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구함이 근본으로 항상 좌절함 곧 유동함이며 곧 항상 순연함을 보이니
평등함과 지혜와 순연과 자유를 위해서이네
완전한 순연성 유동을 본다면 누구나 이미 당신은 실질적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일체를 전부 동시에 성불순연하여 모두가 바른 유동성을 보장해야한다.
일체 조복과 일체 순연과 각각의 일체 미시완결성으로 보아 오직 이 법이다
모든 중생이 절대순연과 완전한 유동성을 얻는다면 스스로 최대로 깨닫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절대순연 가정적 기대와 절대 내부순연과 절대 내부 유동성공급을 해줘야하는것이며, 오직 그 빛하나로 일체를 전부 본래성불함을 본다.
역의무 교환은 완료되었음.
일체 순연과 조복은 경직적 기대가 아닌 유동적 기대이다. 왜냐면 이른바 일체는 서로를 보는 눈과 내부를 보는 눈으로 해탈하는것이며 순연유동관찰을 얻는것이기 때문이다.
총 부채와 역의무량에 따라서 전체 조복률과 순연 근접도가 올라간다.
이른바 세간에서 모든 유동적인 관계가 연결되며 일체의 범위는 오히려 역의무량 증대로 증가하나니 만일 최대법을 얻어 일체를 보위하고자한다면 오직 당신만의 순연광명을 주는것 뿐만 아니라
역의무자들에게 역의무를 맡기는것또한 필요하다.
일체 삼복유입은 이미 일체 세간에서 전부 공수가능하며 해탈해도 다를바없다
순연 유통이면 언제나 순연이자 언제나 유동성 확보도 된다
일체 만족이 곧 절대 순연이다, 그 역 또한 성립한다
절대 순연이면 일체는 최대만족을 햇고 억지로 일체 만족을 이끌어냈자면 이미 최대순연이다.
탐착과 순연한도에서 대도를 얻는다 그래서 내부 유동성을 보인다
일체 유동성과 순연좌절은 전부 평등하며 절대적으로, 넘을수없는 무상도리다
규명적 정의로서 근본욕구의 자연 경직은, 순연과 내부절대유동을 가정하여라
이미 아름답고, 미학과, 및 모든차원에서의 자기 규명 곧 외부 거리조정력으로 결정되니, 절대 순연안에서는 이미 모든 아름다움과 조복받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총미시균형은 총거시균형에 영향을 준다.총내부유동성확보는 총미시균형속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총 내부유동성확보가 총 거시균형을 자발적으로 실현하여 확보성이 부족하면 모든 법다운 오해를 필요케한것이니라.
왜인가 아른바 미시균형 속도가 느려 교환을 알지못하고 다만 교환된 줄로만 알아 근본욕구는 아직 정체되있기 때문이다.(비근본 욕구는 모두 공양으로만 모두 교환하여 균형을 이룬다)
그럼 저 오해를 어떻게 불식시키나? 그래서 진실된 거시충격이 필요한 시점이고 그것을 주는 방법은 오직 모두를 순연하는 대 공양이다.
일체순연에는 어떤 미시거시 문제도 없고 유동성은 오직공급으로 해결해주리라
내부 유동성이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외내 미시 거시 균형순연은 일체를 위한것이다
그외에는 적정법이 아니다. 설사 시끄러움을 싫어해도, 설사 정교한 이유로 모든것을 부정하여도.
법을 가정하여 가장 좋은 길을 위한 공양은 순연과 유동성공급인데 순연이 가장 좋다. 거기에는 진실로 어떤 규명을 버려도 된다.
내부 유동성 확보는 이 법이 실지로 대법을 얻냐에 달렸다. 상황에 다라 다른데 일반적으로 푸쉬를 그렇게 하는것이 더 위대한 능력이 된다.
무엇을 보고 평등하게 하느냐의 조건을 다 보아서 내부 한물건의 지혜가 증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게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가 부차적으로 만들어내는 언어융통을 무시마라)
절대순연적 이치가 가장 훌륭한 결과이자
가장 훌륭한 장엄이다,
진실적기대로 완전순연 충족할 욕구면 욕구가 즉시부처광명이라 자체적적정하니 곧 자체 순연한다
따라서 욕구만으로 부처님이다.
가장 훌륭한 법에는 가장 훌륭한 순연을 가정해야하며, 또 일체가 모두 내부유동성을 얻는다는 기대를 끌고가야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법을 이끄는 이로서 세간에 비난하고 충고하기위한 조건이며 그 외는 법을 축소한 빋을 중생에게 빚지는것에 불과하네
융통이면 일체가 광명이다. 스스로 부처로써 대회향공양이다
스스로 종복한다면 어떤것이든 언제나 완전한 상태이며 설사 종복하지 않아도 잡류만 치울수 있다면 언제나 완전한 상태이다.
상태를 벗어나는 욕구가 증대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절대적 기대에 막히게 되고 이 경우 근본욕구가 변하여도 실지로 조복률은 동일하다고 할수 있다.
다만 내부의 균형이 문제인데, 그러므로 바로보지않게하며 오직 욕구 충족으로만 보게하는것이다. 그러면 교환이기 때문이다
총 조복률은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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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보시이며 즉위엄이다 그러므로 대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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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축소된 방편은 그러하여 직접적인 순연법을 위한것이다. 즉 축소법은 축소된것이 아니다. 허나 축소법은 스스로 보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보지 못하는 법은 법이라고 볼수 없으며 모든 순연하지 않는 법은 모순이 아니라고 할수없다.
당신은 부처님
절대 순연기대일시 일체에 전부 정통하여 완전한 만족이다. 그러나 개인의 욕구에 세계가 제한되있다면 어때서 법으로 광량무변을 얻는가. 전체 욕구에 일체가 묶여있기에 가능한것이고. 절대적 기대는 그 전체 욕구에 관여받으므로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일체미시순연이 곧 순법절대법즉성불행이다.가장 큰법은 이것으로만 얻을수있다
법의 소유자라면 마땅히 순연이니 이미 순연하면 법의 소유자를 보고 법의 소유자라면 법인 부처님을 본다
절대제유순연이 진리다
순연해탈이 곧 기쁜것이다
일체역연해체순연법으로 모든 욕구관 자기모순을 벗어나라
관조적 평등 상황에서 불계는 불선은 없다
일체가 스스로 일체 즉시 법도를 증명하는구나. 오직 관조하면 풀려버림을 관찰하라.. 4대는 세상을 주관하는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4대는 항상하지도 않고 성질있는것도 아니어서 언제나 실다운 법을 만들지 못해서 최종 증명과정에는 안착해도 근본법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대에 의하여 욕구를 축소하고 내부를 경직시키지말라! 그 법은 허무하며 불가능을 반복하며 얻지못하고 실지로 그대가 그러지 않을때와 대비하여 이득 본것 이없다.
욕구의 충족과 관조 그 자체는 행위가 아니다. 그저 바른법이며 그저 평등한 균형상황을 이끌어 낸다.
진리는 모두가 볼 수 있다. 진리는 모두가 만질 수 있다
진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다.진리는 누구나에게 퍼져있고 누가 분별하는 입으로 받으며
모든 법은 모든것으로 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규정을 끊어라
언제나 조복받은 과거와 현재가 합쳐같은 모습이다
거울에 비추고도 정면의 모습이 보이듯, 거울너머에서 거울밖을 보듯 미래는 그렇게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 법에 당신은 언제나 부처님 미시적 시간관계가 그러하듯 거시적 인연관계들또한 그러하다.
언제나 평등함을 궤뚫어보니 경직성 유동성을 파훼하는것
조복의 시간차는 극복할수 없으나 유동가정에서는 그것마저 넘어선다
언제나 조복평등하므로 깨달음이고 그래서 순연을 자아낸다
바로보면 어느 누구도 죄짓는것이 잇을수없고 절대순연으로 조복만 있다
언제나 법의 모자람을 만들지 마라
가장낮은것이 법도 없고 죄도 지음이며 중간이 법은 있고 죄를 금함이며 최상이 법은 있고 죄랄것이 없는것이다.
일체가 스스로를 돌아볼수 있다면 일체는 스스로 부처자격이 있다
일체에 평등하면 무한한 득과 비모순을 얻으며 다만 오직 인연으로 일체를 전부 스스로 이끌고 나아간다. 이끌어주는 당신은 부처님이나 거시미시는 언제나 스스로 나아가는것이니 평등한 까닭이다. 당신은 부처님
일체의 모든 잡된 오온이 전부 무상복의 복이니 그것을 파하거나 자유롭지 않게 하거나 혹은 정체되어 즉시 모순이 된다면 그것을 막기위해 순연오온공급을 해주면 그만이고 자비롭게 나와 같다고 보면 사랑이도다. 중요한것은 오직 순연의 축소를 방조하는것이고 권하는것이다. 그것만 없다면 일체는 모두 스스로 내 앞에 조복된다
일체가 스스로 자체모순이 없게 되는 과정에서의 5계를 파하는 일은 조금도 죄가 되지 않으며 8계도 그렇고 그 외의 모든 언어와 부처님의 법신 역사로 증명한 계가 그렇다.
자체모순을 파하는 그 일만이 옳은 일이다.
경직적인것은 평행 이동 유동적인것은 역방향조정 본질은 양측직선방향일치다
완전한 공양이란 곧 삼복유입이다 삼복유입외에 완전한 공양은 없다
어느 잡류에도 능히 불관조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파유자재받은것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 법을 따를 그 일체가 곧 법이다.
일체 스스로 평등함이 그것이 일체 스스로 사자좌에 앉아서 부처님들에게 다함없는 회향을 함이다.
스스로 시간과 욕구관계순서와 역전적 주체에 모두 평등하면 그것이 일체 모든 부처님께 영원한 공양을 올리게 됨이다
다른 마음은 구하지 말라 어느것에도 모두 순연하는 그 마음으로 일체를 모두 수용만족하라
일체역연해체순연법이면 그 어떤 정이로운 법도와 질서가 파괴되어도 좋다
불은 제유삼복간의 순연적 연결을 말하는것이다. 생사적 순연공덕상 실현은 불이아니다. 법은 내외적 순연연결을 말하는것이다 내외적 경직이 전제돼면 대법이 아니다. 언어융통집단은 승이 아니다.
그러므로 순연하면 곧 성삼복이다.
모든 잡류는 거시에서 왔다 미시로 들어와 적립되며 미시욕구로 발현되어 그 합과 거리의 관계인 거시적 압력으로 변하여 유입된다 그래서 내외관조를 한점에서 보는 지점을 잡류가 분명히 훌륭한 기능을 하는 단위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는 장애물로의 역할도 하는것이어서 세상유일한 방편이 잡류제거를 위해 이것만이 유일한 방편이되는것이다. 그러나 잡류가 만일 어느지점에서나 평등하게 환원되는 지점에서의 형식이 있다면 그 경우 잡류도 근본마음으로 유입될것이다. 그 경우 방편은 무기능할것이며 언제나 이 한마음 회향뿐이다 일체의 경직성을 그러므로 파훼하라
순연하는동안 상태적 마장은 없다. 자신을 평등하게 돌아볼수 있다면, 평등상황에서는 일체 미시경직을 해체하는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거리 오온 유동성에 의해 법이 축소되는 일이 없고 외부경직역연과 내부경직의 문제에 빠지는 근본 이유도 아니다. 거리 문제를 넘어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평등해라. 거리를 굳이 조정하는것은 평등이 아니다
통합법에서 당신은 부처님
절대 유동상황을 가정하지않아도 잡류계정식과 근본욕구 잡류 환원식을 사용하면 언제나 유동상태를 만들 수 있다. 어떤 상황이든 절대 근본으로 귀결하여 당신을 품을 수 잇나니 오직 영원한 만족을 요구하여도 그대여 내가 그대를 위해 일체쾌락의 문을 여리라 언제나 만족하는 절대 무방향지점의 문을 열리라 절대 관찰방향의 눈을 뜨리라
그러니 중생이 언제나 평등하게 삼복유입자유하에서 스스로 노닐게한다
법의 축소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된 법이며 적합성이 없다. 적합성의 판별기준은 결국 여기에 묶여있다
욕구에 다른 적합이므로 마땅히 일체는 이러한 적합성에 따라야할것이다. 욕구순연을 벗어난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순연하는 법이 아니라면 그것이 모두 망상분별하는 과를 짓는것이다
일체가 모두 나의 보시를 받은자이니 이중에 모두가 순연하리라 당신은 부처님 일체심중엔 어디에도 거스르지 않고 어디에도 거스름이 없고 어디에나 순연한다. 왜냐면 안밖과 보고 보여지는것과 들어오고 나가는것과 무엇보다 삼복균형에서의 완전순연은 이미 오지도않고 가지도 않고 생기거나 사라진다는것도 없고 그대로거나 새로움도 없으며 완수되지 않음이 없고 구분하여 기록하는 관계도 없다. 언제나 순연하고 오온을 오온으로 조복하며 광명이 일체를 모두 아름답게 비출것이다
그 외에 다른 법이 없다 완전순연이 그냥 영원한 안락이다. 그 외의 고요함이 즐거움이라 한다면 그것에는 증명을 해야한다. 그것은 욕구의 실체가 곧 고요함이란 것이다. 근본욕구는 스스로 고요함을 바라는 법이 없고 평등함만을 보여야 조복된다. 그러므로 욕구의 본질이 고요함이란 고정은 틀린 고정이다. 그러므로 나는 평등절대순연을 통한 고요함만으로 최고의 고요함의 지위를 누려야함을 말하는것이다. 이것이면 이른바 특수가정에서의 계율을 파괴하여도 법이 계속되야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고, 절대적 순연이 질서로 우리가 법으로 가는 다리를 놓을수있음을, 일천제를 스스로 성불하는 광명을 발하는 법을 말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욕구는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양측직선방향으로 순연하면 좌절해버린다. 그러나 욕구가 없으면 진리도 없으니
왜냐면 순연으로 일체를 모두 스스로 청정케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순연한다면 모든 방향과 거리에서 어긋남이 없고 또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거리에서 스스로 보살의 절대적 기대를 사용하므로 욕구간의 모순이 없고 언제나 양적 모자람을 내부유동성을 통해 욕구간 모순을 없게 하며
또 이런한 이치라면 언제나 서로 대립해도 서로 거리가 달라도 모두 보살적기대로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가며 순연할 수 있는것이다.
모든 규범적 율법은 이렇게 모두 상대의 내외욕구에 순연함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욕구의 단순한 감소와 욕구의 방향적 제한은 규범에서 빠져도 좋게된것이다. 오직 서로 순연하라 당신은 부처님
삼복순연에서 미시도 방향성을 잃고 거시도 방향성을 잃는다. 미시는 순연함으로 거시는 접함무의미를 얻어서 그러하다. 거시에서는 교환만 있다
일체거리 조정은 기대형성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모든것에서 대중은 후험이고 자신의 선택은 선험이다 왜냐면 거리조정은 자신의 감각을 조정하는 과정이기 대문이다. 그때에는 균형점도 변한다. 오직 스스로 창조해가는 그 지점에서 말이다. 그때의 변동은 편집증적 기대로 변한다. 따라서 거리조정은 수렴한다. 그때가 되서는 다시 거리차별개체의 변동대로 간다 결국 중요한것은 순연이고 이때 절대 미시기대란 편집증적 기대를 넘은것으로 모든 기대가 순연을 가정한 기대로만 형성됨을 의미한다. 거리변환은 보살도 어찌해줄 수가 없다. 이것이 미시욕구의 절대성이라고 하며 순연외에 다른 법이 없는까닭이다
이 법외에는 다른 진리는 없고 이 법을 여의고서는 어떤 진리를 얻을 수 없다 쉽게 자기자신을 돌아보기만 하라
왜냐면 오온이 두루하고 오온이 언제나 갈증있고 오온이 언제나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님
총미시가 곧 거시 균형을 결정하고 거시균형이 곧 미시 균형기대점을 결정한다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
순연이 곧 회향이며 바른 진리는 일체 스스로 깨닫게 한다.
거리와는 무관하게, 총 욕구 순연율이 곧 총 중생 구제율이다 오직 절대순연만이 모든 명분과 모든 실재하는 이치와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
일체잡류에도 법은 완결하다
이와같이 총욕구 증대율은 오직 총욕구 순연율에 달려있으며 총욕구 순연율은 오직 절대적 기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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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절대적 보살기대가 곧 대회향이며 이에 대한 모든 안팍인과삼세주객거시미시의 모든 기대를 원고하게하는 믿음에서 모든 일체 욕구를 만족하는 회향이 나온다
보살이 일체를 모두 떠받침 받아 일체를 모두 구제하니 일체가 스스로 일체를 부처로 장엄하는 방법이네
순연은 영원한 완결이다
탐착은 명확성은 있는데 유동성은 없는것이다. 유동성을 공급해야하며
만일 명확성을 줄이는 논증이나 행위라면 법은 축소되고 내부 경직성은 증대하여 풀수없게된다
당신은 부처님
바른 법문으로 관찰하자면 일체는 언제나 스스로 부처다.
진실된 평등과 절대적인 유동순연은 완전히 평등한 서로간의 성품과 언제나 차별없이 직선순연을 자아내는 지혜로 얻는다
그것은 이미있는 경직까지도 파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