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먼저 말씀드리기를 산봉우리에 관한 내용들에서 예상한 대답이엇습니다.
대동여지도 까지는 저도 어느정도 고려하여 글을 올렸고요
기쁨님은 실사로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셨는데 일단 자세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단 말씀 드리고요

밑으로 제가 하나 퍼온글을 보여 드릴까 합니다.
출처는 이전처럼 블로그 입니다.

英宗十一年 江原監使趙最壽 啓言 鬱陵島地廣土沃有人居間地 而又有于山島 亦廣闊云卽 所謂西字與 此圖之在東相佐

영조 11년(1735)에 강원도 감사 조최수(趙最壽)가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울릉도는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습니다. 또 우산도가 있는데, 역시 넓고 광활합니다.’라고 이른즉, 소위 西字는 이 지도에서 동쪽에 있는 것과 서로 다르다.

 

 

 

또, 일본 국회 도서관에 있는 대동여지도의 필사본에도 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대동여지전도-울릉도  <U>http://blog.naver.com/cms1530/10033191661</U>

필사본은

“영종11년(1735년) 강원감사 조최수가 울릉도를 시찰,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며 사람이 산 흔적이 있고 그 서쪽에 우산도가 있는데 역시 광활하다’고 적었다. 그러나 소위 서쪽이라고 썼지만 이 섬은 동쪽에 있어 차이가 난다”

라며 독도가 울릉도 동쪽에 있다는 부연 설명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강원감사 조최수가 울릉도를 시찰했다고 되어 있으나, 1735년에 실제로 수토관으로 울릉도에 갔던 것은 강원감사인 조최수가 아니라  삼척영장이던 구억이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윤4월 8일에 수토관이 울릉도에 가 있었고, 구억은 울릉도에 비석을 새겨놓고 있습니다.    이 비석은 일제시대까지는 현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유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개의 울릉도 수토관 관련비석 <U>http://blog.naver.com/cms1530/10033707103</U>)
 
따라서, 지도에 "조최수가 울릉도를 시찰"했다고 나온다면, 이것은 그렇게 신뢰할만한 소스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발언의 출처를 "장한상"으로 본것은 "승정원일기"의 기록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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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1년(1735년) 1월 17일 (무자)

 

 興慶曰, 江原監司趙最壽狀啓, 鬱陵島搜討, 今年當擧行。而道內農事, 不免慘凶, 往來時所入雜物, 皆出民間, 營將及倭學等, 所率甚多, 累朔候風, 所費不貲。當此荒年, 必多騷擾, 今年姑爲停止, 待年豐擧行事陳請矣。今年關東年事, 果爲凶歉, 多人治送, 累朔候風, 不無弊端, 而此是定式以三年一往者也。昨年旣不得擧行, 今年又爲停止, 則殊無當初定式之意, 何以爲之?

上曰, 此事, 何如? 取魯曰, 丁丑戊寅年間, 朝家送張漢相, 看審圖形以來, 而聞鬱陵島廣潤土沃, 曾有人居基址, 或有船舶往來之痕。其西, 又有于山島, 而亦且廣潤云矣。<U>其後</U>仍有三年一搜討之定式, 此與年例操鍊停止, 有異, 事係海防, 申飭, 恐不當以本道歉荒, 些少弊端, 每年停廢矣。廷濟曰, 往在丁丑年間, 倭人請得鬱陵島, 故朝家嚴辭不許, 而使張漢相往見此島, 三年一往, 仍爲定式矣。本道凶歉, 固爲可念, 而此事之每每停廢, 亦甚可悶矣。

 

흥경이 말하기를 강원감사 조최수의 장계에 "울릉도 수토를 올해 당연히 거행해야 하나, 도내의 농사가 참흉을 면치 못하여 왕래할 때 필요한 잡물이 모두 민간에서 나오고 영장과 왜학등 따르는 사람들의 수도 심히 많습니다.  달이 쌓이고 바람을 기다리므로 이 일에 드는 비용을 세지 못합니다.   마땅히 이번 흉년에도 필히 여럿이 떠들썩하게 들고 일어나는 일이 많으므로  금년은 잠시 정지하고, 풍년이 오기를 기다려 거행할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금년 관동지방의 일은 과일은 크게 흉년이 들었으나 많은 사람을 보내는것은 달이 쌓이고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 폐단이 없지 않으니, 이로서 3년에 한 번씩 가는것을 정식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지난해 이미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금년에 또 이를 정지하면 처음에 정한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니, 취로가 말하기를 정축-무인년간에 조정에서 장한상을 보내어 (울릉도를) 보고 형상을 그려온 이래 울릉도가 넓고 윤택하며 토질이 비옥하다고 들었으며, 더하여 사람이 살았던 자리가 있고, 혹은 배가 왕래하였던 흔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또 우산도가 있는데 또한 역시 넓고 기름지다고 말하였습니다.  <U>그 후</U> 3년에 한 번씩 수토하는 것을 정식으로 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출처 : 승정원일기 <U>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jsp?mode=k&sjwid=SJW-F11010170-01800</U>

<U></U> 

아직 승정원일기의 국역은 서비스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국역은 제가 대충한 것 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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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이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의하면, "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있고 넓고 광활하며 기름지다"고 한 발언은 강원도 감사 조최수의 장계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조최수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 토의를 하는 과정에서 김취로가 "숙종 이후 수토관들의 발언을 빌어서"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발언의 출처를 "장한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其後仍有三年一搜討之定式" 이라는 문장 때문인데요....  "그 후로 3년에 한 번씩 수토를 定式으로 삼았다"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장한상의 수토(1694)이후   숙종 때인 1697년에 주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1699년 월송만호 전회일과 1702년에 삼척영장 이준명이 수토를 다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Link> <U>승정원일기 관련기록 </U>

Link> <U>조선왕조실록 관련기록</U>  울릉도에 3년에 한 번씩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하다.  1697년(丁丑, 조선 숙종 23)

 

즉,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문제의 이 발언이 행해진 시기는 1697년 이전으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고, 1697년 이전의 울릉도 수토관은 장한상 뿐입니다.

 

그리고,  "울릉도, 독도를 표시한 조선지도 목록"에서 보실 수 있는 것과 같이, 우산도는 1696년의 안용복 2차 渡日 이후 18세기 초~18세기 중반 무렵을 기점으로 울릉도의 동쪽에 표현되고 있기때문에, 영조(18세기초) 때나, 이후 청구도- 대동여지도가 그려질 당시(19세기초)의 우산도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울릉도 서쪽의 넓고 광활한 우산도"와는 맞지 않습니다.
(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한 조선지도목록 <U>http://blog.naver.com/cms1530/10033241907</U> )

 

따라서, "우산도가 넓고 토질이 비옥하며, 울릉도의 서쪽에 있다"라고 한 것은

영조 때(18세기 초)나 청구도가 그려지는 시기(19세기 초) 일반에 널리 퍼져있는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숙종 때의 장한상이 안용복 이전의 "동람도"적 특성에 의한 우산도 인식을 표현한 것을

약 40년 뒤에 영조 때의 김취로가 인용하여 언급한 것에 불과하고,

100 년 뒤의 김정호 코멘트는, 김취로의 발언을 조최수의 보고에 있는 내용으로 잘못 인용한데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