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거리에 카라의 ㅎ ㅓ니, 투피엠의 어게인&어게인, 원더걸스 노래가

흘러 나오던 시절... 


나는 여친과 헤어지고 큰 상심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백갤이란 곳을 접하게 됐다. 

당시 백갤의 성지는 신세계 본던(본토던젼)이라는 곳으로 명동의 신세계 본점의 지하 

명품관을 이르는 말이었다. 지금도 식품관과 지하 명품관이 이어져 있는데, 지금은 

각종 명품시계 매장들이 즐비하지만 과거에 금강제화 매장과 크로켓앤존스 매장이 붙어 있었다.


따라서 할일 없고 돈 많은 백갤 갑부들은 이 신세계 본던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득템'을 노리곤 했다. 

당시 금강 진열대엔 영국 정통 굿이어웰트 수제화를 표방한 금강제화 헤리티지 리갈 7천번대가 진열돼

있었다. 그리고 처치스 쳇윈드, 콘술, 디플로맷 같은 제품들도 있었다. 이후에 그래프턴이나 섀넌도 수입했지만

당시엔 딱 쳇윈드, 콘술, 디플로맷 뿐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무조건 검정 아니면 브라운이었다. 


당시 백갤러들은 '면세점'이란 인물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백갤러의 단군왕검 같은 존재로 많은 갤러들이

'면세점 가라사대'를 외치고 있었다. 


당시 본던 금강제화에 들어가서 처음 본 금강 헤리갈 7천번대는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동안 번화가 쇼핑몰에서 10만원 정도에 구매한 에스콰이어 고무창 블레이크 검정구두가 

전부였던 내게 헤리갈의 번드르르하고 쫀쫀한 가죽은 차원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당시 헤리갈 상품권 신공 구매가격이 21~24만원 정도였는데, 24만원을 주고 구두를 산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백갤러들의 꾀임에 빠져 결국 그 마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첫 제품은 처치스 새넌을 모방해 제작한 검정 더비슈즈였는데 그 후 거의

10년 동안 잘 신고 다니다가 비를 너무 자주 맞아서 가죽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사할 때 버렸다. 


둘째로 구매한 제품은 싱글몽크 브라운 제품이었는데 이것 역시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처치스 몽크의 173 라스트를 베낀 것이라 그런지 맵시는 좋았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본던에서 봤던 처치스 쳇윈드가 눈에 아른 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쳇윈드의 상품권 신공 

가격은 50만원에 육박했다. 50만원이면 웬만한 직장인 월급의 5분의1 수준이다. 


아무리 백갤에 미쳐 있어도 50만원 돈을 구두에 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어느순간 내 손에 들려 있는 금강 상품권 7장(8장?) 그렇다 난 

쳇윈드를 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이야 존롭 에드워드 그린 신고 다니는 사람들 많을테지만 당시로선 처치스만 해도 엄청난 구두였다.

백갤의 터줏대감으로 면세점의 위상을 위협하던 세이지란 백갤러도 처치스를 극찬하곤 했다. 그 외에 

처치스의 견고함을 칭찬하는 갤러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처치스 쳇윈드를 구매하니 이젠 처치스 로얄 컬렉션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제기랄...

처치스 로얄 컬렉션은 지금은 단종됐으나 당시엔 처치스의 최고급 라인이었다. 현재 쳇윈드 가격이

140만원 정도인데 당시 처치스 로얄 컬렉션의 가격이 120만원 정도였고 상품권 신공을 쓰면 7`80만원

대에 구매할 수 있었다. 처치스 로얄 컬렉션은 그야말로 황족의 구두처럼 권위가 있었다. 존롭 만큼은

아니어도 당시 백갤러들에게 처치스란 브랜드의 위상을 생각했을 떄, 처치스의 최고급 라인 로얄 컬렉션은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사는 제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로얄 컬렉션을 신어본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발등이 너무 낮고 발볼도 지나치게

좁았다. 아무리 신으려고 노력해도 이건 전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로얄 컬렉션을

포기했다. 그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트리커스였다. 당시 트리커스의 브로그 더비 슈즈가

백갤러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닉네임은 기억나지 않는데 어떤 배 나오고 키 작지만

패션센스가 좋은 안경 쓴 아재 한명이 항상 트리커스를 신고 다녀서 더 인기가 있었다. 당시는

불량소년 할배가 등장하기도 이전이었다. 


그러나 트리커스는...이건 또 뭐랄까 너무 펑퍼짐한 신발이었다. 정사이즈를 신자니 발등과

발볼이 남을 정도였고 한 사이즈 좁게 가자니 라스트에 발가락이 끼는 느낌이었다. 결국 

트리커스도 포기하고 다른 브랜드를 물색했으나 대체로 처치스만 내 발에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날 백갤러들이 난리난 사건이 터졌다. 그간 금강이 수입해서 전시하던 

에드워드 그린을 파주 아울렛에 반값에 풀고 있다는 정보였다. 너도 나도 휴가를 내서라도

파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뚜벅이로서 버스를 타고 멀리 파주까지 날아갔다. 


파주에 가서 에드워드 그린을 신어 보았더니 이건 처치스와는 다른 신세계였다. 

걸을 때마다 아치형의 절묘한 구조가 내 발목까지 부드럽게 지탱해 주는 느낌이었다.

아..그래서 이게 100만원이 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에드워드 그린이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그린도 내 발에는 맞지 않았다. 사놓고 보니 발뒷꿈치가 계속 들리는

것이었다. 패드를 껴서 신자니 애초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백갤장터에 "파주 출장비 2만원 받고 팔아요"했다가 욕 오지게 먹고 처분했다. 

(그래도 산다는 사람은 엄청 많았다. 그만큼 에드워드 그린이 백갤러들의 워너비 슈즈였음)


에그를 잠깐 신어보고 나서 나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딱 처치스까지만 적당하다고.

그러다가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거의 200만원 하는 신발을 120만원에

구매하 수 있는 찬스였다. 세인트 크리스핀이라는 역시 하이엔드 브랜드였다. 이건

직접 신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무작정 주문했는데 처치스만큼 발에 잘 맞지는 않았지만

에드워드 그린처럼 낑기진 않았다. 그럭저럭 신을 만했다. 이 구두도 역시나 하이엔드라

그런지 처치스를 신을 떄와는 걷는 느낌부터가 감촉이 달랐다. 구두가 편하면 얼마나

편하겠어 하겠지만 확실히 처치스의 딱딱한 느낌과는 다르게 발 전체를 탄탄한 가죽이

보드랍게 감싸 안는 느낌이었다. 이런 구두라면 오래 신어도 발이 퉁퉁 붓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역시나 신는 건 처치스나 금강 헤리갈 뿐이었도 세인트 크리스핀도 사실 신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백갤장터에 팔아 버렸다. 


이후로는 더 비싼 구두를 사본 일이 없다. 딱 처치스까지였던 것 같다. 이걸 보고 어떤 백갤러는

어중간하게 경험하고 접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처치스도 내 수준엔 매우 과분하다.


나는 그냥 코스프레 놀이를 했던 것이다. 어떤 백갤러들은 클래식이란 걸 일종의 삶의 일부처럼

생각하지만 또 어떤 백갤러들은 그냥 코스프레 놀이처럼 생각한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냥 어미새 물어다주는 자켓과 구두를 사서 신어보고 사진 찍어보고 하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반인들은 존롭이든 크로켓앤존스든

관심이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로크나 헤리갈 7천번대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 정도도 

과분하다. 여기서 말하는 금융업 변호사 이런 전문직들은 물론 존롭 신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존롭을 신는 것도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다. 어차피 알아보는 사람은 백갤러 아니면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지금은 신세계 본던도 사라지고 (아마 명품관에서 본관으로 옮긴 것 같다) 처치스도 더는

상품권 신공으로 구매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그래도 처치스 정도가 백갤러들에겐 최고의

구두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나온 시티 라인이 아닌 일반 라인을 말하는 것이다)


백갤러들이 매출의 30%는 올려줬을지 모르는 헤링슈도 요즘 장사가 영 안되는 모양이다. 

과거엔 진짜 헤링슈에서만 사던 사람들도 이젠 각종 편집샵과 다른 온라인 창구를 통해

구두를 구매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끔씩 헤링슈 사이트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