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영국 영화'라는 개념이 있다. 영화적이지 못한 영화인데 그중에서도 관념이랄까 설계가 영화적으로 구현된 실체보다 앞서면서 의미심장함을 꾸며내는 그런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영화들은 노골적이어서 민망한 대사들을 흩뿌리거나, 대사 자체의 '문학적' 근사함이랄지 '명대사스러움'을 과시하거나,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미명하에 지극히 게으른 대화 장면 연출을 선보이거나, 굳이 대사가 필요 없는 대목을 말로 설명하거나,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신의 '영화적임'을 증명하기 위해 과도한 '명장면'을 따로 배치하며 일견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상은 '예쁜 화면'을 빚어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거나, 이야기상으로는 대단한 미스터리를 감추고 있어서 관객의 머리채를 쥐어 잡고 휘두르고 있다는 듯 굴지만 실상은 지극히 뻔한 데다 둔하기까지 하여 정보의 완급 조절이 관객의 예상보다 뒤처지고 지루해지며, 특히 그 주제/소재/명대사/명연의 '의미심장함' 덕분에 종종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예로는 당장

 존 브람의 〈죽지 않는 괴물〉, 〈하숙인〉
 루이스 앨런의 〈불청객〉
 데이빗 린의 〈밀회〉
 캐롤 리드의 〈제3의 사나이〉, 〈심야의 탈주〉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
 조지 스티븐스의 〈셰인〉
 바질 디어든의 〈사파이어〉, 〈신사 연맹〉, 〈희생자〉
 리들리 스콧의 〈카운슬러〉

 등이 떠오른다.

 영국 밖에서 영국인이 아닌 감독이 만든 영화도 상당수 있음에도 이런 영화를 통칭 '영국 영화'로 부르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이 개념을 주로 영국 감독들의 '고전 명작'을 통해 구체화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수아 트뤼포 이래 영화계에 암암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통칭 '영국 영화'를 향한 편견을 다소간 재미삼아 수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뤼포는 영국인인 알프레드 히치콕과 대화를 하면서 감히 이렇게 말했다.

트뤼포 : 그렇더라도 영국에 있는 기간 내내 당신이 미국 영화를 만드는 꿈을 꾸어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아닙니까? 반면에 할리우드에 도착한 이후로는 한 번도 영국식 영화를 본뜨려고 시도하지 않았고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영국에는 '반영화적인 anticinematic' 어떤 것이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고, 정확히 그게 뭐라고 꼬집어 정의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히치콕 :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무슨 얘기죠?

트뤼포 : 글쎄, 보다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영화'와 '영국'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양립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조금 억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생활 양식이나 고요한 시골 풍경, 틀에 박힌 관습 등 어떤 의미에서 드라마와는 거리가 있는 특성이 영국에는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영국적인 유머도 ─ 물론 여기에서 훌륭한 범죄 희극들이 많이 생겨나긴 했지만 ─ 강렬하고 역동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데 기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영국적인 특성들은 당신이 가진 독특한 이야기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신의 이야기 스타일은 본질적으로 행위나 사건이 아주 긴박하게 발생하고 빨리 진행될 뿐 아니라 충격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아무리 장난스럽게 접근하고 박력 있게 전개되더라도 늘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풀어 나갑니다. 무엇보다도 영국적인 특성은 당신 영화가 가진 조형적인 양식화와 배우들 연기의 양식화라는 특질과 마찰을 빚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국의 높은 지적 수준이나 영국 출신의 뛰어난 작가나 시인들이 가진 걸출한 능력을 감안할 때, 영화가 탄생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시간의 시험과 공간의 테스트를 거치고 살아남은 감독이 찰리 채플린과 알프레드 히치콕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합니다. 역사적인 문맥, 즉 영화 제작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고 발전해 온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영국의 경우는 좀 이상합니다. 비록 모든 규칙엔 예외가 있고, 또 오늘날 영국의 영화 산업에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갸우뚱거려집니다.


 장-뤽 고다르도 이 주장을 이어받아 수십 년 동안 영국 영화를 싸잡아 무시하곤 했는데, 물론 나는 이런 프랑스스러운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영국 시절의 히치콕이 아니더라도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이나 5~60년대 해머 영화들, 지저분한 키친 싱크 리얼리즘 영화들의 '영화다움'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한 국가의 이름을 내세워 단일한 집단으로 묶어 비판하는 행위에 오류가 없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이 '영국 영화'라는 표현은 어쩐지 입에 착 달라붙으며, 종종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여 대체 불가능하게 들린다. 영국 스타일의 점잔빼는 허세나 무신경함을 과시하는 유머가, 다루는 대상으로부터 몇 발 떨어져 어깨를 으쓱이는 듯한 위 영화들의 태도와 닮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물의 거친 표면을 담기보다는 그 '관념적 의미'를 확정하여 자리에 맞게 '배치'하는 듯한 연출 태도가 '(영국) 문학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러저러한 논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지 않은 이상 '영국 영화'나 '문학적 영화'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 일이다. 그래서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을 찾고 있는데… 도저히 못 찾겠다. 가끔 반 농담조로 "브뤼티쉬 씨네마"라고 말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뭔가 대안이 없을까.

* * *


 마침내 〈참형사〉 시즌 1 다 봤다. 아니기를 바랐으나 결국 '영국 영화'였다. 작품을 구현하기 이전에 세워둔 '문학적' 설계가 너무 앞선 가운데 실제 결과물은 얄팍하고 도식적이다. 남부의 공간을 인물과 사건에 스며들게 하기보다는 멋들어진 풍경 쇼트로 '남부 고딕'이라는 관념을 과시하는 데에 그치며, 캐릭터나 사건의 성질에 매달려 그 결을 더듬으며 서서히 세계관을 전하기보다는 실속 없이 뒤섞어 놓은 플롯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끌어낸 '미스터리'를 앞세우면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무언가가 저편에 도사린 채 우리의 삶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먼저 휘둘러 댄다.

 특히 여러 시간대를 뒤섞으면서 '진실'을 서서히 풀어놓는 서사 구조는 이 있어 보이는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인데, 이 장치의 의미심장함에 현혹되면 『씨네21』의 기사와 같은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정교하게 직조된 세 갈래의 내러티브는 <트루 디텍티브>의 정서와 리듬감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각각의 시점마다 두 형사가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단서와 증언과 사건들을, 마치 시청자와의 대결을 제안하는 듯 촘촘히 풀어놓는다. 하지만 이 수많은 정보 중에서 어떤 것이 진실(truth)이고 어떤 것이 거짓(false) 정보인지를 가려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연유에선지 2012년의 두 형사는 과거에 대해 조금씩 다른 말을 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염세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러스틴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이 드라마가 진실과 거짓을 뒤섞으며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보는 동안 시청자가 음성으로 전달되는 2012년의 증언과 영상으로 전달되는 과거의 사건 사이에서 어느 쪽이 진실인지 고민하는가? 러스틴의 캐릭터가 이 사건에 새롭고 불가해한 층을 하나 더 덧씌우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참형사〉는 '이런 장치를 쓴다 = 이런 의미를 지닌다'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마치 40년대의 몇몇 겉만 번지르르한 필름 누아르들이 '카메라를 비틀어서 찍는다 = 인물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한다'라든가 '여러 인물의 회상을 통해 서사를 끌고 간다 = 진실의 다층적인 면과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와 같은 조건반사적인 해석에 도취되어 실상은 그렇지도 않은데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성찰을 담고 있는 양 무게를 잡듯이.

 그리하여 러스틴 콜(매튜 맥커니히)은 삶에 관한 격언조 대사를 공허하게 읊조리며 구도자인 양 서성이고, 마티 하트(우디 해럴슨)의 가정불화는 마치 그것이 개인의 성정이나 직업적 스트레스를 넘어서는 어떤 거대한 의미를 지닌 채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나마도 주인공이라 그 정도지, 두 사람 외의 다른 모든 캐릭터는 너무나 앙상하여 캐릭터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하다. (미셸 모나한 팬으로서 특히 속상했다.) 비슷하게 무게를 잡으며 세상 무게 다 짊어진 모양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더라도 데이빗 핀처의 〈세븐〉 쪽이 훨씬 알맹이가 있었다. 〈참형사〉는 하나로 매끄럽게 붙어 있던 작고 관습적인 이야기를 조각조각 떼어내어 뜸들여 던지면서 마치 조각과 조각 사이의 빈틈에 외부의 거대한 무언가랄지 우주의 진실 같은 것이 흘러들고 있다는 듯 굴지만, 실상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갖가지 '상징'과 노골적으로 붕 뜬 대사들을 집어 던지면서 '이 모든 것의 의미를 곰곰이 들여다본다면 너는 실제 사건보다 더 큰 어떤 냉혹하고 보편적인 깨달음에 이를 거야.'라고 최면을 걸려 애쓰는 그 모습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카운슬러〉를 닮았다. 이 드라마는 의미심장함을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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