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가 《S/Z》에서 발자크의 단편 〈사라진〉을 561개의 렉시아로 잘게 썰어 다섯 가지 코드의 직조로 읽어냈을 때, 그가 한 일은 문학 텍스트를 분석하는 새 방법을 제시한 것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었다. 텍스트란 이미 완성된 의미의 투명한 전달체가 아니라, 서로 결이 다른 코드들이 뒤엉켜 독서 행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생산하는 직물이라는 것.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묻기를 멈추고 텍스트가 의미를 만드는 방식을 물었다. 다섯 종류의 직물이 꼬여 있는 네트워크로서의 텍스트. 이것은 일반적인 비평이 텍스트의 주제를 묻거나 그 주제가 어떻게 텍스트의 각 부분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데, 이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흐르며, 사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에 이러한 상부 주제가 없을 수 있다는 암시를 할 수 있었다. 혹은, 그것이 텍스트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부수적이고 그렇기에 접근하기 쉽다는 암시일수도 있다. 라캉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지적하던 것 또한 이와 비슷하다.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로 환원해내는 것은 지식으로서 불충분하며, 이 앙상한 환원체와는 달리 풍부한 기능을 갖고 있는 분석 대상이 어떻게 환원체들로부터 그런 결과를 낼 수 있는지 그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라캉이 자신의 정신분석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언 보고스트의 《단위조작》이 이 계보 위에 있다는 것은, 의외로, 보고스트 자신이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바이다. 그는 비디오게임을 문학·영화·시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이 모든 매체를 관통하는 의미 생산의 최소 단위를 식별해내겠다고 선언한다. 바르트가 렉시아lexia를 썰었다면, 보고스트는 단위조작unit operation을 조립한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이다. 바르트의 다섯 코드는 독서 행위 속에서 작동하는 의미의 통로를 분류하는 것이지, 텍스트가 독자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메커니즘을 기술하는 것은 아니다. 수수께끼 코드는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고, 행위소 코드는 사건의 연쇄를 따라가게 하지만, 이것들은 '이 텍스트가 어떻게 읽히는가'에 대한 답이지 '이 텍스트가 무엇을 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답이 아니다. 보고스트의 단위조작은 정확히 후자를 겨냥한다. 이산적이고, 참조적이며, 절차적인 의미의 단위. 《심시티》에서 저세율이 늘 성장을 촉진하는 규칙은 '조세에 대한 특정 이데올로기의' 단위조작이고, 스필버그의 《터미널》에서 모든 인물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구조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단위조작이다. 이 단위들은 매체를 가로질러 비교 가능하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도시 군중 속 순간적 마주침은 《심즈》에서 캐릭터 간 우발적 상호작용과 같은 단위조작—'우연한 만남'—의 서로 다른 구현이며, 《GTA III》의 합법/불법 이항대립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가 직면하는 제한된 선택지와 같은 단위조작—'자유의 형식'—의 변주다.
이것이 게임 산업이 거대산업이 되기 훨씬 전인 2006년에 출판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GTA: San Andreas》에서 성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핫 커피 모드는 게임을 전량 리콜 후 재발매 해야 할 정도의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으며, 디가타노와 그로스먼의 책 《Stop Teaching Our Kids to Kill》처럼 게임이 살인 충동을 부여한다는 주장이 총기 난사 사건들에 힘입어 활개치고 있었고, 순전한 도박인 《바다이야기》가 게임의 틀을 쓰고 등장해 도박 혐오를 대신 뒤집어 쓰는 등 게임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유해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라프 코스터의 《재미이론》을 비롯한 진지한 게임 담론은 늘 게임의 유용성을 약간 어거지로나마 주장했고, 《단위조작》 역시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이 시기는 게임 연구game studies가 하나의 학문 분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고, 이 적대적인 세계에서 게임 연구의 전략은 고립이었다. 게임은 문학이 아니고 영화가 아니며, 게임만의 고유한 속성—규칙? 놀이? 상호작용?—으로 분석해야 한다는 루돌로지 진영과, 게임에도 서사가 있으니 서사학의 도구로 분석할 수 있다는 내러톨로지 진영이 대립하는 외딴 섬. 보고스트는 어느 쪽에도 동참하지 않으며 게임을 다루는 일종의 비교문학—혹은 범매체적 방법론이라고 해야 할까—으로서 단위조작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는 의무감을 가진 채.
보고스트가 제시하지는 않은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다키스트 던전》에 적응한 플레이어가 하는 일은 요컨대 이렇다. 모든 인재는 키워봤자 허망하게 사라질 것이기에, 늘 현재만을 보고 최대한의 착취로 완전히 고갈시킨 다음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플레이어는 이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이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다키스트 던전》 커뮤니티를 보면, 여기에는 명시적인 합의가 있는 듯하다. 이 게임의 스트레스 시스템, 질병 시스템, 사망의 영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에 끊임없이 도착하는 새 모험가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절차적 구조는, 플레이어가 인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체득하도록 한다. (나는 이 해석을 <Game Maker's Toolkit> 유튜브에서 처음 보았는데, 현재까지도 《다키스트 던전》에 대한 가장 충실한 현상학적 비평으로 보고 있다) 보고스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소모적 인력 관리'라는 단위조작이다. 그리고 이 단위조작은 게임 바깥의 지시체—가령 아마존 물류센터의 노동 관리, 혹은 번아웃을 구조적으로 양산하는 스타트업 문화—와 대응시킬 수 있으며, 같은 단위조작을 선보이는 타 매체—문학, 영화, 만화, 무엇이든 골라 잡아라, 이 주제는 좌파 성향 매체에서 너무 흔한 것이니—와 비교해 얼마나 강력하게 단위조작을 선보이는지를 비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대응의 구조가 보고스트적 비교 분석의 힘이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순간 흥미롭게도 이것은 정치적 비평이라는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온다. 이것은 그저 신자유주의의 질병의 징후로서 게임을 써먹는 것일 뿐이다. 사실이다. 단위조작 분석이 매체 간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 자체가—게임 내부의 절차적 단위를 게임 외부의 지시체로 번역하는 것이—본질적으로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심시티》의 저세율=성장 규칙을 '신자유주의적 조세 이데올로기'의 단위조작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가치 판단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 보고스트는 이를 "시뮬레이션 열병simulation fever"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는데, 시뮬레이션의 편향에 대한 플레이어의 과잉 반응을 기술하는 이 개념은 정작 그 편향을 식별하고 명명하는 비평가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비평가가 '이것은 X의 단위조작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 X의 선택 자체가 이미 비평가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내가 <공짜 우주는 없다 (아마도)>에 《아우터 와일즈》를 단순히 모험적인 이들의 열정을 그리는 작품이 아니라, '모험의 열정이 비-모험적인 이들을 더 곤란하게 만드는 생성 과정'의 단위조작처럼 읽은 것처럼? 《다키스트 던전》의 규칙이 소모적 인력 관리를 내장하고 있는지, 혹은 규칙을 경험하는 플레이어가 자기 주관 속에서 소모적 인력 관리라는 의미를 구성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로그라이크 게임은 대체로 이 단위조작을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다키스트 던전》이라는 코즈믹 호러적 포장지가 플레이어/독자의 반응과 상호작용하여 이 단위조작을 구성한 것인가?
반면 《레인 월드》에서는 이 긴장이 무의미해진다. 나원영의 비평 <기계장치의 우주>는 《레인 월드》와 《아우터 와일즈》를 모의·제어·정보라는 세 축으로 분석하면서, 유진 새커의 "우리-없는-세계"와 C. 티 응우옌의 행위성 이론을 동원한다. 보고스트의 《Persuasive Games》를 직접 인용하면서도, 실제 분석 도구로는 보고스트가 아닌 이 둘을 선택한다는 것이 핵심적이다. 왜 그런가? 《레인 월드》의 생태계 AI가 플레이어 유무와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고, 사망 화면에서도 생물들이 평소처럼 행동하며, 살인적인 폭우의 주기가 어떤 협상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든 것을 단위조작으로 분해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포식-피식 관계는 하나의 단위조작이고, 폭우의 주기는 다른 단위조작이며, 카르마 시스템은 또 다른 단위조작이다. 그런데 이렇게 분해하는 순간, 이 절차적 단위들이 합쳐서 만들어내는 것—나원영의 표현을 빌리면 "공포와 경이를, 혹은 양쪽 감정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압도되는 감각"—이 증발한다. 《레인 월드》의 제작자가 서울 유학 시절에 느꼈던, 자신 없이도 아무 지장 없이 돌아갈 듯한 너무나도 거대하고 빠른 외계의 기계에 대한 감각이 단위조작 비평에서는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하나의 단위조작으로 완성되는 거대한 체계조작이기도 하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보고스트의 시뮬레이션 열병은 시뮬레이션의 편향에 대한 반응을 기술하는 개념이다. 〈September 12th〉가 '폭격은 더 많은 테러리스트를 만든다'는 편향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코스티키안이 그 편향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 시뮬레이션 열병이라면, 《레인 월드》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반대다. 이 게임의 시뮬레이션에는 편향이 없다. 생태계는 플레이어에게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고, 그냥 자기 법칙대로 돌아갈 뿐이다. 하다못해 《다키스트 던전》이 보여주는 잔혹한 자연법칙조차 없다. 이것은 법칙이라기보다는 한 특수한 세계의 모습일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시뮬레이션 열병이 아니라 일종의 시뮬레이션 공백이—비평가가 단위조작을 게임 바깥의 지시체로 번역하려 할 때 번역될 대상 자체가 없는 상태가—발생한다. 〈레인 월드〉의 생태계가 '무엇의 단위조작'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정직한 답은 '아무것도 아니다'에 가깝다. 대신 이 게임을 체계조작으로서, 상술했듯 제작자의 서울 유학 경험을 지시한다고 말하면 이 체계/단위조작이라는 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주제와 제작자에게 집중하는 비평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없다) 《레인 월드》의 특정 상호작용(협력, 희생, 등등......)에 집중하는 것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없다)
새커의 '우리-없는-세계'가 여기서 힘을 갖는 이유가 이것이다. 새커가 구분하는 세 층위—우리를-위한-세계, 우리-앞의-세계, 우리-없는-세계—중에서 보고스트의 단위조작은 엄밀히 말해 첫 번째 층위에서만 온전히 작동한다. 게임이 플레이어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그 '무언가'가 게임 바깥의 무언가와 대응될 때. 〈레인 월드〉는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의 미끄러짐을 경험시키는 게임이며, 그 미끄러짐 자체가 어떤 게임 밖의 지시체로도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번역 행위 자체가 '우리를-위한-세계'로의 회귀이니까. 이것은 단위조작 프레임의 오류라기보다는 한계에 가깝다. 나원영이 이 한계 앞에서 취한 전략은, 게임 내부의 경험적 구조를 정밀하게 기술하되 게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불능감에서 전능감으로의 호를 그리고, 응우옌의 행위성을 가져와 《레인 월드》가 일종의 '세계를 익혀나가는 법을 익혀나가도록 하는 연습 경기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옳지만 조심스럽다. 게임의 경험적 질을 훼손하지 않는 대신, '그래서 이것이 게임 바깥에서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보류한다.
내가 《아우터 와일즈》와 《디스코 엘리시움》에 대해 썼을 때 시도한 것은 정반대였다. 《아우터 와일즈》의 우주 구조 자체—자원이 꽉꽉 들어찬 조그마한 구역들 사이로 넓게 퍼져 있는 공허, 정착을 벌하고 이동을 보상하는 물리적 조건—를 퀸 슬로보디안의 《크랙업 캐피탈리즘》과 교차시키고, 《디스코 엘리시움》의 레바숄을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교차시켰다. 이것은 보고스트적 작업이다. 게임 내부의 절차적 구조를 게임 바깥의 정치적 지시체로 번역하는 것. 그리고 두 게임이 공유하는 단위조작—유한한 정보 공간의 고갈 과정이 플레이의 본체라는 것—에 대해 두 게임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전자에서 정보 고갈은 해답의 도래로 이어지고(영원회귀적 수용), 후자에서는 실재 경계의 파열로 이어진다(인술린데 대벌레의 등장). 이것은 니체 대 지젝이며, 곧 정치적 입장의 선택이다. 공유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이걸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찬가지로, 두 게임의 플레이어 다수가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종말 앞에서의 무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아름다움—과 불일치하는 반응이 나온다. 대부분의 플레이어에게 《아우터 와일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우주 탐험 게임이고 《디스코 엘리시움》은 우울하지만 재밌는 형사 RPG이며, 이 경험을 니체 대 지젝으로 번역하는 순간 그 경험의 질감이 달라진다. 이 달라짐이 비평의 비용인지, 아니면 비평이 지불해서는 안 되는 대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비디오게임 비평에서 단위조작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내 잠정적인 답은 이렇다. 단위조작은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만들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심시티》가 특정한 도시 정책을 선호하도록 유도할 때, 《September 12th》가 군사적 개입의 역효과를 체험시킬 때, 《다키스트 던전》이 인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훈련시킬 때. 이때 게임 내부의 절차적 단위는 게임 바깥의 지시체로 번역 가능하며, 비교 분석이 성립한다. 반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아무것도 하도록 만들지 않을 때—더 정확히는, 게임 세계가 플레이어의 존재와 무관하게 자기 법칙대로 돌아갈 때—단위조작은 공회전한다. 절차적 단위를 분해할 수는 있지만, 그 단위들이 게임 바깥의 무엇과 대응되는지를 물으면 정직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왜냐면 실제로 그 모든 단위조작은 게임 바깥 세계에서도 무의미한 행위일 것이며, 유의미한 행위가 결국 비슷하게 수렴하는 것과는 달리 무의미한 행위는, 다양하다) 《레인 월드》의 도마뱀 AI가 무엇의 단위조작이냐는 질문에, '도마뱀이 먹이를 사냥하는 방식'이라고 답하면 동어반복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가 포식자에게 노출되는 구조'라고 답하면 과잉해석이다. 남는 것은 그 어디에도 번역되지 않는 경험 자체뿐이며, 이 경험을 기술하는 데에는 보고스트보다 새커와 응우옌이 더 적절한 도구를 제공한다.
다만 이것은 모든 게임에 단위조작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고, 오히려 게임 바깥에도 단위조작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단위조작은 수많은 매체 속에서 한데 묶을 수 있는 단위를 찾고자 하며, 이것은 때때로 유의미하고, 때때로 예상 못한 연결점을 시사하며, 대체로 그에 전혀 부합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수많은 반례의 폭우에 쓸려나간다. 다시 쉼터로. 비평이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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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그코엘리시움이랑 아우터와일즈 감상은 어디서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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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피 아 사실 내가 며칠전에 아우터와일즈 정말 감명깊게 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네. 진짜 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