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샵에서 안 어울리는 수트를 맞추고 시간이 지나 결국 후회하는 지인을 보고 생각이 나네.

살이 쪄 버려서 예복이 잘 맞지 않는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


여기서부턴 일반화임. 

정장 입는 멋진 직업도 아니고 그저그런 평범한 삶을 사는 주변 남자들의 삶을 듣고 반영한 것이니 여기 사람들에겐 다른 세계 처절한 이야기 같아도, 그냥 재미로만 읽어 줘.




남자라면 많이들 멋진 수트 안의 자신에 대한 로망을 갖곤 하지

그게 옷 그 자체건, 높은 지위의 자신을 상상했을 때의 응당 어울릴 옷차림 모습이건.


사실 많이들 '제대로 된 정장' 소비라는 것에 눈을 뜰 때는 결국 본인의 예복을 맞출 때가 아닐까 함. 


물론 결혼 적령기가 높아지며 그 전에 면접용이나 신입사원룩용, 기타 경조사용으로 일찍이 정장을 고려하긴 하지만, 

둘 모두 공통점은 '아직 큰 돈을 들일 상황이 못 되는 경우'라는 것이지.


그래서 편하게 주변에서 찾을 수 있고 저렴한 캐릭터 정장 쪽을 풀세트 50 안쪽에서 찾아보게 되는 거고. 직장에서 정장을 제대로 입지 않아도 되는 곳들도 많아졌고.

뭐 핏이니 원단이니 디테일이니 잘 모를 때고, 넥타이도 플레인 노트만 벙벙하게 간신히 하거나 지퍼 넥타이만 할 풋풋한 때니까.




결국 이후에 어느 정도 돈을 쓸 여건이 되고, 돈을 왠지 쓰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자신의 멋진 모습에 환상을 가질만한 때가 그나마 본인의 결혼식일텐데, 

여기서 플래너와 제휴 업체가 끼면서 남자들이 자신의 첫 제대로 된 정장에 대해 비교하고 공부할 기회를 많이 희석시키지.

모르면 혹할 거야. 제휴된 곳은 컨택도 편하고 가격도 싸고, 턱시도 두 벌 대여에 뭐 수제화까지 준다니까. 넥타이까지 준다고?


신부 드레스만 해도 스트레스 받고 정신 없는 상황에서 수미주라니 MTM이니 비스포크니 갖가지 용어 듣다 보면 결국 정신이 없어 이렇게 플래너가 소개한 그냥 편한 곳으로 흔하게들 향하게 되지. 

주변에선 '신랑은 주인공이 아니다' 라는 가스라이팅이나 당하면서.


그래도 치수 재고 원단 고르고 하면서 잠깐 뽕은 취해도 보고. 

뽕의 여운으로 욕심이 나다보니 계획에 없던 영국 원단도 해보고, 베스트도 추가하고, 셔츠나 수제화도 추가금 내보고. 다 경험이랍시고. 

끝없이 일이 커지는 것은, 기껏해야 캐릭터 정장이 끝이었던 자신에게 아직까지 적절한 자신의 클래식 복식에 대한 기준이 없는 탓이지.


그리고 한두 달 뒤 옷을 보니 순 비스포크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아니었고, 어깨 패드부터 옛날 스타일 고스란히 남아 있거나 너무 슬림하게 만들어버린 정장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지. 

그래도 거울 보니 슬림한게 당장 사진빨도 괜찮을 것 같고, 전에 샀던 캐릭터 정장보다 좀 멋진 거 같고, 사실 나만의 정장을 샀다는 만족감에 판단력이 흐려질 것. 

여기서 한 백수십만원이 그렇게 나가 버리지.



모쪼록 결혼식은 잘 치렀어. 그러고 현실로 와보니 직장도 제대로 다시 다녀야 하고, 생각보다 같이 사는 생활에 드는 돈이 많네. 

혼자 살 때 할 수 있었던 것들을 못하게 돼.


문득 백수십만원을 주고 산 정장을 보게 됨. 

신혼에 다들 살 찌는 거라지만, 어째 그때 그 핏도 안 나오는 거 같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너무 급하게 맞춘 것 같아 여기저기 만족스럽지가 않고, 

무엇보다 정말 생각보다 정장 입을 일도 많이 없어. 

이게 크지. 자주 입을 일만 있다면 아깝진 않을텐데.


여기서 아깝기 시작하는 거야. 중고로 팔 수도 없고, '그 돈이면' 하고 생각나는 게 너무 많아. 

하다못해 해외 여행이나 좋은 로봇청소기라도 살 금액인데. 

뭐 한다고 130만원짜리 정장을 사고 입지도 않는 조끼를 20만원 주고 추가했지? 정장을 안 입으니 수제화도 버려지네?


그냥 원래 입던대로 편하게 입어야 겠다. 

캐릭터 정장은 이제 좀 안 맞는 거 같지만, 뭐 입을 일도 평소에 없으니 딱히 추가 정장에 욕심이 없네. 

경조사용 한 벌만 사러 아울렛이나 가야지.



주변에 많이 분포한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클래식 의류에 관심이 점점 흐려지더라. 

심지어 정장을 입고 일하는 직군의 친구도, 그런 데 소비할 시간과 금액에 다른 것에 투자를 하고.


그런 와중에 여기저기 얻은 수트 상식이나 디테일, 더 좋은 수트를 보여주면 하나같이 플래너 끼고 했던 예복에 은근한 아까움을 드러내. 

'차라리 같은 값에 제대로 하는 곳을 갈걸'. '너한테 슬쩍 물어보기라도 할걸' 하고. 

나라고 뭐 제대로 도움 주진 못 했겠지만, 적어도 용어 장난질이나 의미 없는 추가금 옵션은 조금 방지해줄 순 있었겠지.


결국은 그 다음부터 아무도 굳이 정장에 관심을 갖지 않고, 딱 경조사 용으로만 편하게 입을 무난한 정장 아울렛이나 갤럭시에서 하나만 사더라. 

맞췄던 예복은 낑기는데다가 바지도 슬림하니 상가집에서 앉기 불편하다며. 


그리고 일하면서도 아메카지나 시티보이룩 입다보니 그 편함 못 잃거든... 



그렇게 정장은 여의도 종로쪽이나 관련 직종 아니면 일반적으로 관심이 멀어지더라. 

킹스맨? 따라서 뭐 멋진 우산이나 사볼 순 있지만, 정장만큼은 아직도 예복샵에서 눈탱이 맞은 그 비싼 금액과 후회에 대한 기억으로 두려움부터 앞서게 돼.

게다가 평소에 편하게 입었는데 정장 입으면 오는 그 관심까지...(어디 소개팅 가냐~?) 부담시러운가봐.


예복샵이 근본부터 잘못한 건 아니야. 매니저들의 안목이 낮거나 테일러 선생님의 감각이 옛날에 머물러 있는 것도 잘못은 아니지.

굳이 퀄리티 따지려 들지 않으면, 두 벌에 수십만 원 대로 저렴하게 맞춰주는 곳은 오히려 일반인들도 맞춤 맛은 볼 수 있도록 기회가 되어 주고 있어. 자존감 높아지겠지.


다만 아쉬운 건 많은 남자들이 전처럼 정장을 많이 입을 시대가 아니고, 정장에 많이 관심 없을 사람에겐 단지 하나의 허영으로 예복샵을 통해 소비되는 것이 안타까워. 

공부만 좀 더 한다면 자신에게 맞는 핏과 원단을 고를 수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어쩌면 다른 옷들보다 가볍고 편하고, 그 어느 자리에서도 어느 나이에서도 오래 먹힐 옷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사치품이라는 인식의 예복으로 평범한 청년으로 하여금 수트의 역할은 끝이 나버리는 기분이 드네.



좆보세 사이트의 정체불명 스포츠코트나 셋업수트가 유행하는 걸 보며 기분이 묘해. 

어쨌든 비지니스 캐쥬얼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거고, 단정해 보이려는 필요와 그에 맞는 옷에 대한 관심은 사회 생활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지.

그 관심의 테두리 안에 비록 조금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정통 클래식 복식에 대한 호기심도 항상 발을 걸쳐놓을 수 있길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