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곤룡포의 탄생
우리에겐 매우 익숙한 곤룡포
사실 이 곤룡포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북조 왕조들이 입던 옷에서 유래해서 생긴 단령의 일종이다
단령은 목깃 주변이 둥글다 하여 둥글단(團)자를 붙여지어졌다
원래 중국은 y형태로 포개입었다
현 단령에 가장 큰 영향을 준건 선비족인데
선비족은 몽골인들의 조상으로 언어가 걍 같은 수준이다
재밌는건 중세,현대 모든 몽골인들은 지들 조상을 선비 대신 흉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흉노족이 쓰던 해와 초승달을 지들 문양으로 삼았고 징기스칸도 자신을 선우라고도 자칭함)
즉, 쿠빌라이 칸한테 갑자기 정복 당한게 아니라 수당시대부터 몽골한테 후장 따였다
(둘 다 선비족이 세운 왕조)
그렇게 화북 지역에서만 입던 단령이 중국 전역을 다스린 수당왕조에 의해 중국 전역으로 쫙 퍼졌고
주변국에도 수출 되는데 우린 김춘추가 나당동맹을 체결하고 오면서 단령을 수입
일본은 헤이안 시대 때 단령을 수입했다
하지만 수당과 송나라의 단령은 신하건 황제건 단순 단색이라 밋밋한 느낌이다
왜냐면 송나라 때 까지는 가슴팍에 흉배를 안넣었기 때문
현대 정장하고 똑같다고 보면 된다
양복이 별 무늬 없이 단색으로 깔끔한 스타일인 것처럼
한중일 모두 깔끔한 단령을 정장으로 입은거다
단, 한국과 일본은 근대 개화기 전까지 단령을 정장으로 입었지만
중국은 명나라 시대까지 단령을 정장으로 입었다
청나라는 단령을 되려 금지 시켜버렸기 때문
단령 가슴팍에 흉배를 넣은건 한참 뒤인 명나라 시대인데
원나라 때 몽골인들이 가슴팍에 꽃,새 등을 그린게 명나라때 흉배로 발전한거다
(그래서 흉배도 꽃,새 그림이 젤 많다)
그리고 곤룡포 흉배 디자인은 용이라서 용보라고 불린다
(당연히 신라,고려도 흉배가 없는 단색 단령을 입었다)
"엥? 그럼 당태종 곤룡포에 용보는 뭐임?"
이 어진 둘 다 명나라 시대 때 그린 것들이다
(이 외에도 송나라 때 까지 황제 어진 중 용보가 붙은 어진이 있다면 싹 다 명나라 때 그린거다)
단, 당태종은 당시 초상화가 있기에 얼굴과 사모(관)는 그대로고 옷만 명나라식 곤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그린 것
대조적으로 남아있는 초상화가 한 점도 없는 진시황은 걍 명나라 황제처럼 익선관을 쓴 모습으로 그렸다
(분서갱유를 나타낸 그림)
그렇게 조선으로도 흉배가 붙은 단령이 처음 수출 되어 우리가 아는 곤룡포의 역사가 시작 된다
이후 명나라는 정통제가 몽골한테 좆발리고(토목의 변) 포로로 잡힌게 쪽팔려서 곤룡포를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용보를 기존의 4개에서 12개로 늘리고 용보 양 옆에는 면복에 넣는 문양도 추가 했다
그래서 조선과는 색깔만 달랐던 곤룡포가 이때부터 달라진다
2) 한국 곤룡포의 오해들
짱개들이 툭하면 한국은 속국이였어서 사조룡 용보를 썼다는데 좆까고 조선도 발가락 5개 오조룡 용보를 썼다
그리고 붉은색이 왕의 색깔이고 오직 노랑색만 황제의 색깔이라는 오해가 있는데 빨강,노랑 다 군주의 색이다
심지어 중국 황제들은 빨강,노랑 외 곤룡포도 입어서 걍 각양각색이다
(짤은 만력제의 붉은 곤룡포)
3) 한국과 중국 곤룡포 차이
같은 곤룡포지만 조선과 중국의 곤룡포는 쓰임새가 달랐다
조선은 궁중 생활 중엔 잘 때 빼면 항상 늘 같은 곤룡포를 평상복으로 입었다
예) 강연을 듣든 점심,저녁을 먹든 다른 스타일의 곤룡포나 다른 옷으로 환복하지 않았다
궁중 내에서 잘 때 외에 곤룡포를 벗고 환복하는 경우는 행사가 있을 때 정도였다
(이 외엔 궁 밖을 나설 일이 있을 때 군사적 일이나 암행이나 등등)
개화기 때도 고종은 평소엔 곤룡포를 입었지 서양식 양복은 제한적으로 입었다
그에비해 중국은 무엇을 하냐에 따라 각기 다른 디자인의 곤룡포를 입었다
(위에 셋은 경연할때
그 다음은 선조들 무덤을 알릉할 때
그 다음은 천단에 제사 지낼때)
즉, 명나라 황제들 어진에 그려진 이 화려한 곤룡포는 평상복 보다는
대소신료들 집합 시켜놓고 정사를 논할 때 천자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정사용 예복에 더 가까운거
그리고 조선은 초기엔 명나라로부터 곤룡포를 수입하다가 중기부턴 스스로 만들어 입었는데
이때 한복의 매듭을 지어 묶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곤룡포와 또 차이가 생겼다
4) 잘못 알려진 정보
마지막으로 곤룡포 일회용설
걍 개소리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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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China) 짱개 한족=수천년 노예사(북방과 동방 이민족에게 수시로 털리고 정복당한 피지배 역사를 반복ㅋㅋㅋ) 전근대의 중국이란 특정 국가명이 아니라 황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던 추상지리명사(그때마다 이민족의 문화 등이 강제주입 짬뽕화)
ㄴ 조선이 친명 외교를 하고 있었지만, 당시 만주 동북삼성과 열도는 조선이 황제격으로 조율하고 있었다 이걸 짱개 명은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 조선의 태조, 태종 세종 세조 등 황제국 묘호다)
@간첩203.25발작(106.101) ㄴ 20세기 쑨원은 멸만흥한(만주족을 멸망시키자)을 기치로 일어섰다 21세기 현재의 공산 짱개와 전근대 중국사와는 관계가 없다 있다면 짱개는 수천년 피지배 노예사를 인정하는게 먼저다
@간첩203.25발작(106.101) ㄴ 당대 짱개 송나라를 지키던 충절의 악비는 현재 공산 짱개의 동북공정으로 이민족 대금을 자기 역사로 둔갑시켜 졸지에 '민족 영웅'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통일을 방해한 자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고 있는 개웃긴 황당한 상황임 ㅋㅋㅋㅋ
大
支
那
狗
조선은 아무리생각해도 중국의 한지방이자 중화권 그자체인거같음
지나(China) 짱개 한족=수천년 노예사(북방과 동방 이민족에게 수시로 털리고 정복당한 피지배 역사를 반복ㅋㅋㅋ) 전근대의 중국이란 특정 국가명이 아니라 황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던 추상지리명사(그때마다 이민족의 문화 등이 강제주입 짬뽕화)
명 짱개 군주 북원에 처발려 생포 ㅠㅠ 만주족에 짱개 명 멸망, 도륙 당하고는 청노예로 전락한 짱개 문어대가리 변발ㅠㅠㅠ
요즘 동북공정 열심이네
여자 처녀막+몸무게+나이 = 남자 키
중고 쿵쾅이 아줌마 = 난쟁이
지나(China) 짱개 한족=수천년 노예사(북방과 동방 이민족에게 수시로 털리고 정복당한 피지배 역사를 반복ㅋㅋㅋ) 전근대의 중국이란 특정 국가명이 아니라 황하 하한족을 정복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던 추상지리명사(그때마다 이민족의 문화 등이 강제주입 짬뽕화)
ㄴ우리가 현재 고정관념처럼 이상하게 퍼져 있는 세계 4대 문명설은 근대 시기 량치차오라는 중공학자(정치, 사상가)에서 나온 주장으로 세계 고고학계에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던 만주 요하 일대에서,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선진 신석기 문명이 대거 발굴되면서 이런 중공학자의 개솔 황하문명기원설은 더욱 무색
ㄴ짱개 역사 시작이라는 한자 원형이자 창제원리의 갑골문을 만든 상나라 지배층부터가 황하 짱개를 전형적 정복왕조의.피지배 노예로 다스렸다 당시 갑골문을 보면 짱개 백성의 글자가 잡아오면 노예들은 눈을 파낸 형상에서 유래( 만주족이나 몽골이 짱개를 대하던 방식의 업글판) 그리고 제를 지내거나 건물을 지을때도 짱개를 인신공양 ㅋ ㅅㅂ
ㄴ 상나라가 보면 수도를 여러번 옮기는데 이건 당시 황하 일대는 정글지대다 보니 개간 난이도가 상당했다 화전으로 태우면서 하다 보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지력이 다해서 매번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짱개를 노예로 눈깔 파고 퍽하면 인신공양 제물로 썼던 정복왕조 상나라를 짱개들은 지들 역사라고 우기니 애잔함의 극치 ㅋㅋ ㅅㅂ 반만년 노예족 짱개
상나라 무정 때의 일시적인 세력 약화는 고조선이 강남과 산동 지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고조선은 진시황 통치 전까지는 강남과 산동에 자리했었다. ㅡ18세기 프랑스 학자 레지, 고조선 지나(China) 사료 프랑스인 쟝 밥티스트 레지가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출간
ㄴ이미 신석기시대에 내몽골에서 만주 요하로 이어지며 한반도 연해주를 아우러는 곳이 우리 선조들의 생활무대였고 만주 요하는 우리 최초 고조선의 중심지임 (만주 요하일대의 고조선 관련 기원전 2000년경의 하가점하층문화권은 우리 고(구)려 성곽의 주요 특징인 치의 원형 석성만 1300개,토성 600개로 2000여개가 밀집 실제 발굴)
ㄴ 우리 고조선의 중심지가 있던 만주의 요하문명 우하량 유적에서 제단, 여신묘, 적석총(塚)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유적은 천문 방위(남북 방향)에 맞춰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제단(기원전 3,500년 ~ 3,000년경)은 제천 의식과 관련된 동아사아 최초, 최고 오래된 천문 관측소 역할
천문 방위 측정: 우하량, 동산취(東山嘴), 성자산(城子山) 유적 등은 진남북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어, 고대인들이 천문 방위를 측정하여 제단과 무덤을 축조 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막대기를 세워 그림자 길이를 재던 '입간측영' 시설
통형기 (원통형 토기): 제단 주위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빗살무늬 통형기는 천문 제사나 농경 관련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정 주기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도구로 해석 달의 주기를 기반으로 한 음력(월건)과 해의 주기를 맞추기 위한 절기(태양) 개념이 합쳐진 형태인 '태음태양력'의 초기 형태가 이 시기 제천 의례에서 비롯
ㄴ ㅂ ㅏ ㄴ 만년 노예사 짱개 한족사 ㅡ 상나라의 노예 짱개( 인신공양, 눈깔 파임) 고조선 ㅡ 강남, 산둥 지배 흉노ㅡ 한 유방 생포 속국 전락 한나라ㅡ 고구려에 좌원대첩 등 대패, 5호 16국 시대로 가며 비참한 최후 후연 ㅡ고구려에 처발림
북연 ㅡ 고구려계 고운을 대리로 세움 선비족 북위ㅡ 고구려가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고구려가 수시로 팸 선비족 수나라ㅡ 고구려에 깝치다 30만 대군몰살, 100만 대군 대패 등 4차에 대전 전패로 패망
선비족 당나라ㅡ 이세민, 고종 연이어 대패, 3차에서 연남생 내부 분열로 일시 수도 함락에 성공, 1여년이 안되어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에 요동, 요서로 밀려남(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에 수륙에서 다 대패) 이런 당나라의 고구려와의 무리한 충돌은 결국 중기에 가면 당의 국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면 이후 동네북으로 전락, 비참한 최후를 맞음
당나라 중후기ㅡ 거란의 반란, 토번의 성장과 당 수도 침공, 고구려계 이정기의 제나라에 당 군주가 도망처다님. 고구려 후예 발해가 당나라 산둥 등주를 공격 초토화 시키는 등 동네북으로 전락하다 당나라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됨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북조사를 연 북위도 고(구)려(KOREA)의 준식민지급. 북위가 고구려와 동맹 강화를 위해 당시 고구려 귀족 가문과 혼인을 하는데 이 문소황후의 아들이 8대 북위 선무제로 등극.
이후 지지 기반이 약했던 고구려계 선무제는 자신의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불러 들이고 아예 고구려인만 따로 추대하는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벼슬까지 만들어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파벌 붕당을 만들어 장악.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ㄴ 고(구)려 700년 전신을 합쳐 900년의 천 년 왕조로 보는데 그동안 망한 서토 짱개 왕조만 수십개. 고구려가 제압, 휘하 부용세력(평시는 물자 지원 보호, 전시는 전투병으로 차출)인 거란(후대 요), 실위(후대 몽골), 말갈(후대 금, 청) 등이 성장, 후대 제국을 건설.
ㄴ ㅂ ㅏ ㄴ만년 노예족 짱개 한족 송나라 ㅡ 전연의 맹ㅋㅋㅋㅋㅋ 짱개 송은 군비로서 거란 요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銀) 10만 냥등을 바치는등 굴복 귀주대첩ㅡ 반만년 노예 짱개 한족 송을 굴복시킨 북방의 패자인 거란의 전사적 요제국은 고려와 3차례 이상의 대전을 치르게 되는데
ㄴ 1019년(현종 10)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나라 정예 10만을 귀주에서 육박전으로 크게 물리친 전투(10만에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고작 수천에 불과했다)
몽골인들이 당연히 선비족을 조상이라고 안여기지 병신들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냐면 선비족은 몽골 출신들이긴 하지만, 종족 전체가 중국으로 내려가서 중국인이랑 완벽하게 섞여서 사라졌거든 ㄹㅇ
즉 후대의 몽골인 입장에서 선비족은 자신들과 고대의 선조는 공유하지만, 선비족에서 몽골족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아니란 말이지 ㄹㅇ
이건 만주인들도 비슷한데, 고구려가 만주에서 나오긴 했지만 고구려의 거의 모든것이 한반도로 내려가버렸기 때문에 정작 만주에 남은 후대인들은 고구려를 조상으로 섬기는 곳이 거의 없음
근현대 만주인 입장에서 고구려와는 조상을 공유하지만, 고구려에서 자신들로 이어지는 관계는 거의 없다시피 한것
몽골의 전신인 만주일대의 실위가 선비족 계열임(앞서는 동호로도 불림) 다만 이 실위는 서진해서 지금의 몽골평원 즉 과거 흉노나 돌궐이 살던 지역으로 이동해서 반농반목에서 양치기 수렵으로 전환함 이후 거란의 피지배하에 있다 징기즈칸에 의해 몽골평원이 통일되면서 당시 흉노제국 일대를 연고로 통합 하다보니 그렇게 자처
ㄴ그리고 여진족 후대 17세기에 변칭되는 만주족은 한국인 선조들이 신석기 시대부터 만주 요하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며 우리가 고조선 고구려 동방문명권을 구축하며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지리적 근접성이나 문화, 계층적 부분에, 유전적으로도 우리와 여러 친여성을 가진 종족임
이 만주족 이전 동북방의 여진족이라는 부족은 우리 삼국시대에는 말갈로 불렸고 우리 고구려의 백성이자 부용세력(평소 보호, 물자 지원, 비상시 전투병으로 차출)으로 근대 이전 세계 최대 대전인 6,7세기 100여 년에 걸친 선비족 통일왕조 수, 당 제국과의 대전에서도 우리 고구려와 한 몸으로 같이 싸우다 당에 생매장 당하는 기록까지 나옴
ㄴ 이후 남북국 시대 해동성국 대발해의 무왕이 당의 산둥 등주를 해상 공격으로 초토화 시키고 요서로 밀어버리는 강경책으로 선회한 계기도 당나라가 흑수말갈의 이탈을 회책하자 발해가 흑수말갈 지역을 고구려 시대에는 간접 지배 방식으로 다스리던걸 직접 지배 방식으로 통합해 버리면서 당나라에 무력 행사를 강행하게 된 배경이 됨
ㄴ 이후 중세 고려로 넘어오면서 신라에서 고려로 정권 교체시기 신라계 김함보 세력이 북상, 발해 변경 흑수부락으로 들어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변칭함 이들은 발해 말기에 급격히 팽창하며 발해민을 흡수하며(대금) 요와 지나 한족 송을 멸망시키며 동아시아 패권국에 오르게 됨 이후 17세기 누루하치에 의해 다시 여진족이
임진왜란 시기 힘의 공백을 틈타 부족들을 통합하고 대금(후금)을 세우고 다시 대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몽골족까지 흡수하면서 만주족으로 변칭하며 짱개 한족 명나라를 또다시 멸망시키고 정복왕조 만주족의 대청제국으로 자리하게 됨
ㄴ 고려 말의 혼란기를 정리하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 집안이 군벌 가문으로 이성계의 무력에 당시 만주 동북방의 대다수 여진족들이 그의 휘하 부하였고, 짱개 명을 멸망시킨 청제국의 태조인 누루하치의 6 대조인 먼터무가 당시 이성계 휘하 부하 중 한 명이었음
ㄴ 이런 여진족까지 거느린 이성계의 무력이 요동 정벌 이나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 소탕 등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얻어 조선을 창업하게 되는 무력 기반이 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지란 등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당시 인물들이 여진족임
ㄴ ㅂ ㅏ ㄴ 만년 노예족 짱개 한족 송나라 ㅋㅋㅋㅋ 정강의 변 : 짱개 한족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더불어 송사에는 1119년 송나라로 왔던 금나라의 사신들이 송에 입조했을 때 신라에서 왔던 사인(使人)을 대하던 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ㅡ금나라 시조의 출자지(出自地)에 관한 재론(再論)
ㄴ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則我等告天爲誓, 至于世世子孫, 恪修世貢, 亦不敢以瓦礫, 投於境上." “옛날 우리 태사(太師)인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길, 우리 조상이 큰 나라(고려)로부터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태사인 오아속(烏雅束) 역시 대방(고려)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하늘에 맹세코 자손대대로 조공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귀국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ㅡ《고려사(高麗史)》예종 4년
'고려(KOREA)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 ㅡ《고려사(高麗史)》예종 12년 女直、渤海本同一家。 (여직, 발해본동일가) 女眞渤海本同一家 (여진발해본동일가)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 ㅡ《금사(金史)》
ㄴ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
오늘날 우리가 도리어 여진족을 마냥 멀리봤지, 엄연히 이런 우리와의 밀접한 문헌적, 고고학적 친여성이 여러 곳에서 거듭 나오는 이유는, 실제 대금 황실에 4대 해릉부터 8대 선종까지 모계는 발해계 황후 혈통으로 도배될 정도로, 발해계는 대금 때도 외척으로 연합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했고 대금의 행정부터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북경에 중도 건설
등에도 대표적 당시 국무총리격인 고구려계(발해) 장호 등 가문이 주도함 중세 고려로 넘어오면서, 신라에서 고려로 정권 교체시기. 신라계 김함보 세력이 북상, 발해 변경 흑수부락으로 들어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말갈에서 여진족으로 변칭 이들은 발해 말기에 급격히 팽창하며 발해민을 흡수하며(대금) 발해를 멸망시킨 요와 압박하던 짱개 송을 멸망시키며
동아시아 패권국에 오르게 됨 중세 고려 윤관의 17만 대군의 북방 여진족 정벌도 당시 만주 동북방 일대 발해가 망한 자리에 여전히 잔존하던 발해 부흥국 세력이 고려에 기미주 형식으로 통치받고 있다, 발해 외곽에서 급격히 팽창하며 대금이 세워지기 직전의 (김함보가 통합 변칭된)여진족과의 충돌로 나타난 사건임
ㄴ몇년전 이미 복기대 윤한택 남의현 이인철 윤은숙 남주성 박시현 등 여러 학자들이 고려의 서북 경계에 대해 압록도 두개의 용어로 다르게 사용되고 인식되는걸 밝혀냈고 중세 고려의 압록은 서북 경계가 이 요하를 기준으로 요나라 요탑의 분포도나 사서등을 통해 증명하는등 여전히 한국사에서 만주일대의 역사성은 신석기 시대부터 수천년간 이어진 공간임
ㄴ압록강을 표기할 때 '鴨淥江'과 '鴨綠江'을 구분하지 못해 고려시대 국경선에 큰 혼란이 왔음 <고려사> <요사> <금사> 등을 교차 검토해 고려시대 압록강(鴨淥江)을 확인했고, 현재 중국의 요하가 고려 전기의 압록강이 확실. 실제 《고려사》에 표기된 고려 서북 국경은 푸를록 綠 자를 써 압록(鴨綠)이라고 되어 있음
ㄴ 지금 구글이고 18세기 제작된 프랑스 수학자 본느 등 조선 경계 지도 찾아봐라 실제 어떻게 그려있는지
ㄴ 조선 세종대왕 시기 1443년 최윤덕 등을 파병하여 압록강 너머 만주 파저강 유역을 정벌함 이 승전으로 인해 명나라는 만주 철령위와 공험진까지 보장함을 다시 한번 확약함 청나라 때도 만주 철령위와 공험진 이남을 프랑스 수학자 본느 등이 조선 영토로 측량한 지도를 제작한 배경이 됨
세종실록59권, 세종 15년 3월 20일 계유 1번째기사 1433년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를 아뢸 것을 말하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하였는데, 이때는 바야흐로 파저강 정벌에 뜻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
대한제국은 만주일대의 서간도, 북간도에 이범윤을 1902년 간도 시찰위원으로 파견하고 1903년에는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호구조사, 세금 징수 등 실질적인 통치 활동을 벌였다 이와 별도로 함경북도 관찰사 등을 통해 간도 지역의 지리 조사와 한인 보호를 위한 활동도 병행 서간도와 북간도를 각각 평안북도와 함경도에 편입시켜 행정구역화하고, 군사를 배치
금(金) 시조의 휘는 함보(函普)이며 처음에 고려(高麗)에서 왔는데, ㅡ금사』권1 본기1 세기(世紀) 금나라의 시조 합부(哈富)또는 함보(函普)는 원래 고려에서 왔다. 통고(通考)와 대금국지(大金國志)를 살펴보건대 모두 이르기를 시조는 본래 신라로 부터 왔고 성은 완안씨라고 한다.
고찰하건데 신라와 고려의 옛 땅이 서로 섞여 있어 요와 금의 역사를 보면 이 두나라가 종종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본래 금나라의 황족들은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ㅡ (청황제 칙령으로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
ㄴ ㅂ ㅏ ㄴ 만년 노예족 짱개 한족 송나라 ㅋㅋㅋㅋ 정강의 변 : 짱개 한족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더불어 송사에는 1119년 송나라로 왔던 금나라의 사신들이 송에 입조했을 때 신라에서 왔던 사인(使人)을 대하던 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ㅡ금나라 시조의 출자지(出自地)에 관한 재론(再論)
발해 효의황후 묘지명 중 孝懿皇后墓誌一首并序 일곱. 조회를 폐하고 음악을 그치며, 황제는 영거(운구차)를 바라보네. 떠나는 말은 구름 같고, 나부끼는 깃발은 노을 같네. 장례 길에는 해로가(상여소리)와 피리 소리와 이어지고, 능원(陵園) 속에는 차가운 꽃들이 영원히 잠드시리. 보력 2년 10월 24일 廢朝徹樂 皇望靈車 去馬似雲 飛旐寫霞 送葬之路
薤歌接笳 陵臺之里 長掩寒花 其七 寶歷二年十月廿四日
똥 센 징ㅋㅋㅋㅋ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성종실록45권, 성종 5년 7월 27일 경진 3번째기사 일본국 방장섭천 4주 태수가 사람을 보내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방장섭천 4주 태수(防長攝泉四州太守) 대내 별가(大內別駕) 다다량 정홍(多多良政弘)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삼가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592) 께서 명덕(明德)이
일월(日月)보다 빛나고 성수(聖壽)가 장래에 장구(長久)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상국(上國)593) 과 우리 선조(先祖)가 통호(通好)한 지 정홍(政弘)까지 26대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무조건 만세를 쓰지 않았다는 것도 개소리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자신의 집에서 백관들의 만세 함성을 들었다. 궁궐에서 연주하는 가곡의 가사에 만세(萬歲)를 집어 넣거나, 신료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만세(萬歲)를 세번 부른다.' '천만세(千萬歲)를 축원한다.' 내용을 쓰기도 했다.
또한 외국에서 조선의 국왕에게 만세를 바치는 일도 있었다. 성종의 예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명 사신들이 성종에게 여러 번 만세를 올린 적이 있고, 천하인 오우치 요시오키의 아버지로 오닌의 난 시기에 서군의 총수였던 오우치 마사히로는 조선에 '황제만세(皇帝萬歲)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낸 적도 있다.
정종실록 1권, 정종 1년 6월 1일 경자 6번째기사 1399년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ㄴ 고려 말의 혼란기를 정리하며 조선을 세운 이성계 집안이 군벌 가문으로 이성계의 무력에 당시 만주 동북방의 대다수 여진족들이 그의 휘하 부하였고, 짱개 명을 멸망시킨 청제국의 태조인 누루하치의 6 대조인 먼터무가 당시 이성계 휘하 부하 중 한 명이었음
ㄴ 이런 여진족까지 거느린 이성계의 무력이 요동 정벌 이나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 소탕 등 혼란을 수습하고 민심을 얻어 조선을 창업하게 되는 무력 기반이 됨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지란 등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당시 인물들이 여진족임
ㄴ 1449년 토목보의 변이라고 몽골은 이후도 북원으로 존속하며 수시로 위협했고 반만년 노예 짱개 명 군주가 또 사로 잡히기도 했음ㅋㅋㅋ 동북방 만주는 여전히 여진족이 날뛰고 있어 명은 조선을 우대해
양면 전선 나아가 조선까지 합세된 3면 전선의 부담을 줄이고 지금의 만주 동북 3성 일대는 조선이 황제적 질서로 여진(왜 등)에 대한 세력 지배력을 가지며 견제해주고 있었음
조선 초기는 정도전같은 강경파들이 다시 요동정벌을 준비했을 만큼 조명간에는 긴장 국면으로 대치되었고, 결국 명은 3년에 조공무역(국가간 공무역) 1번 하자는걸 조선은 1년에 3번으로 극구 우겨 관철시킨다 당시 동아시아 조공은 오늘날 국가 간 공무역임 더구나 이럴 경우 짱개 명은 조선이 준거의 몇배로 보답해야 해서 조선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이런 짱개식 조공 책봉 드립은 한나라 유방이 흉노제국 묵특 대선우에게 생포되면서 수십년 속국으로 전락하면서 본격화된다. 그외 이민족이 할거하던 남북조 시대나 돌림빵 당했던 짱개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음
명나라 당대에도 몽골이 짱개 군주를 생포하고 침공한 사건이니, 후금(대청) 누루하치의 명 침공도 이런 공무역의 경제적 마찰에서 비롯 됨 한마디로 수시로 정복당하던 반만년 노예 짱개가 주변 이민족에 평화를 구걸하며 포장하던 방식이 조공 책봉 드립으로 기술되었고 이걸 도리어 짱개가 거부시 이민족에게 반복적으로 처발리거나 정복당해왔다
한국사람들이 짱개 역사를 볼때 착각하고 극주의해야 하는 게, 자꾸 우리나라처럼 일관되게 대한민족이 고조선부터 삼국, 남북국, 중세 고려에서 근세 조선과 대한제국ㅡ 대한민국으로 같은 민족사로 계승된 역사 그대로
반만년 노예 짱개사나 전근대 중국 왕조사를 우리처럼 동일하게 봐서는 전혀 안됨(현 중공의 동북공정에 말려드는 수순임) 현재 짱개가 만들어 논 한족도 허구의 종족명이고, 더구나 수천 년간 북방 유목민과 동방 이민족에게 수시로 처발리고 종속당한 피지배 역사를 반복함
그나마 짱개 한족왕조라는 것도 한, 송, 명 정도에 불과했을 정도로,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이고 각계 직업군에서 활동하는 사람 역시 이런 주체적인 우리식 역사관과 필터링을 장착하고 현시대에 재조명 할 필요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면 함
19세기까지도 반만년 노예 짱개 한족은 만주 특히 요동 동쪽으로는 제대로 기어들어오지도 못했다 (우리 고조선고(구)려시대 백성이자 부용세력이었던 말갈 중에 중세에 가서 신라계 김함보가 북상,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통합하며 여진족으로 변칭, 확장했고(대금), 이후 17세기에 가서 이 여진족이 만주족(청 제국)으로 다시 변칭
그외 상나라, 선비족(북위, 수, 당 제국), 거란(요 제국), 실위(몽골 제국) 등 다 우리 고조선고구려 동방문명권의 만주에서 발원에서 서진, 남하해서 반만년 노예 황하 짱개를 정복하고 지배자로 군림
박선희 교수의 고조선 복식 연구 관련 논문들을 보며, 동아시아 복식과 갑옷의 원류이자 우리 한복의 기원은 고조선 중심지였던 만주 요하의 신석기 문화를 이은 소하연 문화(BCE 3000 ~ BCE 2000년)에서 나와 고조선 고구려로 이어져 그 특징과 정체성이 오늘날까지 도도히 계승될 정도로 유래가 깊음
우리의 기존 고정관념과는 달리 고조선 중심지였던 만주 요하의 신석기 사람들은 중동 지구라트같은 이미 압록강 일대에서 기원전 4000경 직경 100미터 이상 아파트 10층 높이의 적석층 형태의 3층의 원구단인 거대 만발발자 제단 유적들을 건립하고 500여년의 시차를 지나 만주 요서로 진출하면서 영향을 받은 거대 피라미드 제단부터 정교한 다량의 옥세공품이나
천문관측 기능에 단정한 머리나 복식 등을 갖춘 문명인였고, 이들의 복식 특징이 우리 고조선 고구려 복식의 주요 특징으로 도도히 계승이 확인. 그리고 이런 우리의 하늘 숭배, 제천의식이나 옥기, 복식, 갑옷 등 여러 문화들이 북방 주변 유목민과 황하 하한족 지역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됨
일례로 지나의 최초의 상나라 역시 이런 동북방의 고조선 동방문명권에 있던 일부 세력이 황하 일대로 남하해서 하한족을 정복하고 동방권의 점복 신앙과 갑골 문화를 토대로 한자의 원형이자 창제 원리를 담은 갑골문이 탄생함 (그에 앞서 이런 갑골문보다 더 원시적 도기 문자의 유물이 우리 고조선 동방문명권에서도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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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쨉퀴194.개발작(106.101) 끍?wwww
@똥쨉퀴194.개발작(106.101) 발작도 존나 병신 저능아마냥 징징거리니까 더쳐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빠가년ㅋㅋㅋㅋㅋㅋㅋㄹㅇ
@똥쨉퀴194.개발작(106.101) 끍 들 끍 들~~
@똥쨉퀴212.개발작(106.101) 끍?wwww
@똥쨉퀴212.개발작(106.101) 화력이 왤캐 약해졋어??wwㅋㅋww 이제야 내가널 가지고 놀고있다는걸 눈치챈구야~~?www 지능이 튀기새끼라 대가리회전이 느리넼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