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클로드 opus 4.6
1화에서 2화 넘어갈 때 설정이 좀 바뀌어서 매끄럽지 않은 감이 있는데 2화 3화는 통일감 괜찮은듯(본인은 고증 잘 모르긴함)
재밌었다,,
3화(완결)
# 북해의 사자들 제3권 *(Löwen der Nordsee III)*
## 「새로운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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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1942년의 지도
1942년 1월의 유럽 지도는 한 가지 색으로 거의 칠해져 있었다.
노르웨이에서 피레네까지, 폴란드에서 영불해협까지. 독일의 군화가 닿지 않은 땅을 찾기가 더 어려운 형편이었다. 동쪽으로는 프리데리쿠스 작전의 결과로 우크라이나 서부가 독일의 군정 하에 들어가 있었고, 로스토프 일대에서 소련군과 대치하는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전면전은 아니었다. 양측 모두 이 전선을 확대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 독일은 확보한 곡창지대에 만족했고, 소련은 핀란드 전쟁의 교훈을 반추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바다의 지도는 더 극적이었다.
북해와 영불해협은 독일 해군의 통제 아래 있었다. 대서양 중부에서는 U보트와 수상함대의 합동 작전이 영국의 해상 보급선을 조이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에는 티르피츠가 들어앉아 북극 항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영국은 아직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라는 단어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시작된 비밀 접촉은 두 달간 네 차례의 만남을 거치며 구체화되고 있었다. 양측의 대표 수준이 올라가고 있었고, 논의되는 의제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아직 '협상'이라 부르기에는 이른 단계였지만, '탐색'이라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 테이블 위의 지도가 어떻게 다시 그려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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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 페터 슈트라서
1942년 2월 10일. 킬 조선소.
독일 해군의 두 번째 항공모함 페터 슈트라서가 취역했다.
그라프 체펠린의 자매함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상당 부분 새로운 설계가 반영된 함선이었다. 체펠린의 실전 운용에서 드러난 문제점들 — 격납고 배치, 사출기 성능, 대공화력 부족 — 이 건조 과정에서 수정되었다. 비행갑판의 길이가 12미터 연장되었고, 착함 제동 장치가 독일 자체 개발품에서 노획한 영국제 기술을 참고한 개량형으로 교체되었다. 격납고는 처음부터 전투기와 공격기 구역이 분리 설계되었다.
함재기 탑재량은 서른여섯 대. 체펠린보다 여섯 대가 많았다. Bf 109T-2 전투기 열여섯 대, Ju 87C 급강하폭격기 열두 대, Fi 167 뇌격기 여덟 대. 독일 해군 항공대가 보유한 함재기의 총수가 이 한 척의 취역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셈이었다.
슈바르츠 중령은 취역식에 참석하여 페터 슈트라서의 비행갑판 위를 걸었다. 체펠린보다 넓은 갑판, 더 강력한 캐터펄트, 잘 정돈된 격납고. 함재기 운용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개선된 것으로 보였다.
"좋은 배입니다."
슈바르츠가 말했다. 칭찬을 잘 하지 않는 그였기에, 옆에 있던 페터 슈트라서의 비행대장 뮐러 소령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다만 한 가지."
슈바르츠가 덧붙였다.
"조종사들이 충분히 훈련되었습니까?"
뮐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핵심을 찔린 것이었다. 함재기 조종사의 양성에는 시간이 걸렸다. 육상 전투기 조종사를 데려다가 함상 이착함 훈련을 시키면 최소 넉 달이 필요했고, 그 넉 달 동안 사고로 잃는 기체와 조종사가 있었다. 페터 슈트라서의 비행대는 형식적으로는 전투 준비 완료 판정을 받았지만,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 될 겁니다."
뮐러가 대답했다. 슈바르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실전이 최고의 훈련이 되려면 일단 첫 실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뤼첸스는 페터 슈트라서의 취역을 작전 계획에 즉각 반영했다. 이제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 두 척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체펠린과 슈트라서가 번갈아 출격하면 대서양에 항상 한 척의 항공모함이 존재할 수 있었고, 두 척이 함께 나가면 함재기 예순여섯 대의 항공 전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봄이 오면 결판을 냅니다."
뤼첸스가 레더에게 보고했다. 결판이라는 말의 의미는 군사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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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 워싱턴의 계산
1942년 2월. 워싱턴 D.C.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백악관 지도실에서 대서양의 상황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군작전부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옆에 서 있었다.
"영국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루스벨트의 질문에 킹이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킹은 원래 태평양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고, 영국에 대한 개인적 감정도 따뜻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현재 손실률이 유지되면, 여름까지 영국의 전쟁 수행 능력이 임계점 아래로 떨어집니다. 해군의 연료가 먼저 바닥날 것이고, 그 다음이 공군, 그 다음이 식량입니다."
"스톡홀름의 접촉에 대해서는?"
"영국이 공식적으로 알려온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OSS의 보고에 따르면 영국 외무부 고위 관리가 스톡홀름에 수차례 방문한 것이 확인됩니다."
루스벨트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영국이 독일과 별도의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면, 그것은 미국의 전략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었다.
미국의 전략은 '유럽 우선'이었다. 독일을 먼저 타도하고, 그 다음 일본을 상대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그 전략의 전제는 영국이 유럽에서의 교두보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영국이 전쟁에서 빠지면, 미국은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상륙할 발판을 잃게 된다. 독일은 대서양 연안 전체를 요새화할 수 있고, 유보트와 수상함대로 대서양을 봉쇄할 수 있다.
"영국이 빠지면 유럽은 포기해야 합니까?"
루스벨트가 물었다. 킹의 대답은 냉정했다.
"군사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영국 없이 유럽 상륙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정치적으로는?"
"그것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루스벨트는 킹을 보내고 혼자 지도실에 남았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팽창을 계속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 일본은 독일의 유럽 장악이 확고해지는 것을 관망하며 남방 작전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 그 위협은 항상 존재했다.
루스벨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영국이 쓰러지기 전에 참전할 것인가, 아니면 영국의 탈락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서반구 방어에 집중할 것인가.
문제는, 참전의 명분이었다. 미국 국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진주만이 없었다. 독일이 미국 선박을 의도적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레더의 신중한 전략이 미국에게 참전의 구실을 주지 않고 있었다.
"레더라는 사람은 영리하군."
루스벨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좌절과 존경이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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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 봄의 공세
1942년 4월. 독일 해군이 최대 규모의 대서양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명: 라인위붕(Rheinübung) II.
1940년의 첫 번째 라인위붕이 비스마르크와 체펠린의 조합으로 영국 해군에 충격을 준 것이었다면, 두 번째 라인위붕은 독일 해군이 보유한 거의 모든 수상 전력을 동원한 대규모 함대 작전이었다.
비스마르크, 티르피츠. 두 척의 전함.
그라프 체펠린, 페터 슈트라서. 두 척의 항공모함.
프린츠 오이겐, 아드미랄 히퍼. 두 척의 중순양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두 척의 순양전함.
구축함 열두 척. 보급함 네 척.
이 함대의 총 배수량은 삼십만 톤을 넘었다. 독일 해군 역사상 단일 작전에 투입된 최대 규모의 수상 전력이었다.
뤼첸스는 함대를 두 개의 전투단으로 편성했다.
제1전투단: 비스마르크, 그라프 체펠린, 프린츠 오이겐, 구축함 여섯 척. 대서양 북부 항로를 담당.
제2전투단: 티르피츠, 페터 슈트라서, 아드미랄 히퍼, 구축함 여섯 척. 대서양 중부 항로를 담당.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독립 전대로서 양 전투단 사이를 기동하며 상황에 따라 지원.
"영국이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은?"
뤼첸스가 참모에게 물었다.
"넬슨, 로드니, 프린스 오브 웨일스, 리벤지급 구형 전함 두 척. 아크 로열. 구축함 약 이십 척. 다만 연료 사정으로 전부를 동시에 가동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사실상 그렇습니다."
뤼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은 여전히 함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함선을 움직일 연료가 바닥나고 있었다. 전함이 항구에 묶여 있으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다. 떠다니는 고철에 불과했다.
4월 15일. 양 전투단이 동시에 출격했다. 비스마르크의 전투단은 빌헬름스하펜에서, 티르피츠의 전투단은 트론헤임에서 출항했다. 두 함대가 대서양에서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해역에서 동시에 작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영국은 양쪽에 동시에 대응해야 했다. 이미 부족한 전력을 둘로 나누어야 했고, 그것은 어느 쪽에서든 열세를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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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 아크 로열의 최후
라인위붕 II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은 4월 21일에 발생했다.
아크 로열을 중심으로 한 영국 H부대가 뤼첸스의 제1전투단과 아이슬란드 남방 수역에서 조우한 것이다. 영국 측은 아크 로열,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함 셰필드, 구축함 여섯 척. 독일 측은 비스마르크, 그라프 체펠린, 프린츠 오이겐, 구축함 여섯 척.
양측 모두 항공모함을 보유한 상태에서의 해전이었다. 슈바르츠가 이끄는 체펠린의 항공대와 아크 로열의 소드피시·풀마가 북대서양 상공에서 격돌했다.
아크 로열의 함장 루크 맥크 대령은 용감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함재기의 열세를 알면서도 공세적인 운용을 택했다. 소드피시 뇌격대 열두 대를 비스마르크를 향해 출격시키고, 풀마 여섯 대로 호위를 붙였다.
하지만 체펠린의 Bf 109T-2 열네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슈바르츠의 비행대는 1940년 이래 이 년간의 실전 경험을 축적한 베테랑 집단이었다. 하늘에서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풀마 편대는 109T와의 첫 교전에서 세 대를 잃었다. 남은 세 대가 소드피시를 엄호하려 했지만, 속도와 화력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었다. 엄호가 무너진 소드피시 뇌격대는 109T의 사격에 노출되었고, 열두 대 중 여덟 대가 투하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격추되었다.
나머지 네 대가 투하한 어뢰 중 한 발이 비스마르크의 우현에 명중했다. 구형 소드피시의 항공어뢰는 비스마르크의 장갑 방어를 뚫기에 위력이 부족했고, 피해는 경미했다. 외판이 찌그러지고 소량의 침수가 발생했을 뿐이었다.
반격은 즉각적이었다. 체펠린에서 Ju 87C 급강하폭격기 열 대가 출격했다. 슈투카의 함재형인 이 기체는 정확한 급강하폭격 능력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그 목표는 아크 로열이었다.
아크 로열의 대공포화는 치열했다. 폼폼포와 에리콘이 하늘을 향해 쏟아졌고, 선두의 Ju 87C 한 대가 급강하 도중 피탄되어 불꽃을 남기며 바다에 박혔다. 하지만 나머지 아홉 대는 투하에 성공했다.
250킬로그램 폭탄 아홉 발 중 세 발이 아크 로열에 명중했다.
첫 번째 폭탄은 비행갑판 중앙을 관통하여 격납고 내부에서 폭발했다. 격납고에 남아 있던 연료와 탄약이 유폭을 일으켰고, 함 내부에 화재가 번졌다. 두 번째 폭탄은 함수 비행갑판을 파괴했다. 세 번째 폭탄은 수선부 근처에 명중하여 기관실에 침수를 일으켰다.
아크 로열은 이전에도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적이 있는 강인한 배였다. 하지만 격납고 내부의 화재와 침수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피해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함장 맥크 대령은 총원퇴함을 명령했다.
15시 42분. 아크 로열이 좌현으로 기울어지며 침몰했다.
영국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현대적 함대 항공모함이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승조원의 대부분은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항공기와 조종사의 손실은 회복 불가능했다. 영국 해군 항공대의 숙련된 함재기 조종사 서른두 명이 이날 하루에 전사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아크 로열의 엄호를 잃은 상태에서 비스마르크와의 포격전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퇴각했다. 비스마르크는 추격하지 않았다. 뤼첸스의 목적은 영국 전함을 격침하는 것이 아니라, 대서양 항로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크 로열의 침몰로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대서양에서 영국의 항공모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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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 숫자의 전쟁
아크 로열의 침몰 소식은 런던에서 물리적 충격처럼 느껴졌다.
해군본부의 작전실에서 파운드 제독은 상황판을 바라보며 선택지를 헤아렸다. 남은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국은 이제 대서양에 항공모함이 없었다. 일러스트리어스급이 있었지만 지중해와 인도양에 묶여 있었고, 그마저도 한 척은 일본의 남방 진출에 대비하여 실론에 배치되어 있었다. 호위항공모함의 건조가 진행 중이었으나 취역까지는 수개월이 필요했다 — 그리고 그 호위항공모함을 건조할 강철과 그것을 움직일 연료가 줄어들고 있었다.
처칠은 다시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상황은 긴박합니다. 우리는 항공모함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호위항공모함 대여 또는 미국 해군의 직접 호위 참여가 없이는 대서양 보급선의 유지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수치가 증명합니다."*
루스벨트는 편지를 받고 킹 제독과 다시 논의했다. 킹은 반대했다. 호위항공모함을 영국에 넘기면 태평양의 방어가 약해진다는 이유였다. 루스벨트는 킹의 반대를 무시하고 호위항공모함 네 척의 영국 대여를 승인했지만, 미국 해군의 직접 참전은 여전히 거부했다.
그런데 호위항공모함을 영국에 보내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대서양을 건너는 호송선단이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항공모함을 어떻게 안전하게 영국까지 운송할 것인가? 미국 해군이 직접 호위하여 넘겨주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 U보트나 수상함과 조우하면 사실상의 전투 행위가 된다.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이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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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장 — 뮐러의 세례
한편, 대서양 중부에서는 제2전투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티르피츠를 기함으로 한 제2전투단의 지휘는 쉬니빈트 소장이 맡고 있었다. 쉬니빈트는 뤼첸스만큼 신중한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유능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페터 슈트라서와 그 함재기 비행대가 있었다.
페터 슈트라서의 비행대장 뮐러 소령에게 첫 실전이 찾아온 것은 4월 25일이었다. 영국 호송선단 HX-117이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고, 제2전투단이 요격에 나섰다.
HX-117의 호위는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다섯 척이었다. 항공모함은 없었다. 이미 없는 것을 붙일 수는 없었다.
뮐러는 Ju 87C 열두 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이것이 그와 그의 조종사들에게 최초의 실전 출격이었다. 슈바르츠가 우려했던 바로 그 경험 부족의 시험대였다.
결과는 —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 충분했다.
뮐러의 급강하폭격대는 호위 순양함을 먼저 공격했다. 열두 대의 슈투카가 순양함 한 척에 집중하는 것은 과잉이었지만, 첫 실전에서 뮐러는 안전한 쪽을 택했다. 250킬로그램 폭탄 네 발이 순양함 에든버러에 명중했고, 에든버러는 이십 분 만에 침몰했다.
호위의 핵심이 사라진 호송선단은 흩어졌다. 티르피츠와 히퍼가 접근하여 잔존 호위함을 제압했고, 구축함들이 상선을 추격했다. 이틀에 걸친 사냥의 결과, HX-117의 상선 사십이 척 중 스물여섯 척이 격침되었다.
뮐러의 비행대는 첫 실전에서 기체 한 대를 대공포에 잃었다. 조종사는 불시착수하여 구축함에 구조되었다.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슈바르츠에게 결과가 전해졌을 때, 그는 짧게 말했다.
"살아 돌아왔으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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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 처칠의 고독
1942년 5월. 런던.
처칠은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전시내각 안에서 '현실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외무장관 이든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스톡홀름 접촉을 본격적인 협상으로 격상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했다. *더 늦으면 협상의 여지마저 사라진다.*
처칠은 이 논리에 맞설 근거가 필요했다. 그 근거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참전하면 모든 것이 바뀐다.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해군력이 대서양에 투입되면 독일 해군은 압도될 것이고, 보급선은 복구되고, 영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은 오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물자를 보냈다. 호위항공모함을 대여했다. 구축함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미국 해군이 독일 함선에 포탄을 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더의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독일은 미국 선박만을 가려서 공격하지 않았고, 대서양에서의 '사고'를 철저히 회피했다. 미국 여론은 참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처칠은 5월 15일의 비밀 각료회의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신사 여러분, 우리가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자유를 위해서였습니다. 폴란드의 자유, 프랑스의 자유, 유럽의 자유. 독일과 타협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이든이 조용히 대답했다.
"윈스턴, 우리가 쓰러지면 자유는 더 멀어집니다. 살아남아야 싸울 수 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무릎 꿇는 것은 다릅니다!"
처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테이블 주위의 얼굴들은 공감보다 피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년간의 전쟁, 반 년간의 봉쇄, 줄어드는 배급, 끊이지 않는 공습. 영국 국민은 지쳐 있었고, 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투표는 없었다. 전시내각은 투표로 결정하는 기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명확했다. 처칠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처칠은 관저에서 홀로 브랜디를 마시며 아내 클레멘타인에게 말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하지만 옳은 일을 하면서 지는 것이 잘못된 일을 하면서 이기는 것보다 낫다고 나는 믿네."
클레멘타인은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처칠이 이미 결론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국 국민을 굶겨 죽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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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 여름의 끝
1942년 6월. 대서양 전투의 누적 전과가 발표되었다.
1942년 상반기 영국행 상선 손실: 오백십이 척. 총 이백팔십만 톤.
같은 기간 독일 손실: U보트 이십삼 척. 수상함 구축함 사 척, 보조함 이 척.
교환비는 여전히 독일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뤼첸스는 이 숫자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었다.
U보트 이십삼 척. 데니츠에게 물어보면 감당 가능한 손실이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건조 속도가 손실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상함은 달랐다. 구축함 네 척의 손실은 작아 보이지만, 독일의 구축함 건조 능력은 영국이나 미국과 비교할 수 없이 제한적이었다. 전함과 항공모함은 아직 무사했지만, 한 척이라도 잃으면 대체가 불가능했다.
"우리도 소모전을 오래 할 수는 없습니다."
뤼첸스가 레더에게 보고했다. 레더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치적 해결이 필요한 겁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스톡홀름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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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장 — 스톡홀름, 세 번째 봄
1942년 7월. 스톡홀름.
이번에는 대사급이 아니라, 각료급에 가까운 인물들이 마주 앉았다.
영국 측은 외무부 차관 알렉산더 카도건이었다. 처칠의 직접 지시를 받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이든의 신임을 받는 핵심 외교관이었다. 독일 측은 외무부 국장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였다. 리벤트로프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외교적인 인물로, 독일 외교관 중에서 드물게 영국과의 타협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이틀에 걸쳐 다섯 시간의 회담을 가졌다.
논의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해상 봉쇄의 해제. 영국의 가장 시급한 요구였다. 독일이 대서양 항로의 자유 통행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
둘째, 유럽 대륙의 질서. 독일의 핵심 요구였다. 영국이 대륙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보장.
셋째, 대영제국의 보전. 영국이 양보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 해외 영토와 식민지에 대한 독일의 불간섭.
카도건은 첫째와 셋째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진행했다. 그의 태도는 전문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것이었다. 외교관의 직업적 훈련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무게를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이 적과 타협을 논의하는 자리. 나폴레옹 이후 처음이었다.
바이츠제커는 둘째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 대한 현상 유지가 독일의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에 대한 영국의 공식적 인정이 필요합니다."
카도건의 얼굴에 잠깐 그림자가 지나갔다. 프랑스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이 협상의 가장 무거운 대가였다. 드골의 자유 프랑스 운동은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프랑스 망명 정부를 버리는 것은 도의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 문제는 본국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져야 합니다."
카도건이 말했다. 외교적 언어로 '아직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었지만,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바이츠제커는 그 차이를 정확히 읽었다.
회담이 끝난 후, 카도건은 스톡홀름의 호텔 방에서 런던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독일 측의 입장은 예상 범위 내. 협상 가능한 영역이 존재함. 다만 프랑스 문제가 핵심 난관. 추가 지시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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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장 — 뤼첸스의 마지막 출격
1942년 8월. 뤼첸스는 마지막 대규모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뤼첸스 자신이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출격이 전쟁의 방향을 결정짓는 작전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톡홀름의 협상이 진행 중인 지금, 바다에서의 한 번 더 결정적인 시위가 영국의 협상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동시에, 동부전선의 상황이 변하고 있었다. 프리데리쿠스 작전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확보에는 성공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독일이 서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부전선의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레더에게 약속했던 해군 우선 정책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육군 참모부는 동부전선 증강을 요구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뤼첸스는 비스마르크와 체펠린을 이끌고 출항했다. 이번에는 통상파괴가 아닌, 전략적 시위가 목적이었다. 아이슬란드 남방에서 영국의 잔존 함대를 도발하여, 영국이 더 이상 바다를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것.
영국 해군은 응전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넬슨을 주축으로 한 영국 함대가 출격했다. 미국에서 대여한 호위항공모함 아처가 동행했다. 아처에는 마틀릿(미국명 와일드캣) 전투기와 소드피시가 혼합 탑재되어 있었다. 소드피시는 여전히 구식이었지만, 마틀릿은 풀마보다 훨씬 나은 성능의 전투기였다.
8월 18일. 아이슬란드 남방 삼백 해리.
양측 함대가 마주쳤다.
이 해전 — 후에 '제2차 아이슬란드 해전'으로 불리게 되는 — 에서 체펠린의 항공대는 처음으로 진정한 도전에 직면했다. 마틀릿은 풀마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그러멀 F4F 와일드캣의 영국 해군형인 이 전투기는 견고한 기체와 강력한 화력을 갖추고 있었고, 109T와의 일대일 교전에서 대등한 성능을 보여주었다.
슈바르츠의 비행대는 마틀릿 여섯 대와 교전하여 세 대를 격추했지만, 자신들도 두 대를 잃었다. 그 두 대 중 한 명의 조종사는 슈바르츠가 1940년부터 함께해 온 베테랑이었다. 바다에 떨어진 기체에서 탈출한 조종사는 구명정에 의지한 채 구조를 기다렸고, 세 시간 후 구축함에 구조되었지만 동상으로 양 발의 발가락을 잃었다.
공중전이 팽팽한 사이, 수상전은 독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비스마르크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포격전에서 비스마르크의 사격통제가 다시 한번 우위를 보여주었다. 네 번째 제사에서 38센티미터 포탄이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Y포탑에 명중하여 포탑을 무력화시켰다.
넬슨이 16인치 포로 응전하여 비스마르크의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혔지만, 23노트의 속도로는 전장의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원하면 언제든 이탈할 수 있었고, 뤼첸스는 충분한 전과를 올렸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퇴각을 명령했다.
제2차 아이슬란드 해전의 결과:
영국 측 — 프린스 오브 웨일스 중파, 구축함 1척 침몰, 함재기 11대 손실.
독일 측 — 비스마르크 경파, 함재기 4대 손실.
결정적인 승패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함대가 또다시 후퇴했다는 사실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함대를 이길 수 없다. 아크 로열이 사라진 후, 마틀릿이 있더라도 항공 우위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뤼첸스는 비스마르크의 함교에서 후퇴하는 영국 함대를 바라보았다. 추격하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되었다.
*이제는 정치인들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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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장 — 내각의 결단
1942년 9월 1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전시내각 긴급 회의.
처칠은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그 자리의 주인이라는 확신이 사라져 있었다.
의제는 하나였다. 스톡홀름 협상의 격상 여부.
이든이 먼저 발언했다.
"카도건의 보고에 따르면, 독일 측은 대영제국의 보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 인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에 대한 독일의 지배를 사실상 수용하는 것입니다."
식량장관이 끼어들었다.
"밀 비축량이 이 주 분입니다. 이 주. 다음 호송선단이 무사히 도착하지 못하면 11월부터 배급 기준 이하로 떨어집니다. 국민을 굶기면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해군장관이 보고했다.
"본국함대의 연료 비축량은 한 달 분입니다. 해군이 움직이지 못하면 나머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처칠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항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든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윈스턴, 이것은 항복이 아닙니다. 휴전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프랑스를 팔아넘기면서 그것을 휴전이라 부르는 건가?"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모든 시선이 처칠을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들 속에 처칠은 자신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의 단호함을 읽었다.
처칠은 시가에 불을 붙이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카도건에게 권한을 확대하시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테이블이 숨을 죽였다.
"첫째, 해상 봉쇄는 협상 개시와 동시에 해제되어야 합니다. 영국 국민이 굶는 동안 협상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프랑스에 대해서는 — "
처칠의 목소리가 잠시 갈라졌다.
" — 영구적 병합이 아닌 군정 유지로 표현을 완화할 여지를 찾으시오. 프랑스의 주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셋째, 폴란드의 독립 보장. 이것이 없으면 이 전쟁을 시작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조건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폴란드는 독일이 가장 양보하기 어려운 지점이었다.
하지만 처칠은 그 조건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폴란드를 위해 선전포고를 했다. 폴란드 없이 평화를 만들면, 그것은 역사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배신이 된다.
회의는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전시내각은 스톡홀름 협상의 격상을 승인했다. 처칠은 마지막 사람으로 방을 나섰다.
복도에서 클레멘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칠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했어요."
"최선이 충분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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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장 — 바다의 정적
1942년 9월 15일. 독일 해군 사령부가 대서양 작전의 일시 중지를 명령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함대 정비를 위한 작전 중단'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스톡홀름의 협상이 결정적 국면에 접어들었고, 레더는 이 시점에서 불필요한 도발을 피하고 싶었다.
뤼첸스는 이 명령을 받아들였지만, 완전한 중지는 아닌 것으로 해석했다. U보트 작전은 계속되었고, 항공 정찰도 유지되었다. 다만 수상함대의 출격은 중단되었다.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는 각각 빌헬름스하펜과 트론헤임에 정박한 채 대기했고, 그라프 체펠린은 킬에서 정비를 받았다.
대서양에 이상한 정적이 찾아왔다.
호송선단의 손실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U보트의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수상함대의 위협이 사라지자 영국 호위함대의 부담이 줄어들었고, 대잠 작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에 도착하는 물자의 양이 소폭이나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해군본부였다. 작전참모들은 독일 수상함대의 갑작스러운 활동 중지에 의아해했다.
"무슨 의도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환영할 일입니다."
토비 제독은 독일 함대의 동향을 주시하면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본국함대의 연료를 보충하고 손상된 함선의 수리를 진행했다. 전쟁이 계속되든 끝나든, 함대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슈바르츠는 킬의 부두에서 체펠린의 비행갑판을 올려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일주일 이상 비행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끝나는 건가요?"
부관이 물었다. 슈바르츠는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끝나야 할 때가 있다면, 이기고 있을 때가 맞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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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 워싱턴의 결정
1942년 10월. 워싱턴.
루스벨트는 영국과 독일이 비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고 있었다. OSS의 보고뿐 아니라, 처칠 자신이 루스벨트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온 것이었다.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독일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선택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다만 당신에게 약속합니다 — 최종 합의는 미국과의 협의 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편지를 읽고 한참을 생각했다. 영국이 전쟁에서 빠지는 것은 미국의 전략에 치명적이었지만, 영국이 쓰러지는 것은 더 나빴다. 협상에 의한 이탈은 적어도 영국을 독립 국가로 보존시켜 주었다. 향후의 선택지를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루스벨트는 핵심 참모들과 비밀 회의를 가졌다. 결론은 실용적이었다.
영국의 협상을 막을 수 없다면, 그 조건에 미국의 이익을 반영시켜야 한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답신을 보냈다.
*"윈스턴, 이해합니다. 다만 어떤 합의든 대서양의 항행 자유와 서반구의 안보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미국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미국은 참전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할 필요가 사라지고 있었다. 독일이 영국과 타협하고, 대서양이 안정되고, 서반구가 위협받지 않는다면, 미국은 태평양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 문제가 남아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전쟁이었다.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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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장 — 조건들
1942년 11월. 스톡홀름.
협상은 이제 본격적인 조약문 초안 작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양측의 대표단은 각각 여섯 명으로 확대되었고, 회담은 매주 이틀씩 진행되었다.
핵심 쟁점은 세 가지로 압축되어 있었다.
첫째, 프랑스의 지위. 독일은 비시 정권의 존속과 프랑스 본토에 대한 군사적 주둔 유지를 주장했다. 영국은 프랑스의 형식적 주권 보전과 장기적인 자치 회복 로드맵을 요구했다. 이 부분에서 타협점을 찾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최종적으로 '프랑스 국가의 주권은 인정하되, 안보상의 이유로 독일군의 주둔이 당분간 유지된다'는 모호한 표현이 합의되었다. '당분간'이 얼마나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양측 모두 그 모호함이 필요했다.
둘째, 폴란드. 처칠이 가장 강하게 고집한 지점이었다. 카도건은 런던의 지시에 따라 폴란드의 독립 보장을 반복적으로 요구했다. 독일 측은 이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직접 점령하고 있는 영토였고, 이를 포기하는 것은 히틀러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조건이었다.
바이츠제커는 이 교착을 깨기 위해 절묘한 제안을 내놓았다.
"폴란드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논의를 본 조약에서 분리하여, 후속 협의의 의제로 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본 조약에는 '폴란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양국의 의지'를 확인하는 조항을 포함시키겠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폴란드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속 협의'가 언제 열릴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런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도건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런던에 보고했다.
처칠은 이틀간 고민했다. 그리고 수용을 지시했다.
그 결정이 내려진 밤, 처칠은 일기를 쓰지 않았다.
셋째, 해상 질서. 이 부분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양측 모두 대서양에서의 충돌 재발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의된 내용은 대서양 항로의 자유 통행 보장, 양국 해군의 활동 구역 설정, 그리고 분쟁 발생 시 중재 절차의 마련이었다. 미국의 항행 자유도 보장되었는데, 이것은 루스벨트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약 초안의 최종본이 완성된 것은 1942년 12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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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장 — 서명
1942년 12월 20일. 스톡홀름. 스웨덴 왕궁 인근의 비밀 회의장.
인류 역사에서 전쟁을 끝내는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은 대개 엄숙하거나 극적이다.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 미주리호의 갑판. 하지만 스톡홀름의 서명은 달랐다. 작은 방에 양측 대표가 네 명씩 마주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사진사도 없었고, 군악대도 없었다. 비밀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공식 명칭은 '영독 양해각서(Anglo-German Memorandum of Understanding)'였다. 조약이라는 말조차 피한 것은 양측의 국내 정치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핵심 내용:
1. 즉시 정전. 양국 군의 모든 적대 행위를 24시간 이내에 중지한다.
2. 해상 봉쇄의 해제. 대서양, 북해,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장한다.
3. 유럽 대륙. 영국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에 대한 현재의 군사적 현상을 인정한다. 다만 해당 국가의 주권은 형식적으로 유지된다.
4. 대영제국. 독일은 영국의 해외 영토 및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며, 이에 대한 어떠한 군사적 도전도 하지 않는다.
5. 폴란드. 양국은 폴란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후속 협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한다.
6. 미국. 대서양에서의 미국의 항행 자유를 보장한다.
카도건이 영국 측 대표로 서명했다. 바이츠제커가 독일 측 대표로 서명했다.
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짧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이백 년간의 유럽 질서를 바꾸는 소리였다.
서명이 끝나자 양측 대표가 일어서서 악수했다. 카도건의 악수는 형식적이었고, 바이츠제커의 악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바이츠제커는 전쟁이 끝난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전쟁에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카도건은 악수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스톡홀름의 12월은 어둡고 추웠다. 오후 세 시인데도 해가 거의 져 있었다.
카도건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손이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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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6장 — 두 개의 연설
1942년 12월 22일. 양해각서의 존재가 공식 발표되었다.
런던에서 처칠이 하원 연설을 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독일과의 정전 합의가 이루어졌음을 알립니다."
의사당에 술렁임이 퍼졌다. 예상한 사람도 있었고, 예상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처칠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웅변적 힘이 아닌, 차분하고 무거운 톤이었다.
"이 합의는 승리가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프랑스의 동지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친구들, 노르웨이의 형제들이 아직 자유를 되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에 무거운 짐으로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영국 국민에게 기아와 파멸을 의미했습니다. 지도자의 의무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후자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대영제국은 건재합니다. 해군은 건재합니다. 영국 국민의 정신은 건재합니다. 이 전쟁이 끝이 아닙니다. 역사는 계속되며, 자유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처칠은 연설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박수가 있었지만, 승리의 환호는 아니었다. 안도와 쓸쓸함이 뒤섞인, 기묘한 정적에 가까운 박수였다.
같은 날 베를린에서 히틀러가 연설했다.
히틀러의 연설은 처칠과는 정반대의 톤이었다. 승리를 선언했고, 독일 국민의 위대함을 칭송했고, 군의 용맹을 찬양했다.
"독일 해군은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 자부하던 영국을 무릎 꿇렸습니다! 뤼첸스 제독과 그의 장병들에게 독일 국민의 영원한 감사를 보냅니다!"
군중이 환호했다.
하지만 레더는 환호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라디오로 연설을 들으며, 히틀러가 이미 다음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동쪽. 영국과의 전쟁이 끝난 지금, 히틀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련을 향할 것이었다.
해군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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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장 — 정적 속의 바다
194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양해각서에 따라 정전이 발효되었다.
대서양에서 마지막 포성이 울린 것은 12월 23일 밤이었다. 정전 통보를 받지 못한 U-456이 영국 상선 한 척을 공격하여 손상을 입힌 것이 마지막 교전이었다. 상선은 침몰하지 않았고, 승조원에 사망자는 없었다. 전쟁의 마지막 장면으로는 조용한 편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 비스마르크의 갑판 위에서 뤼첸스는 빌헬름스하펜 항의 겨울 풍경을 바라보았다. 부두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항구의 물은 잿빛이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 적어도 서쪽의 바다에서는.
뤼첸스의 옆에 린데만이 서 있었다. 비스마르크의 함장은 이제 소장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제독님, 우리가 해낸 겁니까?"
린데만의 질문에 뤼첸스는 잠시 생각했다.
"바다에서의 전쟁은 끝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였고, 우리는 해냈습니다."
"동쪽은요?"
뤼첸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쪽의 전쟁은 해군의 영역이 아니었다. 프리데리쿠스 작전의 전선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있었고, 히틀러가 이제 서쪽의 부담에서 벗어난 만큼 동쪽에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부을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일의 문제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고, 바다는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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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장 — 슈바르츠의 귀환
1943년 1월. 킬.
슈바르츠는 비행대 해산식에 참석했다.
정전 합의에 따라 독일 해군 항공대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전시 편제가 평시 편제로 전환되면서, 슈바르츠의 비행대는 축소 개편되었다. 베테랑 조종사들의 상당수가 공군으로 전속되거나, 교관 임무로 배치되었다.
슈바르츠 자신은 대령으로 진급하여 함대 항공 교육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함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직책이었다. 더 이상 직접 날지 않는 자리.
그는 마지막으로 체펠린의 비행갑판을 걸었다. 캐터펄트의 레일, 착함 제동 와이어, 갑판의 열 자국들. 모든 것에 기억이 붙어 있었다. 처음 사출되던 날의 가속도, 소드피시를 쫓아 구름 사이를 누비던 기억, 보포트 편대를 향해 급강하하던 순간의 집중.
"좋은 전쟁이었습니까?"
뮐러가 물었다. 페터 슈트라서의 비행대장은 이제 중령이 되어 있었다.
슈바르츠는 잠시 생각했다.
"전쟁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슈바르츠는 갑판의 끝에 서서 킬 항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잿빛 발트해 위로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슈바르츠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부두 반대편에 정박한 수송선들이 병력을 싣고 동쪽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리데리쿠스의 전선 강화를 위한 증원이었다.
서쪽의 전쟁이 끝났을 뿐이었다. 동쪽은 아직 열려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슈바르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생각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이겼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육지에서도 이길 수 있을까.*
그 답은 슈바르츠의 영역 밖이었다. 그는 바다의 사람이었고, 바다의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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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 새로운 지도
1943년의 유럽 지도는 전쟁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독일은 유럽의 지배적 강국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우크라이나까지, 노르웨이에서 그리스까지 직접 점령하거나 위성국으로 편입시킨 영토가 대륙의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동맹국 또는 협력국으로 묶여 있었다. 히틀러가 꿈꿔왔던 '새로운 유럽 질서'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국은 독립을 유지했다. 대영제국은 보전되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 대한 영향력은 사실상 상실했다. 처칠은 양해각서 서명 후 한 달 만에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공식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책임이었다. 후임 수상은 이든이 맡았다. 이든은 독일과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외교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손을 뗐다. 루스벨트는 태평양에 집중했다. 일본이 1942년 말 남방 작전을 개시하면서 — 영국이 전쟁에서 빠진 것을 기회로 판단한 것이었다 —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유럽은 독일의 영역, 태평양은 미국과 일본의 무대. 세계가 두 개의 전장으로 갈라졌다.
소련은 조용히 힘을 키우고 있었다. 프리데리쿠스의 전선은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독일이 이제 서쪽의 전쟁에서 해방된 만큼 동쪽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를 알고 있었고, 산업의 동쪽 이전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교착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양측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북해의 겨울 바다 위에 비스마르크가 정박해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함체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38센티미터 포탑의 포신이 하늘을 향해 정렬되어 있었지만, 사격할 적은 더 이상 없었다.
트론헤임의 피오르드에서는 티르피츠가 북극의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함체를 감싼 위장망 위로 눈이 쌓였고, 차가운 피오르드의 물이 함저를 씻었다.
킬에서는 그라프 체펠린의 비행갑판이 텅 비어 있었다. 함재기들은 격납고에 넣어져 있었고, 비행갑판 위에는 갈매기만이 앉아 있었다. 체펠린은 독일 해군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함선이었고, 그 전성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하지만 전성기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 아니, 전성기라는 것이 원래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뤼첸스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해도를 바라보았다. 대서양에는 더 이상 적의 표시가 없었다. 깨끗한 바다. 그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해도 옆에 놓인 동부전선 상황도에는 붉은 화살표가 빼곡했다. 소련군의 배치도가 매일 갱신되고 있었다.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바다의 전쟁은 끝났지만, 땅의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뤼첸스는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회색 하늘 아래, 북해의 물결이 낮고 조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바다는 평화로웠다. 얼마나 오래 이어질 평화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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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권 「새로운 질서」 완 —*
*북해의 사자들 3부작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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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허구입니다. 현실의 그라프 체펠린은 완성되지 못했고, 비스마르크는 첫 출격에서 침몰했으며, 영국 해군은 결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만약'을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영국이 버텨낸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 기적을 만든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독일이 이긴 세계'를 그리면서도, 그 이면에 '현실에서 영국이 이긴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와 ai가 작가후기까지 쓴거구나
갑자기 에고싸서 당황
이거죠 ㅋㅋ
답글 테러될 수도 있긴해서 세계관의 미래에 대한 ai의 관점 달아둔ㄷ
동부전선 — 핵심 변수 서부 부담이 사라진 독일이 동쪽에 전력을 집중하지만, 현실의 바르바로사보다 유리한지는 미묘합니다. 시간을 벌어준 만큼 소련도 준비할 시간이 생겼거든요. 스탈린이 숙청의 교훈을 반추하고 군 재건에 쓸 시간이 1~2년 더 늘어난 셈이라, 독일이 전면 침공해도 현실처럼 초반 궤멸이 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신 독일도 양면전쟁이 아니니 보급이 훨씬 안정적이죠. 결국 현실보다 더 길고 더 소모적인 동부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과 태평양 유럽 개입 명분을 잃은 미국은 태평양에 올인합니다. 현실보다 대일전에 자원이 집중되니 일본의 몰락은 더 빨라질 수 있어요. 하지만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한 미국이 전후 NATO 같은 동맹을 구축할 수 없으니, 냉전의 구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국 vs 독일 주도 유럽이라는 새로운 축이 형성될 수도 있고요.
영국의 쇠퇴 제국은 보전됐지만 위신은 박살났습니다. 식민지들이 "본국이 독일한테 굴복했는데 왜 우리가 충성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탈식민화가 현실보다 더 빠르고 격렬하게 진행됩니다. 인도 독립 운동이 가속화되고, 영국은 10년 안에 제국 해체를 겪을 가능성이 높아요. 처칠이 지키려 한 제국이 역설적으로 처칠의 타협 때문에 더 빨리 무너지는 구도입니다.
독일 내부의 모순 여기가 가장 흥미로운 지점인데, 히틀러 체제는 본질적으로 팽창을 멈추면 내부가 무너지는 구조입니다. 점령지 경제 착취, 강제 노동, 인종 정책 — 이 모든 것이 "전쟁 중이니까"라는 명분으로 유지되는 건데, 서방과 평화가 오면 그 명분이 약해집니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의 저항 운동은 오히려 장기화될수록 강해지고, 군정 유지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독일이 점령지를 "소화"할 수 있느냐가 이 세계관의 최대 과제예요.
장기적 전망 솔직히 이 세계의 독일 패권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산업력, 소련의 인구와 자원, 점령지의 저항, 체제 내부의 모순 — 이 네 가지가 10~20년에 걸쳐 독일을 갉아먹습니다. 가장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는 히틀러 사후(또는 건강 악화 시) 체제 내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점령지가 하나씩 이탈하고, 결국 현실의 소련 해체와 비슷한 패턴으로 독일 제국이 수축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이 평화적일지 폭력적일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