞아왔으며

최종적으로 명예혁명을 통해 대의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 영국식 입헌군주제 전통이 장착됨.

그리고 이 전통은 찰스 3세가 통치중인 현재 영국까지 계승되어오고 있음.

왕실은 왕실대로 "왕권신수설에 입각해 의회를 상대로 친위쿠테타를 일으켰다가 국가의 반역자가 된 찰스 1세의 결말"을 교훈으로 새겼고

의회는 의회대로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밀고나가 왕을 목을 자른데다 뒤를 이은 크롬웰 공화정도 억압적인 통치를 해 도로 왕정복고된 후일담"을 교훈으로 새겨서

상호간에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을 모색한 결과가 왕실의 존속과 의회정치를 융합시킨 영국 정치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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