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면접보고 입이 바싹 바싹 말라들어가던 차에 연락 받았어.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네.
여기 형, 동생들이 목숨 거는 (저질)스펙 말해볼게.

* 밑에 요약하기 귀찮으니 스펙에 자잘한 부연도...

지방사립 영문과 4년 졸. 학점 3점 극초반
=> 학점 잘 주는 교수 찾아가며 들은 게 아냐. 핑계 아니고. 오죽하면 꼭 배우고 싶었지만 전공과 무관한 \'XML의 이해\'까지 찾아가며 들었어. 
     얻은 건 순수하게 학문을 탐구했다는 자존심. 잃은 건 \'돈\' 혹은 기술 관련된 공부(상경, 이공)를 하지 않은 인력은 취업이 힘든 현실에 날린 시간. 
     나만 손해인 것 아니었냐고? 부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토익 - 750
=> 나는 이것처럼 점수로 사람을 평가하게 되는 시험은 공부 안해. 전 직장에 근무할 때 \'토익이나 보자\'고 생각해서 특별접수하고 본 시험이야.
    유효기간이 간당간당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해.
    주변에서 나보고 병신이래. 그래서 얻는 게 뭐냐고. 나도 몰라.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면 쪽팔리긴 해 솔직히.

자격증 - 정보처리기사, 네트워크관리사 1급, PC정비사 1급
=>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286 컴퓨터를 만지고 컴퓨터 쪽은 계속 관심이 있었어. 이때부터 왠만한 고장은 내가 알아서 고쳤고. 대학을 영문과로
    들어가니까 \"인문계열 애들은 대개 컴퓨터나 기계 모르지 않나?\"라는 의식이 팽배하더라구. 내가 이런저런 거 할 줄 안다고 해도 안 믿고.
    그래서 그냥 단기간에 딸 수 있는 자격증을 마련해놓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책 하나 사서 공부했지. 정보처리기사는 처음에 생각 없었는데 나머지 
    두 개 자격증을 1급으로 따려면 필요하더라구. 네트워크 부분은 학교 다니면서 PC방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이 도움 됐어. 몸으로 익히고 책 보니까 
    알겠더라구.
    
경력 - 지방 일간지 편집기자 2년
 => 별 생각 없이 들어갔는데 의외로 기자라는 직종이 나랑 너무 잘 맞는다는 걸 알았던 케이스야. 졸업 후 1년 놀다가 더 놀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들어갔어. 지방 일간지 경영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지 처음 알았어. 슬슬 왜 사람들이 \"서울, 서울\" \"메이저, 메이저\" 억억대는 지 알게 됐지.
     퇴사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대표이사가 비도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야. 자세한 사항은 내 닉네임으로 계속 검색해보면 나올 거야. 

인턴 - 중앙일보 4개월
=> 지방지 퇴사 후에 평소 관심 있던 해킹, 보안 공부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돈 10만원 가지고 무작정 올라왔어. 학원비는 카드로 10개월 결제했구. 
    한달 30만원짜리 고시원에 방 잡고 여기 들어갔지. 9~ 6시까지 일, 7시 ~ 10시까지 학원. 원래 알바로 들어갔거든. 외부필진DB 구축 작업. 
    이거 대강 대강 일하다보니까 어느날 대표가 \"편집기자 했었다면서? 제목 한 번 달아봐\"라면서 기사를 몇 꼭지 던져주고 가더라? 제목다는 건 
    내가 좀 재밌어라하고 자신감도 있었던 일이야.
    몇 개 달아서 건넸더니 이게 의외로 반응이 좋네. DB 구축이 슬슬 마무리될 때였는데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어. 유언에 관련된 기사 써보래.
    써서 편집장님한테 건넸더니 이것도 반응이 좀 있네? 그래서 급 인턴으로 전환된 거야. 사실 그 전부터 인터뷰나 이런 자잘한 일에 자주 
    끌려가긴 했어. 운이 좀 따랐는지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하고 대학 졸업해봤자 갈 곳이 없다는 주제로 커버스토리 기사도 같이 쓰고
    했어. 그 선배가 했던 말이 \"딱 네 얘기 잖아. 써봐.\" 물론 취재원을 인터뷰한 거지. 어쨌든 원고 절반 정도를 써서 제출했는데 그게 기사화돼서 
    나온 거 보니까 눈물나더라. 
    계속 일해보라고 했는데 학원 시간이 급 변경돼서 아쉽게 그만 둘 수밖에 없었어. 참 재밌었는데. 근데, 아무리 지방지라지만 경력 2년 기자가 \'인
    턴\'하려니 쓴웃음은 나오더라.

교육 - 정보보안전문가 8개월
=> 내 머리가 이렇게까지 굳었다는 걸 알게 된 기간이었어. 공부는 엄청 재미있었는데 오늘 배운 해킹 기법 내일이면 까먹고 어휴...
    역시 젊은 애들은 못 따라가겠더라구. 
    영화에서 보이는 멋진 해커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됐어. 알고 보니 완전 노가다에 바늘만한 구멍 찾아서 뚫는 거였더라구. 환상이 좀 깨졌지.
    툴 쓰면 편하긴 하지만 그래서야 이바닥에서 말하는 \'화이트 해커\'도 아니고 살아남기 힘드니까.
    내가 인덕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과정 끝나고 나서 기업체 강사로 너 키워줄테니까 같이 열심히 해보자고 말도
    해주고, 실제로 거기 사무실도 찾아가서 대표이사분이랑 인사도 하고. 나 경력 살려준다고 전자신문이랑 zdnet에도 말해주고. 
    근데 내가 과정 끝나고 이력서만 연거푸 20번 정도 미끌어지니까 자신감이 없어지고 회의도 들고 해서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야.


이게 대강 뭐 이력이라면 이력, 스펙이라면 스펙인데 너무 장황하게 쓴 것 같네.
어쨌든 내가 갈 곳은 IT를 끼면서 글도 쓸 수 있는 곳이야. 번역도 있고. 딱 내가 원하던 일이지. 연봉도 내 기준엔 그다지 낮은 것 같지는 않고.
자세한 얘기는 못하겠어. 사실 기대는 별로 안 했는데, 공부할 때 의욕에 불타서 해외 보안문서를 몇 개 번역해놓은 걸 포트폴리오로 제출한 게 잘 먹힌 것 같아.

여기까진 내 얘기였고 그동안 취갤에 몇 개의 글을 올리고 악플 때문에 삭제하기도 하면서 느낌 점을 형, 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어.

1. 스펙에 목숨 걸지 마라. 이곳의 대부분은 육, 해, 공중전 다 뛰어본 백전노장들이 아니다. \'자신의 경험\'이라는 작은 거울에 현실의 극히 일부만을 
   비춰주는 것뿐이다. 
=> 나만 해도 영문과 3점 극초반 학점에 토익 750 밖에 안 되는데 원하는 일 하게 됐잖아. 
    전에 내 스펙을 평가한 어떤 사람은 \"나 중소기업에서 1800 받는다. 나보다 못한 토익 점수에, 학점에, 꼴에 기자했다고 재는 거냐?\"라고 말했어.
    나는 2200을 받길 바랐지. 까놓고 말해 나 그사람보다 더 받아. 난 토익 점수는 낮지만 번역은 거의 완벽하고 회화도 조금은 되거든.
    점수로 연봉을 매기는 사회 기류 탓인가 싶기도 해. 사람이 어떻게 점수로만 평가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 계량화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도 
    있는 법인데.

2. 여기에서 위안을 바라지 마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황은 더 심각하다.
=> 취갤에 고등학교만 나온 형, 동생들도 많아. 그들보다 자기가 학벌 한 단계 좋다 혹은 자격증 몇 개 더 가지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니까 가끔 평균
    이상의 사람들이 \"이 정도면 안 되겠죠? ㅠㅠ\"라는 류의 글을 싸질러 놓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러면서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는데, 그러지 마. 취갤 사람들이 바보는 아냐. 조금 간지러운 얘기로 피말리는 청춘의 고통을 하루하루 감내하는 갤러들이 그 정도도 모를까.
    그 사람들이 그런 글을 쓰면서 위안을 바라는 건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안심하고 있다간 \'막장\' 테크 타기 딱 좋아. 
    아마 느끼고 있겠지만 사회가 세분화 되면서 자잘한 직종은 많이 생기는데 지금까지 별 생각 없이 살다가 적당히 복지 좋은 곳 들어가서 적당히 
    수긍할 만한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어.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말하고 싶어.

아, 더 하고 싶은 말 많았는데 정리를 못하겠어.
읽어보니까 무슨 대기업이라도 들어간 것마냥 장황하게도 써놨네 ㅎㅎ. 
그래도 이번에 안되면 정말 지방에 내려가서 돈 적게 받더라도 \'벌이\'는 하면서 살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에 좋은 소식이 들려서 기분 좋아 그러니까
형, 동생들이 이해해줘. 취업이 코앞에 닥친 동생들, 정리해고든 자진퇴사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형들도 곧 좋은 소식 듣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