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종족은 선 긋는 버릇을 타고난 족속이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선 하나를 긋는 행위야말로 문명의 시작과 동의어였다.
로마의 건국 신화를 보라.
로물루스가 쟁기로 성스러운 포메리움의 경계선을 그었을 때, 쌍둥이 아우 레무스는 "ㅋㅋ이딴게 성벽임?"하고 그 선을 비웃듯 넘어섰다.
그리고 그 댓가는 죽음이었다.
형제의 피로써 비로소 '안'과 '밖'이 규정되었고, 신성한 도시와 미천한 황야가 나뉘었으며, 법이 미치는 영역과 힘만이 지배하는 영역이 갈라섰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듯 장엄하고도 유치찬란한 선 긋기의 역사다.
성벽(性癖이 아니다!)
이 얼마나 양가적인 단어인가.
그것은 안의 것을 지키는 방패인 동시에, 안의 것을 가두는 감옥이다.
밖의 야만을 막는 견고한 질서이자, 밖의 활력을 거부하는 오만한 정체(停滯)다.
인류는 유사 이래 끊임없이 성벽을 쌓아 올렸고, 또 동시에 그 성벽을 넘어서려는 욕망에 시달렸다.
이 지긋지긋한 모순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니, 철학이니, 문명이니 하고 거창하게 부르는 것들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성벽 이야기에서 트로이를 빼놓는 것은, 팥 없는 찐빵이요 소스 없는 치킨과 같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서 트로이의 성벽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아폴론이 땡볕 아래서 직접 노가다를 뛰어 건설한 신들의 작품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그야말로 '넘사벽'의 상징이었다.
10년 동안 그리스의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그 앞에서 죽어나자빠진 것만 봐도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완벽한 하드웨어가 무너진 것은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시스템의 '소프트웨어'적 결함, 즉 어리석은 믿음과 오만한 방심 때문에 뚫렸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겉보기엔 신에게 바치는 성스러운 선물이었지만, 그 뱃속에는 칼을 든 오디세우스와 그 일당이 숨어 있었다.
트로이인들은 "와! 개쩌는 대형 피규어다! 승리 기념 트로피 겟또다제~"라며 좋다고 성문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견고한 성벽만 믿었지, 인간의 교활함이 그 성벽을 얼마나 우습게 우회할 수 있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21세기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수백억을 들여 구축한 기업의 보안 시스템이, "경품 당첨!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라는 이메일 한 통에 뚫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최첨단 방화벽은 해커의 현란한 공격이 아니라, 경비 아저씨에게 "아, 제가 신분증을 놓고 와서요"라며 커피 한 잔 건네는 사기꾼의 사교성에 무력화된다.
트로이의 비극은, 인류가 1만 년이 지나도 똑같은 수법에 똑같이 당하는 학습능력 제로의 족속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글픈 기념비다.
하드웨어 스펙만 믿고 소프트웨어의 취약점을 간과하는 놈들은 언제나 망하게 되어 있다.
이거슨 만고불변의 진리다.
서양에 트로이 성벽이 있다면, 동양에는 만리장성이 있다.
진시황이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십만 명을 갈아 넣어 쌓아 올린 이 거대한 벽은, 단순한 방어 시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중화"라는 '문명 세계'와 그 밖의 '오랑캐 세계'를 구분 짓는 거대한 선언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세상이고, 교화가 가능한 인간의 영역이며, 이 너머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의 땅이다"라는 오만함의 물리적 현현.
하지만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
만리장성은 사실상 방어 시설로서는 실패작에 가깝다는 것을.
유목민족들은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장성을 넘어왔다. 무협에서 언제 어느때고 뚫리는 천라지망 같은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벽을 전부 지키는 건 불가능했고, 매수된 장수가 슬쩍 열어준 문으로 들어오거나, 아예 장성이 없는 곳으로 돌아 들어오기 일쑤였다.
유목민족의 침입을 실질적으로 막았던 것은 벽돌이 아니라 '은(銀)'과 '비단'이었으며, '공주'와 '외교'였다.
때로는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다른 오랑캐를 막게 하는 이이제이 전술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은 왜 쌓았는가?
그건 실용적 목적보다는 상징적, 정치적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내부를 향한 쇼였다고 본다.
"보아라, 짐이 너희를 이토록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 그러니 닥치고 세금 내고 부역에 동원되거라."라는 무언의 압박.
거대한 국책 사업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고, 백성들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며, '중화'라는 동질성을 강제 주입하는 수단이었다.
현대 국가들이 실효성도 없는 '사이버 안보'나 '마약과의 전쟁' 같은 걸 선포하면서 예산을 타내고 국민을 통제하는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이다.
어그로만 잔뜩 끌고 실속은 없는 탱커처럼, 만리장성은 실제 전투력보단 '존재감'으로 먹고사는 구조물이었던 셈이다.
중국인들이 세상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벽 쌓기에 몰두할 때, 저 멀리 지중해의 로마 놈들은 좀 더 실용적이고 유연한 생각을 했다.
그들의 국경선, '리메스'는 만리장성 같은 거대한 단일 장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 도로, 강, 목책, 감시탑 등이 얽힌 복합적인 '국경 지대'였다. 닫힌 벽이 아니라, 통제가능한 구멍이 뚫린 '막(膜)'에 가까웠다.
로마인들은 야만인들을 무조건 막아야 할 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잠재적인 로마의 자원이었다.
리메스 지대에서는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고, 야만인들은 로마의 값싼 공산품을 얻는 대신 자신들의 용맹함을 로마 군단에 팔았다.
로마는 국경 지대에 야만족들을 정착시켜 로마화된 '완충 세력'으로 삼았고, 그들이 더 야만적인 다른 부족을 막아주는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게 했다.
최고의 국방은, 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건 현대의 대기업이나 힙스터 씹덕들이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뉴비를 배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혜다.
고인물들끼리 모여서 "요즘 애들은 근본이 없어"라며 낄낄대는 동안, 로마는 "너희도 열심히 싸워서 공을 세우면 로마 시민권을 줄게. 연금도 나온단다"라며 야만족들을 꼬드겼다.
그렇게 피를 섞고 문화를 섞어가며 제국의 덩치를 불렸다.
물론 그 끝이 게르만 용병대장에게 멱살 잡혀 망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 전까지 천 년을 버티게 한 힘은 폐쇄적인 성벽이 아니라 개방적인 경계선, 리메스에서 나왔다.
고립된 성은 언젠가 안에서부터 썩어 무너지지만, 외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막은 쉽게 터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성벽 이야기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우리의 정신을, 사회를, 관계를 옭아매는 관념의 벽 말이다.
장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개똥나무가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그 쓸모없음 때문에 도끼에 찍히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모두에게 그늘을 주는 쉼터가 된다고.
사람들은 '유용함'이라는 성벽을 쌓고 그 안에 들지 못하는 것들을 배척하지만, 진짜 자유와 평화는 그 성벽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
노자는 그릇의 '비어 있음'이 그릇의 쓰임새를 만든다고 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있음'이 아니라, 그 안의 '없음', 즉 공간이야말로 가치의 본질이라는 통찰이다.
우리는 '언어'라는 성벽에 갇혀 산다.
우리는 '불'이라는 단어를 아는 순간, 진짜 불의 뜨거움과 역동성,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멈춘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불'이라는 개념의 딱지만 붙이고는 다 안다고 착각한다.
"이것은 사랑이야", "저것은 정의롭지 않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복잡하고 생동하는 실체를 죽여서 언어라는 감옥에 가둬버린다.
사회에는 '계급'과 '신분', '인종'이라는 더럽고 치사한 성벽이 존재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신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웠다.
조선의 양반과 상놈은 같은 하늘 아래 살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투명하지만 강철보다 단단한 성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현대라고 다를까? 학벌, 재산, 출신 지역, 심지어는 '인싸'와 '아싸'라는 유치한 구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편과 네 편을 가르고, 보이지 않는 성벽을 쌓아 올린 뒤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거나, 그 밖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학창 시절, 별 이유 없이 '찐따'를 괴롭히던 '일찐'들은, '우리'라는 성벽 안의 소속감을 확인하기 위해 성벽 밖의 누군가를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성벽은, 트로이의 성벽보다 견고하고 만리장성보다 길다.
20세기 후반, 인류는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스펙터클을 목격했다.
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20세기를 지배했던 거대한 이념의 성벽이 망치와 곡괭이 앞에 허물어지는 모습은, 인류가 드디어 벽 없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국경도, 인종도, 이념도 없는 완전한 자유의 광장. 정보의 바다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소통하며 모든 벽을 허물어버릴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기대가 넘쳐났다.
과연 그럴까?
좃좃
인간은 광장에 세워진 벽은 허물었지만, 그 대신 각자의 골방에 들어가 자기만의 성벽을 다시 쌓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벽을 없앤 게 아니라, 개개인에게 맞춤형 성벽을 지을 수 있는 DIY 키트를 제공했을 뿐이다.
유튜브 알고리즘, 페이스북 뉴스피드, 트위터 타임라인은 니가(Nigger 아님)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고, 너와 생각이 같은 사람만 연결해준다.
우리는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게 아니라, '필터 버블'이라는 안락한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고 있을 뿐이다.
디씨의 각 갤러리들을 보라. 그곳은 완벽한 현대의 성채 도시다.
각 갤러리는 자기들만의 언어(밈), 역사, 그리고 적(타 갤러리, 근첩, 비틱 등)을 공유하며 견고한 성벽을 쌓는다.
그 성벽 안에서 그들은 강한 소속감과 유대를 느끼지만, 성벽 밖의 모든 존재는 잠재적인 침략자요 야만인일 뿐이다.
정치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성벽을 쌓는 것을 넘어, 성벽 꼭대기에 대포를 설치하고 24시간 내내 반대편을 향해 오물을 투척한다.
결국 우리는 물리적 성벽이 사라진 시대에, 그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개인화된 수백만 개의 심리적 성벽을 쌓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성벽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알고리즘'이라는 친절한 설계자가 지어준다는 점에서 훨씬 더 비극적이다.
우리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간 뒤, 간수가 틀어주는 달콤한 음악을 들으며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로물루스는 선을 넘은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세웠다.
그는 문명의 창시자인가, 아니면 최초의 폭군인가? 성벽은 우리를 지키는가, 우리를 가두는가? 우리는 성벽을 허물어야 하는가, 아니면 더 높이 쌓아야 하는가?
정답은 엿장수 마음이다.
어쩌면 질문 자체가 글러먹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성벽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다.
'나'라는 정체성 자체가, '나 아닌 것'과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도, 국가도, 문명도 마찬가지다.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모든 것은 뒤섞여 혼돈의 죽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난 탐험가,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 애쓴 학자, 금지된 사랑에 빠진 연인, 낡은 사상의 벽을 부순 혁명가.
인류의 모든 위대한 진보는, 기존의 성벽에 균열을 내고 그 너머를 엿보려는 '선 넘는 놈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결국 우리는 성벽을 쌓는 동시에, 그 너머를 갈망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성벽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안주하다가도, 문득 성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냄새에 마음이 흔들리고,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다.
어쩌면 인생이란, 자신만의 성벽을 쌓고, 부수고, 또 그 잔해 위에서 새로운 성벽을 쌓아 올리는 무한한 반복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하고도 장엄한 비극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희극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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