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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ㄴㅈㅈㅇ
20.
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달 형을 선고 받았던 조슈아 패러데이는 딱 일주일 째 되는 날 독방에서 풀려났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예배당 아래 있는 가짜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시각, 패러데이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 날이었다. 이 곳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던 그 날. 패러데이를 찾아온 것은 간수도 의사도 아닌 늙은 신부였다. "여긴 웬일이에요."
잭 혼이 열어준 문 뒤에는 늘 보이던 보초를 서는 교도관들조차 없었다. "병 주고 약주시겠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 것이니. 돌아온 기념으로 특별히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주지." 잭 혼은 작게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천천히 독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래 전, 주께서 불과 유황으로 태워버린 더러운 도시라네."
잭 혼은 패러데이를 일으키고 그의 팔을 묶어놓은 구속복을 천천히 벗겨내었다. 일주일 동안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팔이 저리도록 따끔거렸다. "자비로운 주께선 그 전날 밤 천사 한 명을 보내 명하셨지. 만약에 열 명의 의인을 찾는다면 파괴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쓸 만 한 놈이 몇 명이나 되던가요?"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딸 둘." "망할 만 하네."
"신기한 건 롯의 가족은 저마다 인종이 달랐다는 거야. 아내는 동양인인데 딸은 멕시칸과 인디언이었거든." 잭 혼은 패러데이를 향해 옷을 던졌다. 매일 입던 회색 죄수복이 아니었다. 그의 옷,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늘 입었던 셔츠와 조끼, 허리띠와 모자. 패러데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아 쥐었다. 옷가지 속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물체가 손끝에 닿았다. "앞만 보고 가야 해. 뒤를 돌아보면 소금 기둥이 될 거야. 감당할 자신 있는가?"
옷 속에는 압수되었던 그의 총 두 자루와 엠마가 구했다던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었다. 패러데이는 단추를 채우던 손길마저 멈추고 홀린 듯이 총을 손에 쥐어 들었다. "빌리는 어디에 있죠?" "예배실 뒤 편, 헌혈실에 가이드 세 명이 있어. 특히 그 인디언 꼬마 말이야. 여기 더 두면 죽어. 부디 데리고 가주게."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패러데이는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잭 혼의 이마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신부는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뿐. 다시 마주친 그의 세계는 전처럼 표백된 하얀 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래 전에 검게 타올라 굳어버린 그을린 잿빛. 재의 세상.
21.
잭 혼은 로즈 크릭의 가짜 성직자였다. 싸구려 기도로 알량한 평화라도 얻을 수 있는지 다른 교도관들을 싫어하는 죄수들조차 세례 한 번 받은 적 없는 돌팔이 성직자를 잘 따랐다. 잭 혼은 나름대로 존경 받는 신부였다. 그런 그가 보그의 약물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시시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죄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쁜 축에 속했다. 젊었을 때는 인디언의 머릿가죽을 팔아 돈을 벌었고 늙어서는 수감자들의 속마음을 팔아 권력을 얻었다. 비밀이 주는 힘은 강력했다.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보그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 되었으며 곧 로즈 크릭의 숨은 2인자가 되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추악한 진실도, 뱀의 혀 같은 거짓말도. 그런 그가 로즈 크릭에서 차마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나로 꽉 틀어 맨 붉은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아니 늠름한 여인. 오래전에 죽은 그의 딸을 닮은 간호사 엠마였다. 그녀는 말 수가 적었다. 남들처럼 고해 성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고 나약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세계는 한 없이 차가웠다. 마치 한 겨울처럼. 그 냉기를 느낄 때 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아팠다. 그래서일까 잭 혼은 차마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지병이었다. 리바운드 때문에 생긴 심장병.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마다 그를 괴롭히는 오랜 친구. 심장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뻐근하게 아려올 때 마다 잭 혼은 늘 품에 넣고 다니던 주사기를 꺼내 안정을 찾곤 했다. 그건 보그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안정제였다. 일반 센티넬에게 주어지는 그저 그런 알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축되어있는 붉은 액체는 혈관에 퍼지자마자 통증을 마취시켜 주었다. 마치 마약 같았다. 모르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끊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마약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정제로도 없애지 못한 한 가지 병이 남아 있었다. 악몽. 언제부터였을까. 딸이 죽고 난 뒤 부터였나. 그를 괴롭히는 끔찍한 꿈만은 주사로도 막을 수 없었다. 물리계나 겪는 악몽에 왜 잭 혼 같은 사람이 시달리는지는 의사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리바운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트라우마에 가까워 보인다고 도움도 안 되는 조언을 지껄였을 뿐이다.
꿈속에서 잭 혼은 늘 인디언의 무덤에 누워 있었다. 묘비 하나 없이 썩어가는 시체 위에서 그에게 독화살을 겨누는 건 사슴피로 얼굴을 칠한 어린 인디언이었다. 화살은 늘 그의 심장에 꽂히지 않았다. 그걸 맞은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한 때 모든 걸 바칠 만큼 사랑했던 예쁜 녹색 눈의 소녀, 그의 딸. 잭 혼은 항상 그녀의 하얀 뺨 위로 떨어지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소용도 없을 안정제를 찾았다.
그 약이 누구의 피로 만든 것인지 잭 혼은 잘 알고 있었다. 로즈 크릭에서 쓸 만한 피를 가진 사내는 네 명 밖에 없었으니까. 잭 혼은 그 한 명 한 명의 얼굴도 떠올릴 수 있었다. 컬린, 락스, 바스퀘즈 그리고 가장 어린 붉은 이삭. 어린 인디언, 잭 혼은 단 한 순간도 처음 들어오던 날의 붉은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앳된 검은 눈동자, 차가운 물에 씻겨 내려가는 붉은 사슴 피, 영어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꾹 다문 입술. 그때 그는 금방이라도 심장을 쏘아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잭 혼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악몽 속의 소년처럼.
세상은 그들을 가이드라고 불렀고 보그는 그들을 필요악이라고 불렀다. 시스템을 위한 산 제물.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필요한 사람. 잭 혼은 그들의 무기력한 눈동자를 동정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피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추악한 위선자이자 남의 피로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는 더러운 뱀파이어였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매튜 컬린이 죽던 날이었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장례식이라고 해 봐야 좁은 예배실에 관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끝이지만. 잭 혼은 시체를 관 안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불길에 그을려 엉망이 된 옷을 벗기고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하얀 셔츠를 입혔다. 그 위에는 조끼, 바지, 구두까지 신겨 놓고 나니 그가 이 곳에 갇혀 있던 죄수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잭 혼은 매튜가 늘 감고 다니던 왼쪽 귀의 붕대를 풀었다. 그곳에 각인이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새까만 재로 너덜너덜해 진 붕대는 손을 대자마자 바스러지듯 풀렸다. 처음으로 마주보는 귓등에는 예상대로 시뻘건 글씨로 적힌 누군가의 이름이 보였다. '엠마 컬린' 한 없이 익숙한 그 이름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그는 통제광이었다. 로즈 크릭 안에서 그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만의 하나 예외가 발생하면 그 즉시 징벌이었다. 둘 중 하나였다. 미칠 때 까지 독방에 가두어 버리거나 총을 쏘거나. 그저그런 센티넬들도 아니고 보그는 웬만해서 자산이나 다름없는 가이드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매튜는 죽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살해당했다.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잭 혼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본보기였다. 멋대로 그에게 반기를 들고 가석방을 시도한 앙큼한 가이드의 최후를 전리품처럼 전시하기 위함이었다.
보그가 아직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다면 그런 매튜 뒤에 엠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간다면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뭐 괴롭힐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가 무거운 예배실 손잡이를 열기 전에, 잭 혼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귀를 잘라 손수건에 감추었다. 왼쪽 얼굴이 상당히 그을린 덕에 얼핏 보면 칼로 자른 것이 아니라 불길에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보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미 죽은 매튜보다도 교도소 안을 돌아다니는 다른 벌레에게 관심이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벌레를 잡아내는 것은 잭 혼이 해야 할 일이었다. 로즈 크릭에서 그가 모르는 비밀은 없으니까. 보그는 잭 혼을 미끼로 그럴싸한 함정을 팠다. 잘 빚어놓은 미끼를 문 것은 엠마가 아닌 조슈아 패러데이였다. 보그를 숨겨 놓은 예배실의 문을 패러데이가 열었을 때 잭 혼은 우습게도 홀로 작게 안도했다. 잡힌 벌레는 늘 그렇듯 엄벌에 처했다. 독방, 마취제가 섞인 가이드 호르몬 주사, 끊임없는 비명소리. 보그는 꽤 만족한 눈치였다. 그런데 잭 혼은 조금 달랐다. 이상하게 늘 듣던 비명소리가 싫었다. 그 놈의 초록색 눈동자가 문제였다. 짧은 시간 읽었던 패러데이의 세계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로즈 크릭을 어지럽히던 조각들이 그의 세계로 인해 신기하게 하나로 딱 맞아 떨어졌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잭 혼은 패러데이를 가둔 날 밤에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인디언에게 잡아먹힐 같았다. 그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그가 누구보다 빨리 찾아간 곳은 엠마의 숙직실이었다. 노크는 세 번 만에 열렸다. 초췌한 얼굴의 엠마에게 잭 혼이 해 줄 수 있었던 건, 말라버린 남편의 귀를 돌려주는 것 밖에 없었다.
22.
빌리 락스는 새벽부터 헌혈실로 불려갔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새로 바뀐 룸메이트들은 그에게 썩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 패러데이를 일찍 풀어주는 대가는 조금 가혹했다. 보그는 감옥에서 가장 난폭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센티넬 두 놈이 들어있는 굴에 빌리를 가두었다. 성질이 더럽기로 소문난 그 놈들이 동양인에게 상냥할 리 없었다. 시작은 평범하게 폭행이었다. 도망갈 공간도 없는 좁은 감방에서 센티넬 두 명을 제압하기에 빌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묵묵히 발길질이 멈추길 기다릴 뿐. 폭력이 강간으로 이어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그가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라곤 장갑 너머, 이미 지워진 옛 연인들의 흔적뿐이었다.
빌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간호사의 뒤를 따라 좁은 헌혈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두 명의 사내가 먼저 앉아 있었다. 모든 재소자가 거쳐 가는 채혈실과 달리 헌혈실에서 보이는 건 늘 똑같은 얼굴뿐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 곳에 진짜 센티넬 따위는 끌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빌리는 평소처럼 팔을 걷었다. 너덜너덜한 주사자국이 남아있는 팔이 보였다. 바스퀘즈와 붉은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 아직 오지 않은 사내가 있었다. 세 남자는 비어있는 빈자리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올 수 없을 가이드, 매튜 컬린. 빌리는 그의 파란 눈을 떠올리며 애도를 하듯이 눈을 감았다. 달각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선택권을 줄게요."
들려오는 엠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팔에 바늘을 꽂지 않았다. 대신에 달그락 소리가 나는 가방 하나를 펼쳐들었다. "난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거예요.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얼핏 보기에는 하얀 의료용 가방처럼 보이는 그 안에는 조금 이질적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녀를 향해 먼저 질문을 던진 쪽은 바스퀘즈였다. "뭘 얻을 수 있는데?" "자유" 그 단어에 붉은 이삭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은 리볼버 네 자루였다. "그리고 복수"
그녀는 천천히 총알을 장전하며 그중 가장 큰 총을 하나 손에 쥐었다. "남고 싶다면 당장 방으로 돌아가도 좋아요." 그녀는 그대로 세 자루의 총이 남아있는 가방을 그들 앞으로 돌렸다. 아무도 쉽게 총을 향해 손을 뻗지 못했다. 그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볼 뿐. 바스퀘즈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복수? 누구에게." "당신들을 이곳으로 떨어뜨린 사람." 차갑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굳이 그 이름을 말해야 하나요?" 바솔로뮤 보그.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은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센티넬 감옥을 만들고, 가이드를 끌어들여 지옥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 넣은 남자. "내가 그 녀석의 부하를 어떻게 믿지?" 빌리의 물음에 엠마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비어있는 자리를 향해 있었다. "컬린이예요. 내 진짜 이름. 엠마 컬린." 엠마는 한쪽 손으로 총을 든 채 잠금이 걸려있는 문고리를 살짝 풀었다. "교도관에게 말한대도 말리지 않겠어요. 빌리, 문은 열려있어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먼저 입을 여는 자도 발을 떼는 사람도 없었다. 그 짧은 틈을 깬 것은 의외의 남자였다. "난 하겠어" 가장 먼저 총을 집어 든 사람은 붉은 이삭이었다. "뭐야 너 영어 할 줄 알았어?" 그가 영어를 썼다는 것에 놀란 것 같은 바스퀘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더 없나요?" 엠마의 눈짓에 바스퀘즈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른 조건은?" "다시는 로즈 크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괜찮네." 그가 마저 옆에 있던 총을 쥐었다. 상자에는 어느덧 한 자루만이 남아있었다. "빌리?" 엠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빌리를 바라보았다.
"…도망이라면 이제 신물이 나." 빌리는 그 총을 집는 대신에 두터운 문을 열었다. 삐걱대는 나무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빌리는 빠르게 문을 닫고 한적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빌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그가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들이 보였다. 허리춤에 총을 찬 채 돌아다니는 교도관, 어디론가 걸어가는 의사와 그 뒤를 따라가는 낯선 죄수들. 분명히 늘 보던 그 광경이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언제서 부턴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복도를 채우는 것은 오직 본인의 것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빌리 락스는 그제야 복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소름이 쫙 끼친 그의 귓가에 넌지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그 발걸음에 빌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금발의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다. "너였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만큼 젊고, 무모하고 바보 같은 정신계 센티넬은 로즈 크릭에 한 사람 밖에 없으니까.
조슈아 패러데이는 한 걸음에 빌리를 향해 달려왔다. 빌리는 그의 넓은 어깨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는 늘 풍기던 시가 향이 아닌 피 냄새가 났다. "보고 싶었어." 단숨에 그를 끌어안은 패러데이가 중얼거렸다. 키 차이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빌리의 이마에 닿았다. 다시는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키스는 여전히 서툴었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와의 재회에서 가장 먼저 빌리를 덮친 감정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너 이러다 죽어." 빌리는 먹먹한 눈동자로 패러데이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녹갈색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젠간 죽잖아."
저 눈으로 지금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수 십 명? 아니 족히 수 백 명은 될지도 몰랐다. 그 리바운드가 얼마나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지켜줘 빌리." 패러데이가 커다란 손으로 빌리를 꼭 껴안았다. "…그만 해. 그만하자. 나 못해! 너 치료 못 한다고. 죽을 거야…. 조슈아, 네가…!" 빌리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검은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패러데이는 그 눈가를 따스한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저건 나 아니야."
패러데이는 눈물 몇 방울을 털어버리고 닫혀 있는 예배실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실 안에는 십자가에 몸이 박힌 나무 예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싸구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럼?" "설교가 더럽게 지루한 영감님." 패러데이는 그렇게 속삭이며 빌리의 귓가에 살짝 키스를 했다. 마른 입술이 떨어지고 순식간에 소리가 멀어졌다. "불 좀 빌릴게." 그제야 빌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라이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항상 무언가를 터뜨리고 싶었거든." 햇빛이 든다는 것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쇠창살조차 없는 유일한 공간. 패러데이는 불이 붙은 폭탄을 창가로 집어 던지면서 어쩌면 이 곳은 처음부터 이를 위해 지어진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예배실의 문을 닫은 것은 빌리였다. 굳게 닫힌 문 너머 귓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한 순간 폭발했다.
23.
"바깥 상황은?" 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자 복도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양 손에 총을 들고 있는 엠마였다.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데." "함정일 수도 있어요. 좀 더 살펴봐요."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붉은 이삭과 바스퀘즈는 한쪽 손에 총을 쥔 채로 복도를 가득 채운 검은 연기를 들이 마시며 콜록거렸다. 패러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엠마를 향해 투덜대듯 대답했다. "내 능력이 투시력은 아니란 말이야. 기다려. 누가 오고 있어. 센티넬 두 명, 아니 한 명인가. 좀 이상한데…."
엠마는 패러데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예배실의 문을 열었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방 안에는 부서진 창문 너머로 따사로운 볕이 들이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고비였다. 창문 밖의 세계에는 보초병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잭 혼이 최대한 붙잡는다고 해 봤자 안에 있는 놈들이 한계였다. 눈이 시린 햇빛에 엠마는 눈을 찌푸린 채로 밖을 향해 조심스럽게 총을 거두었다. "창밖으로 가! 당장!" 굳은 표정의 그가 내뱉은 것은 조금 뜻밖의 외침이었다.
엠마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붉은 이삭의 손을 붙잡고 창문 밖으로 뛰어갔다. 바스퀘즈도 곧 그들을 뒤따라 창가를 넘어갔다. "빌리, 빨리!" 저 끝에서 그를 부르는 엠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빌리는 그녀에게 가기 전에 다른 이들과 달리 한 발자국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패러데이를 바라보았다. 열려있는 문 너머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한 두 사람의 기척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가 빌리를 덮쳤다. "이리와, 조슈아." 빌리는 도망가는 대신 패러데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이 닿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결국 빌리가 다가가 이끄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기는 빌리를 향해 패러데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했어." "뭐?" "잭 혼이 죽었어."
낯선 인기척에 창밖으로 몸을 숨긴 엠마가 먼저 문을 향해 총을 날렸다. 빌리는 본능적으로 패러데이의 어깨를 붙잡고 교회 의자 아래로 몸을 숙였다. 총알은 그대로 날아가 예배실로 들어오려던 교도관의 머리에 박혔다.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기점으로 총격적인 시작되었다. 몰려온 교도관은 족히 수 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나간 사람은 세 명, 남아있는 사람은 두 명. 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교도관과 바깥의 용병들을 생각하면 족히 백 명. 다섯 명이서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전원 센티넬인 저쪽과 다르게 이쪽의 센티넬은 단 두 명. 심지어 빌리에게는 총 조차 없었다. "빌리" 패러데이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분명 무모한 생각이었다. 판돈은 목숨, 인생 최대의 도박이었다. "눈 감아" 패러데이는 그 말과 함께 빌리의 귀를 양 손으로 가렸다. "조슈아, 안 돼!"
끼이이이이익! 고막을 찌르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모두의 귀를 마비시킬 것처럼 울렸다. 엄청난 충격에 잠시 총격이 멈추었다. 그 중심에는 녹색 눈을 빛내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폭주였다. 정신계 센티넬 조슈아 패러데이의 폭주.
정신계는 물리계와 달리 좀처럼 폭주를 하지 않는 종족이었다. 패러데이 역시 그런 폭주를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스스로도 폭주를 해 보았던 건 딱 한 번, 아버지가 탄광에 갇힌 채 돌아가셨을 때뿐이었다. 컨트롤 같은 개념도 전혀 없이 시작 된 폭주의 결과는 처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기억나는 것은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와 경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 그렇게 패러데이는 강제로 고향을 떠났다. 추방되었다고 하는 쪽이 맞았다. 그 때부터 패러데이는 다시는 폭주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그런 낌새가 있는 날에는 차라리 술에 취했다. 너무 두려웠다. 자신을 잃는 것 같은 기분, 세상에 둘 도 없는 괴물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 패러데이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소리가 멈추고 그는 빌리의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빌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 눈꺼풀 위에 짧게 키스를 하고 패러데이는 의자 밑에서 나와 문가로 향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반 정도 귀를 막고 쓰러져 있었고 멀리서 달려오는 놈들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패러데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장 앞장서 오던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이던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패러데이의 손짓 한 방에 몸을 뒤로 틀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말았다.
비상사태,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려 귀를 간질였다. 반대 쪽 복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막 폭주를 시작한 센티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창문 뒤로 넘어간 세 사람이 무너진 벽 너머로 열심히 사격을 시도 했지만 엄청난 에너지에 총알 따위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가장 앞서오던 남자가 패러데이를 향해 불타오르듯 이글거리는 주먹을 날렸다. 힘으로만 따지면 비교도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의 팔이 패러데이의 얼굴을 강타했을 때,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싸움 레슨 다시 받아야겠네." 패러데이는 그대로 허깨비와 싸우던 그의 급소를 발로 내리쳤다. 본인의 에너지 때문에 반동이 생긴 나머지 달려오는 동료들의 얼굴로 고꾸라진 그는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약한 불길이 복도를 휩쓸었다.
녹색 눈은 역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놈들마다 그 병에 옮고 말았다. 불길을 뚫고 달려오는 놈은 죄다 그랬다. 제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까맣게 타 버린 손가락으로 간신히 발목을 붙잡아 봤자 큰 타격도 없었다. 잠깐 불편해 질 뿐. 패러데이는 그의 발을 붙잡고서 죽어가는 한 센티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녀석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엄청난 굉음을 내려주면서 그는 허리를 숙였다. 패러데이가 까만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낼 때였다.
"조슈아!" 목덜미에 느껴지는 찌릿한 주삿바늘보다 먼저 그에게 다가온 것은 빌리의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너 같은 놈들은 미리 다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귓가에 속삭이듯 울리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온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약은 마취제가 아니었다. 독방에서 매일같이 맞았던 호르몬 안정제였다. 가이드의 피를 농축해 만든 그 약. 패러데이는 그대로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발밑에 깔린 다 타버린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에서 보자 개새끼야."
그 말과 동시에 독침 같은 불길이 패러데이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어지러운 정신으로 불길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것은 패러데이의 오른쪽 눈에 스치듯 닿고 말았다. 안구를 태워버릴 듯 한 감각에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으아아아아악!" 패러데이는 떨리는 손으로 아픈 눈을 움켜쥐고 괴성을 내질렀다. 의사는 품에서 칼을 꺼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뱃가죽을 찔렀다. 한번, 두 번, 세 번째 난도질이 시작될 때 쯤, 작은 바람과 함께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패러데이는 무의식중으로 바람이 불어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타오르는 시야 너머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의사는 심장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박힌 채 죽어 있었다. 총도 칼도 없는 그가 집어 던진 것은 긴 머리에 늘 꼽고 다니던 비녀였다. "이제 나도 몰라." 빌리의 거친 손이 패러데이의 뺨에 닿았다. 그 손이 닿자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가 외상까지 낫게 해 준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 뿐이겠지. 알고 있었다. 착각이라는 것은. "책임져 조슈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한쪽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데도. 빌리는 그대로 그의 뺨을 만졌던 왼손을 떼어 늘 끼고 다니던 가죽 장갑을 벗었다. 센티넬들의 시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 사이에 그것을 던져버리고 빌리는 자신의 손을 뻗어 패러데이에게 보여주었다. 시뻘건 화상으로 얼룩진 그의 손등에는 아직 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J, 폐허가 된 그의 손등에 아직도 피로 수를 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문자가 패러데이의 남은 눈에 박혀 조각조각 잊히지 않을 잔상이 되었다. J, Jack, Josh, Joshua…. 조슈아 패러데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었던 한 글자의 이름. 패러데이는 웃었다. 눈을 찌르는 아픔도, 허리에서 흐르는 피도, 머리를 갈라놓을 것 같은 두통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마든지." 미소를 짓고 있는 패러데이의 입술 위로 따뜻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빌리는 한쪽 어깨로 그를 부축한 채 창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저 멀리서 남은 교도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싸울 정신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빌리의 체온을 느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른 사람이 내 아내에게 손대는 건 질색이지만. 넌 내 가이드니까." 패러데이는 빌리를 향해 총의 손잡이를 건네며 말했다. "인사해. 내 에텔이야." "…이럴 줄 알았어." 빌리가 그것을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총에 대고 키스를 했으니 그렇게 못하지." "그런 건 안했거든?" "퍽이나."
역시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를 이끌고 짧은 시간 동안 창문을 넘어가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빌리는 산산조각 난 십자가상 앞에서 멈춰 에텔을 손에 쥐었다. 패러데이 역시 그를 따라 문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총알을 먼저 발사한 것은 빌리 쪽이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센티넬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끝이 없을 것 같은 센티넬 군단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리볼버에 장전된 총알은 여섯 개. 빌리는 침착하게 총을 조준하고 한 발 한 발을 날렸다. 순식간에 네 발의 총알이 날아가고 어느덧 남은 것은 단 두발. 다친 눈 때문인지 헛발만 연속해서 날리던 패러데이는 어느새 재장전을 하고 있었다.
상대편에서 날아온 총알이 패러데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십자가에 박혔다. 잊고 있던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패러데이가 아픈 입맛을 다셨다. 빌리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신음을 흘리는 패러데이의 한쪽 손을 굳게 붙잡았다. "…역시 난 네가 싫어." "너무 잘생겨서?" 패러데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눈물처럼 볼을 타고 흘렀다. 피범벅이 된 허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다쳤고 싸움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어딜 봐도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적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잡고 있는 손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기대하게 만드니까."
그의 옆에 있다 보면 가끔씩 현실감이 사라지곤 했다. 왜일까.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살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저 깨진 창문을 넘어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지만 이번이라면, 그와 함께라면 긴 도망의 종지부를 새로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빌리는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꿈이라는 것을. 조슈아 패러데이가 주는 달콤한 꿈. "칭찬이지?"
빌리는 빠른 손길로 재장전을 했다. 숨이 찼다. 몸을 숙였지만 날아오는 총알들이 하나 둘 씩 옷깃에 스치고 있었다. 패러데이의 힘겨운 숨결이 느껴졌다. 헐떡이듯 내쉬는 그 숨소리는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죽는다. 죽어간다. 부질없던 꿈이 산산조각처럼 깨지고 만다.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던 조슈아마저 곧 그를 떠날 것이다. 저 황야 속으로 사라졌던 굿나잇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용서 안할 거야." 그를 위해 빌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의 이름이 남아있는 손가락으로 힘이 빠져가는 커다란 손을 꽉 쥐고 있는 수밖에. "네가 한 마디만 해 주면 싹 나을 것 같은데." "뭐"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원한다고." 사랑. 생각해보면 조슈아 패러데이는 예전부터 그런 단어에 집착했다. 사랑해, 좋아해. 그런 낯간지러운 말들. 빌리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굿나잇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단어를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럽거나 싫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어려웠다. 그건 너무 낯설고 무거운 말이었다. 백인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중에 가장 어려운 말. "…역시 어렵나." 꺼져가는 패러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눈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피가 빌리의 허벅지 위 까지 떨어졌다. 뚝, 뚝. 빌리는 쓴 입맛을 다시며 그 질척한 액체를 바라보았다.
후회할까. 어느 쪽을 후회하게 될까. 말을 하는 쪽? 아니면 하지 않는 쪽? 빌리가 입술을 열기 전에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창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었다. 탕, 빌리는 잽싸게 총구를 돌려 뿌연 모래먼지 너머를 쏘았다. 죽는구나. 빌리는 그쪽에서 불어오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흩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여전히 그의 손은 패러데이와 닿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끝나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빌리는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리볼버에 남아있던 마지막 탄환이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총알은 그림자를 맞추지 못했다.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을 뿐이었다. 아마 총이나 방패 같은 것에라도 맞은 모양이었다. 빌리는 눈을 감았다. 잡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패러데이의 맥박만이 그를 감쌌다.
"Bonjour, ma petite" 그 너머에서 그리운 프랑스 말씨가 들렸을 때 빌리는 차마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모래 바람이 멈추었다. 익숙한 담배 향이 퍼졌다. 아주 쓰고 텁텁한 몽롱한 아편 냄새. "나를 위해 이렇게 근사한 환영식도 준비해주고. 기뻐"
빌리는 까만 눈동자를 뜨고 태양이 쏟아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른 입술에서는 차마 어떤 말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파란 눈동자, 희끗한 머리카락, 늘 입었던 회색 죄수복이 아닌 꽤 멋있는 양복을 갖춰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굿나잇 로비쇼가 웃고 있었다. "아이리쉬, 파티가 생각보다 일찍 열렸던데?" "누구 씨가 멋대로 도망치는 바람에 달리 방법이 있어야지." 육중한 쇳소리가 들렸다. 굿나잇은 라이플을 들고 있지 않았다. "…닥치고 엎드려" 그가 끌고 온 것은 커다란 개틀링 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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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빌패 셋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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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ㅅㅊㅈㅇ ㄴㅈㅈㅇ
20.
빌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달 형을 선고 받았던 조슈아 패러데이는 딱 일주일 째 되는 날 독방에서 풀려났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예배당 아래 있는 가짜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시각, 패러데이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 날이었다. 이 곳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던 그 날. 패러데이를 찾아온 것은 간수도 의사도 아닌 늙은 신부였다. "여긴 웬일이에요."
잭 혼이 열어준 문 뒤에는 늘 보이던 보초를 서는 교도관들조차 없었다. "병 주고 약주시겠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 것이니. 돌아온 기념으로 특별히 재미있는 얘기 하나 들려주지." 잭 혼은 작게 손으로 성호를 그리며 천천히 독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주 오래 전, 주께서 불과 유황으로 태워버린 더러운 도시라네."
잭 혼은 패러데이를 일으키고 그의 팔을 묶어놓은 구속복을 천천히 벗겨내었다. 일주일 동안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았던 팔이 저리도록 따끔거렸다. "자비로운 주께선 그 전날 밤 천사 한 명을 보내 명하셨지. 만약에 열 명의 의인을 찾는다면 파괴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쓸 만 한 놈이 몇 명이나 되던가요?"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딸 둘." "망할 만 하네."
"신기한 건 롯의 가족은 저마다 인종이 달랐다는 거야. 아내는 동양인인데 딸은 멕시칸과 인디언이었거든." 잭 혼은 패러데이를 향해 옷을 던졌다. 매일 입던 회색 죄수복이 아니었다. 그의 옷,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늘 입었던 셔츠와 조끼, 허리띠와 모자. 패러데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아 쥐었다. 옷가지 속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물체가 손끝에 닿았다. "앞만 보고 가야 해. 뒤를 돌아보면 소금 기둥이 될 거야. 감당할 자신 있는가?"
옷 속에는 압수되었던 그의 총 두 자루와 엠마가 구했다던 다이너마이트가 들어있었다. 패러데이는 단추를 채우던 손길마저 멈추고 홀린 듯이 총을 손에 쥐어 들었다. "빌리는 어디에 있죠?" "예배실 뒤 편, 헌혈실에 가이드 세 명이 있어. 특히 그 인디언 꼬마 말이야. 여기 더 두면 죽어. 부디 데리고 가주게."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어요?" 패러데이는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잭 혼의 이마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신부는 당황하지 않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을 뿐. 다시 마주친 그의 세계는 전처럼 표백된 하얀 색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래 전에 검게 타올라 굳어버린 그을린 잿빛. 재의 세상.
21.
잭 혼은 로즈 크릭의 가짜 성직자였다. 싸구려 기도로 알량한 평화라도 얻을 수 있는지 다른 교도관들을 싫어하는 죄수들조차 세례 한 번 받은 적 없는 돌팔이 성직자를 잘 따랐다. 잭 혼은 나름대로 존경 받는 신부였다. 그런 그가 보그의 약물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시시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죄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쁜 축에 속했다. 젊었을 때는 인디언의 머릿가죽을 팔아 돈을 벌었고 늙어서는 수감자들의 속마음을 팔아 권력을 얻었다. 비밀이 주는 힘은 강력했다.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보그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이 되었으며 곧 로즈 크릭의 숨은 2인자가 되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추악한 진실도, 뱀의 혀 같은 거짓말도. 그런 그가 로즈 크릭에서 차마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나로 꽉 틀어 맨 붉은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 아니 늠름한 여인. 오래전에 죽은 그의 딸을 닮은 간호사 엠마였다. 그녀는 말 수가 적었다. 남들처럼 고해 성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고 나약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세계는 한 없이 차가웠다. 마치 한 겨울처럼. 그 냉기를 느낄 때 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아팠다. 그래서일까 잭 혼은 차마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지병이었다. 리바운드 때문에 생긴 심장병. 컨디션이 안 좋을 때 마다 그를 괴롭히는 오랜 친구. 심장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뻐근하게 아려올 때 마다 잭 혼은 늘 품에 넣고 다니던 주사기를 꺼내 안정을 찾곤 했다. 그건 보그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안정제였다. 일반 센티넬에게 주어지는 그저 그런 알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농축되어있는 붉은 액체는 혈관에 퍼지자마자 통증을 마취시켜 주었다. 마치 마약 같았다. 모르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끊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마약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정제로도 없애지 못한 한 가지 병이 남아 있었다. 악몽. 언제부터였을까. 딸이 죽고 난 뒤 부터였나. 그를 괴롭히는 끔찍한 꿈만은 주사로도 막을 수 없었다. 물리계나 겪는 악몽에 왜 잭 혼 같은 사람이 시달리는지는 의사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리바운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트라우마에 가까워 보인다고 도움도 안 되는 조언을 지껄였을 뿐이다.
꿈속에서 잭 혼은 늘 인디언의 무덤에 누워 있었다. 묘비 하나 없이 썩어가는 시체 위에서 그에게 독화살을 겨누는 건 사슴피로 얼굴을 칠한 어린 인디언이었다. 화살은 늘 그의 심장에 꽂히지 않았다. 그걸 맞은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한 때 모든 걸 바칠 만큼 사랑했던 예쁜 녹색 눈의 소녀, 그의 딸. 잭 혼은 항상 그녀의 하얀 뺨 위로 떨어지는 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소용도 없을 안정제를 찾았다.
그 약이 누구의 피로 만든 것인지 잭 혼은 잘 알고 있었다. 로즈 크릭에서 쓸 만한 피를 가진 사내는 네 명 밖에 없었으니까. 잭 혼은 그 한 명 한 명의 얼굴도 떠올릴 수 있었다. 컬린, 락스, 바스퀘즈 그리고 가장 어린 붉은 이삭. 어린 인디언, 잭 혼은 단 한 순간도 처음 들어오던 날의 붉은 얼굴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앳된 검은 눈동자, 차가운 물에 씻겨 내려가는 붉은 사슴 피, 영어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꾹 다문 입술. 그때 그는 금방이라도 심장을 쏘아 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잭 혼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악몽 속의 소년처럼.
세상은 그들을 가이드라고 불렀고 보그는 그들을 필요악이라고 불렀다. 시스템을 위한 산 제물.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장 필요한 사람. 잭 혼은 그들의 무기력한 눈동자를 동정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피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추악한 위선자이자 남의 피로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는 더러운 뱀파이어였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매튜 컬린이 죽던 날이었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장례식이라고 해 봐야 좁은 예배실에 관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끝이지만. 잭 혼은 시체를 관 안에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다듬었다. 불길에 그을려 엉망이 된 옷을 벗기고 처음 들어올 때 입었던 하얀 셔츠를 입혔다. 그 위에는 조끼, 바지, 구두까지 신겨 놓고 나니 그가 이 곳에 갇혀 있던 죄수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잭 혼은 매튜가 늘 감고 다니던 왼쪽 귀의 붕대를 풀었다. 그곳에 각인이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새까만 재로 너덜너덜해 진 붕대는 손을 대자마자 바스러지듯 풀렸다. 처음으로 마주보는 귓등에는 예상대로 시뻘건 글씨로 적힌 누군가의 이름이 보였다. '엠마 컬린' 한 없이 익숙한 그 이름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그는 통제광이었다. 로즈 크릭 안에서 그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만의 하나 예외가 발생하면 그 즉시 징벌이었다. 둘 중 하나였다. 미칠 때 까지 독방에 가두어 버리거나 총을 쏘거나. 그저그런 센티넬들도 아니고 보그는 웬만해서 자산이나 다름없는 가이드를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매튜는 죽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살해당했다.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잭 혼뿐이었다. 그건 일종의 본보기였다. 멋대로 그에게 반기를 들고 가석방을 시도한 앙큼한 가이드의 최후를 전리품처럼 전시하기 위함이었다.
보그가 아직 한 가지 모르는 게 있다면 그런 매튜 뒤에 엠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간다면 벌어질 일은 안 봐도 뻔했다. 죽이거나 고문하거나. 뭐 괴롭힐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가 무거운 예배실 손잡이를 열기 전에, 잭 혼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귀를 잘라 손수건에 감추었다. 왼쪽 얼굴이 상당히 그을린 덕에 얼핏 보면 칼로 자른 것이 아니라 불길에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보그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이미 죽은 매튜보다도 교도소 안을 돌아다니는 다른 벌레에게 관심이 쏠려 있는 모양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벌레를 잡아내는 것은 잭 혼이 해야 할 일이었다. 로즈 크릭에서 그가 모르는 비밀은 없으니까. 보그는 잭 혼을 미끼로 그럴싸한 함정을 팠다. 잘 빚어놓은 미끼를 문 것은 엠마가 아닌 조슈아 패러데이였다. 보그를 숨겨 놓은 예배실의 문을 패러데이가 열었을 때 잭 혼은 우습게도 홀로 작게 안도했다. 잡힌 벌레는 늘 그렇듯 엄벌에 처했다. 독방, 마취제가 섞인 가이드 호르몬 주사, 끊임없는 비명소리. 보그는 꽤 만족한 눈치였다. 그런데 잭 혼은 조금 달랐다. 이상하게 늘 듣던 비명소리가 싫었다. 그 놈의 초록색 눈동자가 문제였다. 짧은 시간 읽었던 패러데이의 세계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로즈 크릭을 어지럽히던 조각들이 그의 세계로 인해 신기하게 하나로 딱 맞아 떨어졌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잭 혼은 패러데이를 가둔 날 밤에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인디언에게 잡아먹힐 같았다. 그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그가 누구보다 빨리 찾아간 곳은 엠마의 숙직실이었다. 노크는 세 번 만에 열렸다. 초췌한 얼굴의 엠마에게 잭 혼이 해 줄 수 있었던 건, 말라버린 남편의 귀를 돌려주는 것 밖에 없었다.
22.
빌리 락스는 새벽부터 헌혈실로 불려갔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새로 바뀐 룸메이트들은 그에게 썩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 패러데이를 일찍 풀어주는 대가는 조금 가혹했다. 보그는 감옥에서 가장 난폭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센티넬 두 놈이 들어있는 굴에 빌리를 가두었다. 성질이 더럽기로 소문난 그 놈들이 동양인에게 상냥할 리 없었다. 시작은 평범하게 폭행이었다. 도망갈 공간도 없는 좁은 감방에서 센티넬 두 명을 제압하기에 빌리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묵묵히 발길질이 멈추길 기다릴 뿐. 폭력이 강간으로 이어지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그가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라곤 장갑 너머, 이미 지워진 옛 연인들의 흔적뿐이었다.
빌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간호사의 뒤를 따라 좁은 헌혈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두 명의 사내가 먼저 앉아 있었다. 모든 재소자가 거쳐 가는 채혈실과 달리 헌혈실에서 보이는 건 늘 똑같은 얼굴뿐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 곳에 진짜 센티넬 따위는 끌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빌리는 평소처럼 팔을 걷었다. 너덜너덜한 주사자국이 남아있는 팔이 보였다. 바스퀘즈와 붉은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 아직 오지 않은 사내가 있었다. 세 남자는 비어있는 빈자리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올 수 없을 가이드, 매튜 컬린. 빌리는 그의 파란 눈을 떠올리며 애도를 하듯이 눈을 감았다. 달각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선택권을 줄게요."
들려오는 엠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팔에 바늘을 꽂지 않았다. 대신에 달그락 소리가 나는 가방 하나를 펼쳐들었다. "난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거예요.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어요." 얼핏 보기에는 하얀 의료용 가방처럼 보이는 그 안에는 조금 이질적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녀를 향해 먼저 질문을 던진 쪽은 바스퀘즈였다. "뭘 얻을 수 있는데?" "자유" 그 단어에 붉은 이삭의 검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은 리볼버 네 자루였다. "그리고 복수"
그녀는 천천히 총알을 장전하며 그중 가장 큰 총을 하나 손에 쥐었다. "남고 싶다면 당장 방으로 돌아가도 좋아요." 그녀는 그대로 세 자루의 총이 남아있는 가방을 그들 앞으로 돌렸다. 아무도 쉽게 총을 향해 손을 뻗지 못했다. 그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하게 바라볼 뿐. 바스퀘즈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복수? 누구에게." "당신들을 이곳으로 떨어뜨린 사람." 차갑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굳이 그 이름을 말해야 하나요?" 바솔로뮤 보그.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은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센티넬 감옥을 만들고, 가이드를 끌어들여 지옥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 넣은 남자. "내가 그 녀석의 부하를 어떻게 믿지?" 빌리의 물음에 엠마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비어있는 자리를 향해 있었다. "컬린이예요. 내 진짜 이름. 엠마 컬린." 엠마는 한쪽 손으로 총을 든 채 잠금이 걸려있는 문고리를 살짝 풀었다. "교도관에게 말한대도 말리지 않겠어요. 빌리, 문은 열려있어요."
잠시 침묵이 돌았다. 먼저 입을 여는 자도 발을 떼는 사람도 없었다. 그 짧은 틈을 깬 것은 의외의 남자였다. "난 하겠어" 가장 먼저 총을 집어 든 사람은 붉은 이삭이었다. "뭐야 너 영어 할 줄 알았어?" 그가 영어를 썼다는 것에 놀란 것 같은 바스퀘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더 없나요?" 엠마의 눈짓에 바스퀘즈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다른 조건은?" "다시는 로즈 크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괜찮네." 그가 마저 옆에 있던 총을 쥐었다. 상자에는 어느덧 한 자루만이 남아있었다. "빌리?" 엠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빌리를 바라보았다.
"…도망이라면 이제 신물이 나." 빌리는 그 총을 집는 대신에 두터운 문을 열었다. 삐걱대는 나무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빌리는 빠르게 문을 닫고 한적한 복도를 바라보았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복도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빌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그가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들이 보였다. 허리춤에 총을 찬 채 돌아다니는 교도관, 어디론가 걸어가는 의사와 그 뒤를 따라가는 낯선 죄수들. 분명히 늘 보던 그 광경이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언제서 부턴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복도를 채우는 것은 오직 본인의 것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빌리 락스는 그제야 복도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소름이 쫙 끼친 그의 귓가에 넌지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그 발걸음에 빌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익숙한 금발의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다. "너였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만큼 젊고, 무모하고 바보 같은 정신계 센티넬은 로즈 크릭에 한 사람 밖에 없으니까.
조슈아 패러데이는 한 걸음에 빌리를 향해 달려왔다. 빌리는 그의 넓은 어깨를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는 늘 풍기던 시가 향이 아닌 피 냄새가 났다. "보고 싶었어." 단숨에 그를 끌어안은 패러데이가 중얼거렸다. 키 차이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빌리의 이마에 닿았다. 다시는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키스는 여전히 서툴었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와의 재회에서 가장 먼저 빌리를 덮친 감정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었다. "…너 이러다 죽어." 빌리는 먹먹한 눈동자로 패러데이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녹갈색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은 언젠간 죽잖아."
저 눈으로 지금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수 십 명? 아니 족히 수 백 명은 될지도 몰랐다. 그 리바운드가 얼마나 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날 지켜줘 빌리." 패러데이가 커다란 손으로 빌리를 꼭 껴안았다. "…그만 해. 그만하자. 나 못해! 너 치료 못 한다고. 죽을 거야…. 조슈아, 네가…!" 빌리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검은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패러데이는 그 눈가를 따스한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저건 나 아니야."
패러데이는 눈물 몇 방울을 털어버리고 닫혀 있는 예배실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실 안에는 십자가에 몸이 박힌 나무 예수밖에 보이지 않았다. 싸구려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럼?" "설교가 더럽게 지루한 영감님." 패러데이는 그렇게 속삭이며 빌리의 귓가에 살짝 키스를 했다. 마른 입술이 떨어지고 순식간에 소리가 멀어졌다. "불 좀 빌릴게." 그제야 빌리는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라이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항상 무언가를 터뜨리고 싶었거든." 햇빛이 든다는 것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쇠창살조차 없는 유일한 공간. 패러데이는 불이 붙은 폭탄을 창가로 집어 던지면서 어쩌면 이 곳은 처음부터 이를 위해 지어진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예배실의 문을 닫은 것은 빌리였다. 굳게 닫힌 문 너머 귓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한 순간 폭발했다.
23.
"바깥 상황은?" 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자 복도로 가장 먼저 나온 사람은 양 손에 총을 들고 있는 엠마였다.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데." "함정일 수도 있어요. 좀 더 살펴봐요."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붉은 이삭과 바스퀘즈는 한쪽 손에 총을 쥔 채로 복도를 가득 채운 검은 연기를 들이 마시며 콜록거렸다. 패러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엠마를 향해 투덜대듯 대답했다. "내 능력이 투시력은 아니란 말이야. 기다려. 누가 오고 있어. 센티넬 두 명, 아니 한 명인가. 좀 이상한데…."
엠마는 패러데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예배실의 문을 열었다. 뿌연 먼지로 가득한 방 안에는 부서진 창문 너머로 따사로운 볕이 들이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고비였다. 창문 밖의 세계에는 보초병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잭 혼이 최대한 붙잡는다고 해 봤자 안에 있는 놈들이 한계였다. 눈이 시린 햇빛에 엠마는 눈을 찌푸린 채로 밖을 향해 조심스럽게 총을 거두었다. "창밖으로 가! 당장!" 굳은 표정의 그가 내뱉은 것은 조금 뜻밖의 외침이었다.
엠마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붉은 이삭의 손을 붙잡고 창문 밖으로 뛰어갔다. 바스퀘즈도 곧 그들을 뒤따라 창가를 넘어갔다. "빌리, 빨리!" 저 끝에서 그를 부르는 엠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빌리는 그녀에게 가기 전에 다른 이들과 달리 한 발자국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패러데이를 바라보았다. 열려있는 문 너머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한 두 사람의 기척이 아니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가 빌리를 덮쳤다. "이리와, 조슈아." 빌리는 도망가는 대신 패러데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이 닿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결국 빌리가 다가가 이끄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어당기는 빌리를 향해 패러데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했어." "뭐?" "잭 혼이 죽었어."
낯선 인기척에 창밖으로 몸을 숨긴 엠마가 먼저 문을 향해 총을 날렸다. 빌리는 본능적으로 패러데이의 어깨를 붙잡고 교회 의자 아래로 몸을 숙였다. 총알은 그대로 날아가 예배실로 들어오려던 교도관의 머리에 박혔다.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그를 기점으로 총격적인 시작되었다. 몰려온 교도관은 족히 수 십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나간 사람은 세 명, 남아있는 사람은 두 명. 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교도관과 바깥의 용병들을 생각하면 족히 백 명. 다섯 명이서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아니었다. 전원 센티넬인 저쪽과 다르게 이쪽의 센티넬은 단 두 명. 심지어 빌리에게는 총 조차 없었다. "빌리" 패러데이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분명 무모한 생각이었다. 판돈은 목숨, 인생 최대의 도박이었다. "눈 감아" 패러데이는 그 말과 함께 빌리의 귀를 양 손으로 가렸다. "조슈아, 안 돼!"
끼이이이이익! 고막을 찌르는 것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모두의 귀를 마비시킬 것처럼 울렸다. 엄청난 충격에 잠시 총격이 멈추었다. 그 중심에는 녹색 눈을 빛내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폭주였다. 정신계 센티넬 조슈아 패러데이의 폭주.
정신계는 물리계와 달리 좀처럼 폭주를 하지 않는 종족이었다. 패러데이 역시 그런 폭주를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스스로도 폭주를 해 보았던 건 딱 한 번, 아버지가 탄광에 갇힌 채 돌아가셨을 때뿐이었다. 컨트롤 같은 개념도 전혀 없이 시작 된 폭주의 결과는 처참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기억나는 것은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와 경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 그렇게 패러데이는 강제로 고향을 떠났다. 추방되었다고 하는 쪽이 맞았다. 그 때부터 패러데이는 다시는 폭주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라도 그런 낌새가 있는 날에는 차라리 술에 취했다. 너무 두려웠다. 자신을 잃는 것 같은 기분, 세상에 둘 도 없는 괴물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 패러데이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벗어던졌다. 소리가 멈추고 그는 빌리의 얼굴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질끈 눈을 감고 있는 빌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 눈꺼풀 위에 짧게 키스를 하고 패러데이는 의자 밑에서 나와 문가로 향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반 정도 귀를 막고 쓰러져 있었고 멀리서 달려오는 놈들이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패러데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장 앞장서 오던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이던 눈동자가 짙은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패러데이의 손짓 한 방에 몸을 뒤로 틀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동료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고 말았다.
비상사태,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려 귀를 간질였다. 반대 쪽 복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막 폭주를 시작한 센티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창문 뒤로 넘어간 세 사람이 무너진 벽 너머로 열심히 사격을 시도 했지만 엄청난 에너지에 총알 따위야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가장 앞서오던 남자가 패러데이를 향해 불타오르듯 이글거리는 주먹을 날렸다. 힘으로만 따지면 비교도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의 팔이 패러데이의 얼굴을 강타했을 때, 귓가에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싸움 레슨 다시 받아야겠네." 패러데이는 그대로 허깨비와 싸우던 그의 급소를 발로 내리쳤다. 본인의 에너지 때문에 반동이 생긴 나머지 달려오는 동료들의 얼굴로 고꾸라진 그는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약한 불길이 복도를 휩쓸었다.
녹색 눈은 역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놈들마다 그 병에 옮고 말았다. 불길을 뚫고 달려오는 놈은 죄다 그랬다. 제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까맣게 타 버린 손가락으로 간신히 발목을 붙잡아 봤자 큰 타격도 없었다. 잠깐 불편해 질 뿐. 패러데이는 그의 발을 붙잡고서 죽어가는 한 센티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고 있는 녀석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엄청난 굉음을 내려주면서 그는 허리를 숙였다. 패러데이가 까만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낼 때였다.
"조슈아!" 목덜미에 느껴지는 찌릿한 주삿바늘보다 먼저 그에게 다가온 것은 빌리의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너 같은 놈들은 미리 다 죽여 버렸어야 하는데." 귓가에 속삭이듯 울리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온 몸의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약은 마취제가 아니었다. 독방에서 매일같이 맞았던 호르몬 안정제였다. 가이드의 피를 농축해 만든 그 약. 패러데이는 그대로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발밑에 깔린 다 타버린 남자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지옥에서 보자 개새끼야."
그 말과 동시에 독침 같은 불길이 패러데이의 얼굴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어지러운 정신으로 불길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것은 패러데이의 오른쪽 눈에 스치듯 닿고 말았다. 안구를 태워버릴 듯 한 감각에 온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으아아아아악!" 패러데이는 떨리는 손으로 아픈 눈을 움켜쥐고 괴성을 내질렀다. 의사는 품에서 칼을 꺼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뱃가죽을 찔렀다. 한번, 두 번, 세 번째 난도질이 시작될 때 쯤, 작은 바람과 함께 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패러데이는 무의식중으로 바람이 불어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타오르는 시야 너머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의사는 심장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박힌 채 죽어 있었다. 총도 칼도 없는 그가 집어 던진 것은 긴 머리에 늘 꼽고 다니던 비녀였다. "이제 나도 몰라." 빌리의 거친 손이 패러데이의 뺨에 닿았다. 그 손이 닿자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가 외상까지 낫게 해 준다는 얘기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 뿐이겠지. 알고 있었다. 착각이라는 것은. "책임져 조슈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한쪽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는데도. 빌리는 그대로 그의 뺨을 만졌던 왼손을 떼어 늘 끼고 다니던 가죽 장갑을 벗었다. 센티넬들의 시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 사이에 그것을 던져버리고 빌리는 자신의 손을 뻗어 패러데이에게 보여주었다. 시뻘건 화상으로 얼룩진 그의 손등에는 아직 한 글자가 남아 있었다.
J, 폐허가 된 그의 손등에 아직도 피로 수를 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문자가 패러데이의 남은 눈에 박혀 조각조각 잊히지 않을 잔상이 되었다. J, Jack, Josh, Joshua…. 조슈아 패러데이.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었던 한 글자의 이름. 패러데이는 웃었다. 눈을 찌르는 아픔도, 허리에서 흐르는 피도, 머리를 갈라놓을 것 같은 두통도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마든지." 미소를 짓고 있는 패러데이의 입술 위로 따뜻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빌리는 한쪽 어깨로 그를 부축한 채 창문을 향해 발을 옮겼다. 저 멀리서 남은 교도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싸울 정신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패러데이는 빌리의 체온을 느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른 사람이 내 아내에게 손대는 건 질색이지만. 넌 내 가이드니까." 패러데이는 빌리를 향해 총의 손잡이를 건네며 말했다. "인사해. 내 에텔이야." "…이럴 줄 알았어." 빌리가 그것을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총에 대고 키스를 했으니 그렇게 못하지." "그런 건 안했거든?" "퍽이나."
역시 자신보다 훨씬 커다란 덩치를 이끌고 짧은 시간 동안 창문을 넘어가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빌리는 산산조각 난 십자가상 앞에서 멈춰 에텔을 손에 쥐었다. 패러데이 역시 그를 따라 문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총알을 먼저 발사한 것은 빌리 쪽이었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센티넬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곧이어 끝이 없을 것 같은 센티넬 군단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리볼버에 장전된 총알은 여섯 개. 빌리는 침착하게 총을 조준하고 한 발 한 발을 날렸다. 순식간에 네 발의 총알이 날아가고 어느덧 남은 것은 단 두발. 다친 눈 때문인지 헛발만 연속해서 날리던 패러데이는 어느새 재장전을 하고 있었다.
상대편에서 날아온 총알이 패러데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십자가에 박혔다. 잊고 있던 통증이 스멀스멀 기어오르자 패러데이가 아픈 입맛을 다셨다. 빌리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신음을 흘리는 패러데이의 한쪽 손을 굳게 붙잡았다. "…역시 난 네가 싫어." "너무 잘생겨서?" 패러데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눈물처럼 볼을 타고 흘렀다. 피범벅이 된 허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다쳤고 싸움에서는 밀리고 있었다. 어딜 봐도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적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잡고 있는 손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기대하게 만드니까."
그의 옆에 있다 보면 가끔씩 현실감이 사라지곤 했다. 왜일까.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살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저 깨진 창문을 넘어 남들처럼 그냥 평범하게.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지만 이번이라면, 그와 함께라면 긴 도망의 종지부를 새로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빌리는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꿈이라는 것을. 조슈아 패러데이가 주는 달콤한 꿈. "칭찬이지?"
빌리는 빠른 손길로 재장전을 했다. 숨이 찼다. 몸을 숙였지만 날아오는 총알들이 하나 둘 씩 옷깃에 스치고 있었다. 패러데이의 힘겨운 숨결이 느껴졌다. 헐떡이듯 내쉬는 그 숨소리는 아주 익숙한 소리였다. 죽는다. 죽어간다. 부질없던 꿈이 산산조각처럼 깨지고 만다.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던 조슈아마저 곧 그를 떠날 것이다. 저 황야 속으로 사라졌던 굿나잇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먼,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용서 안할 거야." 그를 위해 빌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의 이름이 남아있는 손가락으로 힘이 빠져가는 커다란 손을 꽉 쥐고 있는 수밖에. "네가 한 마디만 해 주면 싹 나을 것 같은데." "뭐" "…사랑한다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원한다고." 사랑. 생각해보면 조슈아 패러데이는 예전부터 그런 단어에 집착했다. 사랑해, 좋아해. 그런 낯간지러운 말들. 빌리는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굿나잇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단어를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럽거나 싫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어려웠다. 그건 너무 낯설고 무거운 말이었다. 백인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중에 가장 어려운 말. "…역시 어렵나." 꺼져가는 패러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눈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피가 빌리의 허벅지 위 까지 떨어졌다. 뚝, 뚝. 빌리는 쓴 입맛을 다시며 그 질척한 액체를 바라보았다.
후회할까. 어느 쪽을 후회하게 될까. 말을 하는 쪽? 아니면 하지 않는 쪽? 빌리가 입술을 열기 전에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창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었다. 탕, 빌리는 잽싸게 총구를 돌려 뿌연 모래먼지 너머를 쏘았다. 죽는구나. 빌리는 그쪽에서 불어오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흩날리는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여전히 그의 손은 패러데이와 닿아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끝나는 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빌리는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리볼버에 남아있던 마지막 탄환이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총알은 그림자를 맞추지 못했다.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을 뿐이었다. 아마 총이나 방패 같은 것에라도 맞은 모양이었다. 빌리는 눈을 감았다. 잡고 있는 손에서 느껴지는 패러데이의 맥박만이 그를 감쌌다.
"Bonjour, ma petite" 그 너머에서 그리운 프랑스 말씨가 들렸을 때 빌리는 차마 눈물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모래 바람이 멈추었다. 익숙한 담배 향이 퍼졌다. 아주 쓰고 텁텁한 몽롱한 아편 냄새. "나를 위해 이렇게 근사한 환영식도 준비해주고. 기뻐"
빌리는 까만 눈동자를 뜨고 태양이 쏟아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른 입술에서는 차마 어떤 말조차 튀어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건 꿈에서조차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파란 눈동자, 희끗한 머리카락, 늘 입었던 회색 죄수복이 아닌 꽤 멋있는 양복을 갖춰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있는 남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굿나잇 로비쇼가 웃고 있었다. "아이리쉬, 파티가 생각보다 일찍 열렸던데?" "누구 씨가 멋대로 도망치는 바람에 달리 방법이 있어야지." 육중한 쇳소리가 들렸다. 굿나잇은 라이플을 들고 있지 않았다. "…닥치고 엎드려" 그가 끌고 온 것은 커다란 개틀링 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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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빌패 셋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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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미 내 센세 입갤했다!!!!!!!성실수인 내센세ㅠㅠㅠㅠㅠㅠㅠ선설리 선개추!!!
와.... 씨발.... 와..... 존나.... 워....... 너무 좋아서 언어중추가 소강상태가 되네 시발 개시발 굿빌패 존나 완벽하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ㅠㅠㅠ
센세 나붕은 이제 혼란스랍땨 패러데이 존나 멋있고 스윗해서 광광울면서 패러데이랑 행복해지길 바랐는데 굿나잇 등장하는 데서 다시 답을 잃었땨 총명한 센세 말대로 셋이 같이 살아야게땨
허미ㅠㅠㅠㅠㅠㅠㅠㅠ숨도 못 쉬고 읽었어요 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굿빌패 셋이 살아요2222222
와......굿빌패 셋이 살아요33333그리고 센세ㅜㅠ 센세는 나랑 살자ㅜㅠㅜㅠㅜ
아 미쳐따 씨발..... 아니 센세한테 욕 한 건 아니구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와 진짜 미쳤다 이건 미쳤단 말로도 모자라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센세 셋이 사는 거 꼭 보여조야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억 패러데이 ㅠㅠㅠㅠㅠㅠㅠㅠ 굿나잇 돌아왔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행이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굿빌패 미쳤다진짜 센세 살게해줘서 고마워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미쳤다 미쳤어 센세 진짜 영화계에서 일하지?? 셀털이라 말 남하는거지????ㅠㅠㅠ
셋다 살아서 다행이다 ㅠㅠㅠㅠ 근데 앞으로 진짜 셋이 살면서 행쇼할 수 있나 ㅠㅠㅠㅠㅠ 그 어떤 감정도 쉬이 할 수 없어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울 정도 ㅠㅠㅠ 진짜 셋이 살아라 셋이 행쇼섹쇼해라 그럴수 밖에 없다ㅜㅜㅜㅜ
굿빌패 셋이 살아요444444ㅠㅠㅠㅠㅠ
센세 무순 읽을때면 산소가 늘 부족해요 나붕 염통 센세꺼야 거절은 거절한다
긋빌패 셋이 살아요44444444 센ㅅ
ㄴ센세 사랑해요ㅜㅜㅜㅜㅜㅜㅜㅜㅜ너무 흔분해서 말이 안나와
구디 타이밍ㅠㅠㅠㅠㅠ영화보는것같다ㅠㅠㅠㅠㅠㅠㅠ세상에 너무좋아ㅠㅠㅠ모두 행복해질수 있을까요ㅠㅠㅠ정말 잘보고있어요 센세ㅠㅠㅠㅠ - dc App
센세... 사랑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갸아앙아우앙아ㅏ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패러데이안쥭는거지센세???ㅠㅠㅠㅠㅠ굿빌패 제발 행쇼해ㅠㅠㅠㅠㅠ
아 다들 행복하게 해주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굿빌패 셋이 살아요5555666667777777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허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시발 저ㅗㄴ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센세 내센세 사랑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센세는 나랑 살아요 내가 잘해줄게 군만두 웰치스 다 준비해놨어 - DCW
센세혹시 죽어서셋이같이살아요는아니겠죠??? 나진짜여기서 센세믿고 기다린다??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