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 서울공예박물관 특별전 1
· 답사) 서울공예박물관 특별전 2
· 답사) 왕실의 모든것, 국립고궁박물관 3
· 답사 1) 황혼의 제국, 덕수궁(전통건축)
· 답사 2) 황혼의 제국, 덕수궁(서양건축)
석조전도 서양식 건축이지만 내부를 관람하면서 찍은 사진이 많아서 따로 다루도록 하겠음
석조전은 침실과 집무실을 통합해서 사용할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 완공되어서 원래 용도로 쓰이지는 못했음
그저 영친왕 부부가 가끔 일시적으로 귀국했을때 숙소로 쓰였을뿐...
석조전 분수대와 해시계 앙부일구
앙부일구가 왠지 나를 따라다니는 느낌... 어딜가나 이게 보여
이 밑으로는 석조전 내부 사진임
석조전 중앙홀
석조전은 고종이 죽은 이후 미술관으로 그리고 해방 이후 박물관으로 쓰이면서 내부의 원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었음
그러다가 2010년대에 남아있는 자료들을 참고하고 창덕궁과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이던 원래 석조전의 가구들을 다시 가져와서 원래대로 복원했음
석조전 내부는 자유롭게 출입하는게 불가능하고 사전에 예약을하고 해설자의 인솔하게 관람하는게 가능함
이런식으로 옛날에 찍은 사진을 참고해서 복원했음
지금 내부에 있는 가구들은 130개중 49개 정도가 원래부터 석조전에 있던 가구라고 해설하시는 분이 설명했음
나머지는 가구를 제작한 영국 메이플사의 카탈로그를 참고해서 재현한거라고 함
중앙홀에 놓여져있는 이 탁자도 창덕궁에서 발견되었다고 함
이곳은 귀빈 대기실임
말 그대로 귀빈들이 황제를 만나기 전에 대기하던 용도로 쓰인? 방
긴 의자와 장식장이 원래 있던 가구임
또 만나는 고종 어진
이곳은 접견실임
귀빈들이 황제를 만나는 용도로 만들어진 공간
다만 실제로 그런일은 없었다고...
왠지 고대 그리스 도자기 같은 장식
석조전이 신고전주의 양식이라서 이런걸 놓은건가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와 그의 아들인 영친왕과 영친왕의 장남인 이진이 찍힌 사진들
조선시대 기준으로 무덤의 등급은능 - 왕, 왕비원 - 왕세자. 세자빈, 왕세손, 아들이 왕이된 후궁묘 - 일반왕족, 폐위된 왕이런식으로 나뉜다이번에 답사한 영휘원과 숭인원은 바로 등급 '원' 에 해당되는 무덤들이다입구
gall.dcinside.com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newconservativeparty&no=5449541
엄귀비의 무덤인 영휘원과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은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음
어머니의 임종도 못지키고 어린 아들마저 먼저 떠나보낸 영친왕의 슬픔을 어찌 말로 표현하는게 가능할까...
이곳은 황제의 침실임
물론 이곳을 실제로 사용한건 영친왕임
사진에 나와있는 옷장이 원래부터 있던 가구임
황제 침실의 화장실과 욕실
세면대도 원래부터 있던걸 복원하면서 원위치로 돌려놨다고 함
이곳은 황제의 서재임
좌우의 책장, 가운데 원탁, 원탁 뒤에 있는 게임탁자가 원래 있던 가구임
원탁에 올려저있는 책은 만국공법
이곳은 홯후의 거실임
책상, 책장, 원탁, 장식장이 원래부터 있던 가구들임
이곳은 황후의 침실임
황제의 침실이 그렇듯 여기는 영친왕비가 머물렀던 공간임
세면대, 옷장 그리고 사진에 찍힌 책상과 화장대가 원래부터 있던 가구들
2층 베란다에서 찍은 사진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주변 경치가 더 이뻐보였음
2층 중앙
이곳은 대식당임
공식적인 만찬을 즐기기위한 공간
사진에는 안 보이는 상석 의자와 왼쪽에 있는 협탁이 원래부터 있던 가구들
대식당의 거울과 난로
석조전 내부는 자유관람이 불가능해서 다소 번거로운면이 있지만 근대 황궁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공간인만큼 근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정도는 예약해서 관람하는걸 추천함
아니 내부가 이쁜만큼 근대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관람하는걸 추천하고 싶음
덕수궁 답사기는 여기서 끝
'황혼의 제국' 이라...판소 세계관이 마구 상상되는 제목이로군요
13년 제국 vs 황혼의 제국 중 뭘로할까 고민하다가 골랐음
고종 어진은 왜 본 기억이 없지... 석조전은 내부 다 보고 신기해서 외부까지 한 바퀴 둘러봤던 기억이 나네요
ㄹㅇ 내부 외부 모두 시간내서 둘러볼 가치가 있는 건물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실베 절취선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해가 뜬적이 있어야 황혼이 있지 첨부터 흥한적도 없는데 무슨 황혼의 제국이야
군밤장수 킬러새끼 어진은 왜걸어놨노?
해뜬적도 없는데 뭔 황혼 ㅇㅈㄹ ㅋㅋㅋ - dc App
조센징새끼들 제국주의 그렇게 욕해대더만 가장 좋아하는게 제국주의임ㅋㅋㅋㅋ
짱깨후장 기생충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짱깨후장 기생충으로 살다가 뒤진 흑역사
고종 이런 미친새끼
근데 고종이 나라를 팔아먹든 말든 전제왕조라 나라 모든 게 다 고종 개인 건데 백성=노비 들이 이래라 저래라 욕할 권리가 있냐? 제 아무리 양반귀족도 왕 앞에서는 노비에 불과한 거다 하물며 국민 태반이 진짜 노비였는데 좆소 블랙기업에서 일하다 대기업에 인수합병되면 고맙지 뭘 그래 일제가 조선왕조 보다 잔인했을 거라고 믿으면 그건 세뇌당한 거야
좆망한 나라 글을 좆망한 정당갤에서 올리네 ㅋㅋ
무능의 제국
1449년 토목보의 변이라고 몽골은 이후도 북원으로 존속하며 수시로 위협했고 짱개 명 군주가 사로 잡히기도 했음ㅋㅋㅋ 동북방 만주는 여전히 여진족이 날뛰고 있어 명은 조선을 우대해
양면 전선 나아가 조선까지 합세된 3면 전선의 부담을 줄이고 지금의 만주 동북 3성 일대는 조선이 여진에 대한 세력 지배력을 가지며 견제해주고 있었다
동아시아 조공 개념부터 이해해라 조공이 진짜 갖다 바치는 거면 명은 3년에 1번 하자는걸 조선은 1년에 3번으로 극구 우겨 관철시키냐? ㅋ 당시 동아시아 조공은 오늘날 국가 간 공무역임 더구나 이럴 경우 명은 조선이 준거 보다 몇배로 보답해야 해서 조선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오늘날 한국이 미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친미하듯 조선이 당시 괜히 친명 외교한게 아님 더구나 이런 조공 무역을 짱개 명이 거부하면 과거부터 이민족들의 침략과 정복을 불러왔음 그리고 만주 동북삼성과 열도는 조선이 황제격으로 조율하고 있었다. 이걸 짱개 명은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의 태종 세조, 세종 등 황제국 묘호임)
ㄴ삼국시대에도 고구려 전성기에 북위와 교류가 활발해지는데 일단 그나마 고구려에 힘쓴 왕조도 짱개가 아니라 초기 선비족이었고 특히나 왕래가 많았던 시기도(조공 어쩌고도 일방적 짱개 사관식 ) 현실은 고구려는 문자명태왕 년간에 거란을 이용북위를 이리저리 공격하기도 하다보니 북위는 봉의라는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에 성토할 정도였음 ㅋ
고(구)려 장수태왕 연간에도 북위 효문제가 고구려와 정략적 결혼 동맹을 추진할때도 고구려 태왕쪽 황실 사람이 아니라 고구려 귀족과 겨우 동맹 ㅋㅋ 이후 북위 고구려계 선무제가 되고 고구려 고조가 들어가서 북위 조정까지 장악해 버림
그럼 왜 북조의 북위가 고구려와 이런 동맹에 안달 났을까? ㅋ 당시 이민족 선비왕조 북위는 남제(南齊) 및 유연(柔然)의 샌드위치 신세에 479년 고구려 장수태왕은 유목 국가인 유연과 만주 서북쪽(시라무렌강 일대)의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며 동맹까지 맺음 한마디로 북위는 고구려와 척을 지면 동, 북, 남에 다 고립
돌림빵 당하며 처맞다 패망할수도 있었고 내부적으로 피지배 반만년 노예 짱개와의 갈등도 있다보니 그나마 차선으로 강대국 고구려와 굴욕적 결혼 동맹을 감수할 수 밖에 ㅋ 근데 이런 현실에도 짱개식 사관으로 조공 책봉 드립으로 기록됨 이건 짱개 한나라 유방이 흉노제국 묵특 대선우에게 생포되면서 수십년 속국으로 전락할때나 돌림빵 당했던 짱개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음 한마디로 수시로 정복당하던 반만년 노예 짱개가 주변 이민족에 평화를 구걸하며 포장하던 방식이 조공 책봉 드립으로 기술됨 이걸 도리어 짱개가 거부시 이민족에게 반복적으로 처발리거나 정복당해왔음
무수리 밥상차리는곳 보고파
당시 한국은 제국이었던 적이 없다. 그냥 독립국이라는 의미라면 모를까. 그것도 선언이었을뿐. 당시에 이미 홀로 살아날 가능성이 없던 나라
ㄴ이미 신석기시대에 내몽골에서 만주 요하로 이어지며 한반도 연해주를 아우러는 곳이 우리 선조들의 생활무대였고 만주 요하는 우리 최초 고조선의 중심지임 (만주 요하일대의 고조선 관련 기원전 2000년경의 하가점하층문화권은 우리 고(구)려 성곽의 주요 특징인 치의 원형 석성만 1300개,토성 600개로 2000여개가 밀집 실제 발굴)
상나라 무정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ㅡ18세기 프랑스 학자 레지, 고조선 지나(China) 사료 프랑스인 쟝 밥티스트 레지가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출간
ㄴ 고(구)려 700년 전신을 합쳐 900년의 천 년 왕조로 보는데 그동안 망한 서토 짱개 왕조만 수십개. 고구려가 제압, 휘하 부용세력(평시는 물자 지원 보호, 전시는 전투병으로 차출)인 거란(후대 요), 실위(후대 몽골), 말갈(후대 금, 청) 등이 성장, 후대 제국을 건설
ㄴ몇년전 이미 복기대 윤한택 남의현 이인철 윤은숙 남주성 박시현 등 여러 학자들이 고려의 서북 경계에 대해 압록도 두개의 용어로 다르게 사용되고 인식되는걸 밝혀냈고 중세 고려의 압록은 서북 경계가 이 요하를 기준으로 요나라 요탑의 분포도나 사서등을 통해 증명하는등 여전히 한국사에서 만주일대의 역사성은 신석기 시대부터 수천년간 이어진 공간임
ㄴ압록강을 표기할 때 '鴨淥江'과 '鴨綠江'을 구분하지 못해 고려시대 국경선에 큰 혼란이 왔음 <고려사> <요사> <금사> 등을 교차 검토해 고려시대 압록강(鴨淥江)을 확인했고, 현재 중국의 요하가 고려 전기의 압록강이 확실. 실제 《고려사》에 표기된 고려 서북 국경은 푸를록 綠 자를 써 압록(鴨綠)이라고 되어 있음
당시 고려와 국경을 맞댄 요나라의 역사책인 요사(遼史)에 따르면 이는 현재의 압록강이 아니라 압록강(鴨淥江) 즉, 현 랴오허(遼河, 요하) 강의 지류였음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 국경선은 일제 시대 jap 학자의 날림 조작임
ㄴ 조선 세종대왕 시기 1443년 최윤덕 등을 파병하여 압록강 너머 만주 파저강 유역을 정벌함 이 승전으로 인해 명나라는 만주 철령위와 공험진까지 보장함을 다시 한번 확약함 청나라 때도 만주 철령위와 공험진 이남을 프랑스 수학자 본느 등이 조선 영토로 측량한 지도를 제작한 배경이 됨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6월 1일 경자 6번째기사 1399년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세조실록 야인과 왜인(Jap)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ㄴ 이미 근세 조선은 만주 동북삼성과 열도를 조선이 황제격으로 조율하고 있었다. 이걸 짱개 명은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의 태종 세조, 세종 등 황제국 묘호임)
비록 말기 대한제국이 늦은 근대화로 jap에 통수 맞아 제대로 피워보기 전에 패망했지만, 대한제국은 만주일대의 서간도, 북간도에 이범윤을 1902년 간도 시찰위원으로 파견하고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호구조사, 세금 징수 등 실질적인 통치 활동을 벌였다
이와 별도로 함경북도 관찰사 등을 통해 간도 지역의 지리 조사와 한인 보호를 위한 활동도 병행 서간도와 북간도를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켜 행정구역화하고, 군사를 배치
ㄴ ㅂ ㅏ ㄴ만년 노예족 짱개 한족 송나라 ㅡ 전연의 맹 짱개 송은 군비로서 거란 요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등을 바치는등 굴복 귀주대첩ㅡ 반만년 노예 짱개 한족 송을 굴복시킨 북방의 패자인 거란의 전사적 요제국은 고려와 3차례 이상의 대전을 치르게 되는데
ㄴ 1019년(현종 10)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나라 정예 10만을 귀주에서 육박전으로 크게 물리친 전투(10만에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
ㄴ ㅂ ㅏ ㄴ 만년 노예족 짱개 한족 송나라 정강의 변 : 짱개 한족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더불어 송사에는 1119년 송나라로 왔던 금나라의 사신들이 송에 입조했을 때 신라에서 왔던 사인(使人)을 대하던 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ㅡ금나라 시조의 출자지(出自地)에 관한 재론(再論)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 投於境上." “옛날 우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길, 우리 조상이 큰 나라(고려)로부터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방(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하늘에 맹세코 자손대대로 조공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귀국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ㅡ《고려사(高麗史)》예종 4년
'고려(KOREA)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 ㅡ《고려사(高麗史)》예종 12년 女直、渤海本同一家。 (여직, 발해본동일가) 女眞渤海本同一家 (여진발해본동일가)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 ㅡ《금사(金史)》
금(金)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ㅡ금사』권1 본기1 세기(世紀)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또는 함보(函普)는 원래 고려에서 왔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는 본래 신라로 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데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금나라의 황족들은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ㅡ (청황제 칙령으로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
사죄합니다
단일민족국가가 제국?
착각하는게 한국사의 단일민족은 문화적 동질성의 단일이지 여러 종족의 집합, 융합이었음(고조선 건국 자체도 예+맥+한의 결합)
이후로도 초기 철기시대와 관계하는 점토대토기는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기원전 5~4세기경 만주(요동/요서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로 유입( 고조선 계통의 주민 이동과 관련 깊은 토기) 이후 본격적 고조선 말기 열국시대가 되면서
위만조선부터 만주의 강자 부여에 남부로 내려간 고조선 준왕이 세운 삼한 등에 북부는 옥저, 동예 등
이 열국이라는게 10개 국이 아니라 여러 수많은 중,소국들을 말함 고조선 동방문명권인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이후 고(구)려가 이런 무수힌 열국과 종족을 통폐합하며 계속해서 융합시켜 온 산물이 오늘날 한국인과 문화의 동질적 정체성임
사람들이 한국사를 보고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짱개 지역은 수시로 이민 정복 왕조로 점철되면서 수시로 망하니 오늘날도 여러 종족적 차별과 차이가 존속하지만 우리 고조선고구려 동방문명권은 최소 500년에서 천년을 가다보면서 수천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지다보니 그 안에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는 걸 새삼 망각 (지속적 오랜 융합의 결과)
근세 조선만 해도 고려 말의 혼란기를 정리하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 집안이 군벌 가문으로 이성계의 무력에 당시 만주 동북방의 대다수 여진족들이 그의 휘하 부하였고, 짱개 명을 멸망시킨 청제국의 태조인 누루하치의 6 대조인 먼터무가 당시 이성계 휘하 부하 중 한 명이었음
@ㅇㅇ(106.101) 이런 여진족까지 거느린 이성계의 무력이 요동 정벌 이나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 소탕 등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얻어 조선을 창업하게 되는 무력 기반이 됨 그리고 이 만주족 이전 동북방의 여진족이라는 부족은 우리 삼국시대에는 말갈로 불렸고 우리 고구려의 백성이자 부용세력(평소 보호, 물자 지원, 비상시 전투 용병으로 차출)으로
@ㅇㅇ(106.101) 근대 이전 세계 최대 대전인 6,7세기 100여 년에 걸친 선비족 통일왕조 수, 당 제국과의 대전에서도 우리 고(구)려와 한 몸으로 같이 싸우다 생매장 당한 기록까지 나옴
이런 여진족 등 여러 종족은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에 유입 편입되며 대한민족으로 융합되었고 근세 조선에서도 만주 동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세력 지배력을 여전히 유지하며, 때론 통합 유인과 강경책을 병행했고 여진족이 청 제국을 세우면서 떨어져 나간 것임
@ㅇㅇ(106.101) 대한제국은 만주일대의 서간도, 북간도에 이범윤을 1902년 간도 시찰위원으로 파견하고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호구조사, 세금 징수 등 실질적인 통치 활동을 벌였다 이와 별도로 함경북도 관찰사 등을 통해 간도 지역의 지리 조사와 한인 보호를 위한 활동도 병행 서간도와 북간도를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켜 행정구역화하고, 군사를 배치
제국하고싶다고?
다 망하던 걸레나라에서 막타 침.
ㄴ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인육질이 일상이던 짐승보다 못한 소짱개 미개 쨉짱퀴 개발작 처하다 핵통구이ㅋㅋ ㅅㅂ 부시, 2차대전 해군 조종사 참전 일본군 인육 사건 희생자 될 뻔 44년 9월 일본 남쪽 해상 추락 4시간 표류 미군 잠수함 구출 전우들은 일본군 포로로 잡혀 45년 2월 회식 자리에서 타살 군의관이 장기 적출해 안주로 전후 일본군 5명에 사형 선고
수천년 미개 변방 섬에서 살다 기어나와 고작 35여년 만에 주인을 무고 개발작 처하다 핵통구이 디엔딩=전범 jap퀴 ㅋㅋㅋㅋ
ㄴ18세기 고증학자 토우테이칸은, 고대논문 「일본결척」을 인용하여 “응신왕 시대에 백제가 봉녀(縫女) 2명을 보내주어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이었다”고 지적했다. 여왕 등극 때에는 참여한 만조백관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ㅋㅋㅋ
ㄴ미개 짱개Jap숭이를 수천년간 노력으로 사람 만들어 줬더니 대한의 한없는 은혜를 모르고 수천년간 한국에 기생하다 주인을 무는 쓰레기 미개 짐승=전범 헬Jap숭랜드ㅋㅋㅋ ㅅㅂ 특히 다시 서구열강과 핵통구이 안당하려면 미개 짱개쨉숭이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고 대한을 섬기고 복종하는게 당연하며 살길
나라가 기울어가는데 저런 건물이나 짓고 있던 것도 어이없고, 동양풍 왕궁 한복판에다 뜬금없이 서양식 건물 지어놓은 것도 병신같고, 그나마 지어놓은 것도 다른 나라 왕궁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네.
제국은 개뿔
제국(제주도를 식민지라고 주장하며)
대한제국은 만주 일대의 서간도, 북간도에 이범윤을 1902년 간도 시찰위원으로 파견하고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호구조사, 세금 징수 등 실질적인 통치 활동을 벌였다 이와 별도로 함경북도 관찰사 등을 통해 간도 지역의 지리 조사와 한인 보호를 위한 활동도 병행 서간도와 북간도를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켜 행정구역화하고, 군사를 배치
제국(개방하라니까 청 속국이라 허락없인 안된다고하며)
대한제국 1년 예산이 400만원대 밖에 안 되던 시대에 700만원 짜리 궁전을 건축하기로 한 미친 새끼. 고종.
대한제국기 정부의 세입예산은 1899년부터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1895∼1898년에 400만원대에 머물렀던 세입예산이 1899년 647만원, 1901년 907만원을 거쳐 1904년에는 무려 1,421원에 달하였다(<표 1>참조). 즉 1904년의 세입예산이 1895년의 세배를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동화의 가치하락 등으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세입예산이 오히려 감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註311
註311) 1896년경에는 액면가격이 같은 백동화와 일본 화폐가 거의 같은 가치로 교환되었으나, 1898년 이후 백동화가 남발되면서 1901년경에는 1.5배의 백동화를 주어야 같은 액면가격의 일본 화폐와 교환할 수 있었고, 1904년경에는 2.2배를 주어야 했다. 한편 서울지역의 쌀값은 1895년에 上米 1되에 6錢이던 것이 1901년에는 1兩 7錢, 1904년에는 2냥 8전까지 급등하였다. 결국 1895년경과 1904년을 비교하면 화폐가치는 약 2.2배 하락하고, 쌀값은 약 4.5배 상승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도면회,<갑오개혁 이후 화폐제도 문란과 그 영향>(≪한국사론≫21, 서울대, 1989), 410∼412쪽 및 438쪽 참조).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 한국사' / 대한제국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 / 2) 정부세입의 축소와 황실수입의 확대 / (1) 정부세입의 만성적 부족.
덕수궁 석조전 104년 만에 부활… 대한제국 황실 생활상 오롯이 입력 2014.10.08. 오전 2:47 서울신문 오상도 기자
석조전은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1852~1919)의 숙소와 사무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8년 영국인 존 레지널드 하딩(1858~1921)이 설계했다. 영국 출신의 탁지부 고문 맥리비 브라운이 제안해 조선 전기의 종친인 월산대군의 사저터에 당시 700만원 안팎의 건축비를 들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700만원 안팎의 건축비 700만원 안팎의 건축비 700만원 안팎의 건축비
아니 제후국도 없고 식민지도 없고 2천년간 짱-개랑 유목민족에 조공바친 나라가 뭔 제국이야ㅋㅋ 뭐 나도 워렌버핏이라하면 워랜버핏이냐?
저래놓고도 고종이 고초를 겪었다는 거냐? ㅋㅋㅋㅋ
이딴게 제국이면 영국은 국가 이상의 신적인 존재다
여자 처녀막+몸무게+나이 = 남자 키
중고 쿵쾅이 아줌마 = 난쟁이
고종이 와플과 커피를 좋아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