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불 꺼진 거실 한켠에서 모니터 불빛만이 깜박인다.
손가락은 익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화면 속 캐릭터는 몇 시간째 뻘짓을 하고 있다.
창 밖으론 아직도 하루 일과 를 끝내지 못 한 택배아조씨의 트럭이 보이고
옆집은 저녁밥 냄새가 흘러나오는데,
나는 오늘도 게임 속에서 "쓸모없는 시간"을 태운다.
혹자는 이러한 행위를 두고 "낭비"라 말한다.
생산되지 않는 시간, 돈을 벌지도, 몸을 키우지도 않는 행위.
이런 유희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어른답지 못한 일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게임에 시간을 꼴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비어 있기에 울리는 종처럼,
겉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이 공백 속에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충만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인류가 스스로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 중 하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다.
행동하라,
변화를 만들어라,
싸워라,
건설하라~
이 말들은 마치 우주의 법칙처럼 강박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왔다.
그러나 도가의 옛 성현들은 정 반대의 가르침을 설파해 왔다.
노자는 무위, 즉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다스림이라 했다.
무위는 게으름과 다르다.
무위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는 상태다.
그것은 억지의 부재이자, 강제의 결핍이며, 자연의 흐름과 합일된 행위다.
바람이 분다고 해서 나무가 이를 막지 않는 것처럼,
강물이 흐른다고 해서 바위가 이를 억누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바깥에서 닥치는 사건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을 때,
오히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의 궁극적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 하면 할수록,
세계는 더욱 더 어색하고 불균형하게 변한다.
반대로 우리가 억지를 거두면,
세계는 스스로의 조화를 회복한다.
이 상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이며, 조용한 개혁이다.
장자는 이 무위의 철학을 더욱 기묘한 방향으로 확장했다.
그는 무용. 즉 "쓸모없음"의 가치를 설파했다.
세상은 언제나 유용함을 찬양하고, 효율과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그러나 장자는 역설했다.
쓸모있음은 도끼날을 부르고, 쓰임새가 많은 것은 남용을 부른다고.
큰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목재가 곧고 단단하다면, 곧 도끼에 찍혀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쓰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가 삐뚤빼뚤하고 옹이가 가득하다면, 아무도 베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쓸모없는 나무는 백 년, 천 년을 서서 숲을 지키고,
새와 짐승에게 그늘을 주고,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쓸모를 초월한 가치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생태와 질서를 유지하는 원천이다.
무용의 경지는, 사용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위와 무용의 철학은, 선악의 문제로 이어진다.
기존의 도덕철학에서 선과 악은 종종 절대적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옛 성현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선과 악은 삼사라 안에서만 의미가 있는 상대적 구분일 뿐,
그 너머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무엇이 절대적일 수 있는가?
내가 감히 말하건데,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아름다움은 선악의 구분을 초월한 가치다.
그것은 전쟁 속에서도 나타나고, 악행 속에서도 피어난다.
한 편의 비극이 우리를 울리는 것은, 그것이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미학적 선악관이란, 선이나 악을 도덕적 절대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꿈의 조화를 깨뜨리는가,
혹은 꿈의 완성도를 높이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관점이다.
악이더라도 그것이 균형과 대조를 통해 전체의 아름다움을 드높인다면, 그 또한 가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이라도 그것이 형의 조화를 깨뜨린다면 추하다.
이 관점에서, 무위와 무용은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들은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다.
불필요한 개입을 줄이고, 반드시 필요한 순간에만 섬세하게 손을 대는 것.
그리하여 전체가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
오늘날의 세계는 추한 꿈꾸을 꾸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욕망을 과시하고,
소유를 권력의 척도로 삼으며,
경쟁을 미덕으로 포장한다.
추한 꿈꾸는 자가 꾸는 꿈은,
균형 없는 세계를 낳는다.
그것은 강자의 전횡과 약자의 절망, 무한한 확장과 자멸을 동반한다.
이때 무위와 무용의 자리에 선 자는, 직접 싸우기보다는 균형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되, 개입이 필요한 순간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선'의 강자나 '악'의 강자와 다른 길이다.
미학적 강자, 즉 조화의 수호자의 길이다.
추한 꿈꾸는 자와 싸우는 것은, 옛 성현들이 경계한 무의미한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꿈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이며, 도道의 의지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이 성공했을 때,
우리는 선악의 문제를 넘어선 미학적 승리를 거둔다.
무위는 억지의 부재, 무용은 남용의 부재다.
둘 다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존재의 순도를 높인다.
이것은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가치로 향하는 길이다.
인간은 선악으로 세상을 재단하려 들 때, 오히려 세계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무위와 무용의 자리에 서면,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두면서도,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만 개입함으로써 전체의 꿈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도와 합일된 자의 행위이며
미학적 선악관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미안하다 안 읽엇다 ㅋ
청키 오랜만이노
지랄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