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야한 건 사형

호기심이 사람을 죽인다는 속담이 있다. 지나친 호기심은 도리어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가 담긴 조언인데, 지금의 내 꼴에 딱 들어맞았다.

다른 학생들은 전부 하교하고도 남았을 시각, 나는 교장실에서 교장과 단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천천히 회상했다.



*



루시아드 아카데미에 입학한 첫날, 나는 일정이 끝났음에도 아직 하교하지 않고 교내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500년 전통을 지닌 세계 굴지의 아카데미라는 명성에 걸맞게 부지는 드넓었고, 그만큼 구경할 거리도 많았다. 전생, 그러니까 남자였을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결국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볼 아카데미 부지를 굳이 한 바퀴 순회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배경 삼아 나름의 향취를 느끼며 교정을 둘러보는 와중이었다. 나는 어딘가로부터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옴을 눈치챘다.

눈 앞에 상태창이 뜬 건 그때였다.

[루시아드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500년의 길고도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에는 그에 걸맞게 수많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모든 비밀들을 파헤치고 아카데미의 정복자가 되어보세요!]

[퀘스트 발생 : 별관을 배회한다는 괴물의 정체를 밝혀내십시오.]

갑작스레 반투명한 창이 떠오른 상황에 나는 당황했다.

…이게 뭐지?

누가 내게 환상 마법으로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의심부터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환상 마법은 애초에 비주류일뿐더러 이렇게 문자나 숫자 따위를 정확히 보이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환상 마법을 제외한다면 이능 정도가 선택지에 남았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내게 이능을 사용했거나, 그도 아니라면 내가 새로이 발현한 이능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이능은 현대 마법학으로도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으니 뭔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반투명한 창의 정체를 고민하는 와중 내 몸은 나도 모르게 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호기심이 많았다. 때때로 그 호기심이 지나쳐 공포마저 망각할 정도로. 창에 써진 내용 중 '괴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호기심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고, 결국 나는 머지않아 다소 외진 곳에 있는 별관에 다다랐다.

과연 별관으로 향하니 삐그덕대는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탐색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확실히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설마 진짜 괴물인가. 살짝 겁나긴 했지만 아카데미의 보안을 믿기로 했다. 명색이 세계 굴지의 아카데미인데 괴물 따위의 침입을 용납할 리 없잖아.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소리의 근원을 향해 움직였다. 소리는 4층의 어느 교실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교실의 문을 덜컥 열었고.

입학식에서 보았던 선생 둘이서 관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뭣."



*



"그래, 자네가 김민수 선생과 박지현 선생의 관계를 목격한 학생이라고?"

내 맞은편에 앉은 천종서 교장이 물었다. 썩 부드러운 태도였으나 나는 긴장을 놓지 못했다. 교장과 입학 첫날부터 단둘이 오붓한 만남을 가지게 된 이유부터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탓이다.

물론 내 잘못은 없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게다가 내 앞에 있는 천종서 교장은 대한민국에 단 셋, 전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일곱뿐인 6성급 마법사였다. 그쯤 되면 존재 자체가 걸어다니는 핵병기다. 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을 게 분명한 6성급 마법사 앞에서 태연히 있을 정도로 담대하지 못했다.

"…네. 공교롭게도요."
"허허.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우선 첫날부터 못 볼 꼴을 보게 해서 미안하네. 내 대신 사과하지."

이로써 나는 6성급 마법사를 고개 숙이게 만든 학생이 되었다. 세상에 이 타이틀을 지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양손에 꼽지 않을까. 그다지 기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전 괜찮습니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니까요."

교장이 내 말을 듣고는 짓궂은 투로 물었다.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꽤 격렬했다 들었는데? 왜, 야한 건 사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건…."

차마 교장 앞에서 '아, 사실 그건 블루 아카이브라는 게임에 나오는 시모에 코하루라는 캐릭터의 대사인데요, 그 꼴을 보자니 갑자기 생각나서 한 번 따라 해본 거예요!' 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해명을 포기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프라이버시 따위 개나 주라는 듯 피아 식별 없는 게 현장 기억 마법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뭐, 자네는 정말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공무를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마냥 쉽게 넘어갈 수만도 없는 문제라서 말이지. 안타깝지만 두 사람은 원칙대로 퇴직 처리될 게야."
"그걸 제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나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네."

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비록 아카데미가 일반 학교와 다소 동떨어진 감성을 지녔다고는 해도 여전히 교육 기관이다. 학교에서 관계한 교사들의 소문이 퍼지면 자연히 학부모들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카데미가 이래저래 시끄러워질 것이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학생들 중 집안이 거물인 경우가 적잖게 있으므로 더더욱이나.

아무리 천종서 교장이 6성급 마법사고 루시아드 아카데미 교장직이 지닌 바 권위가 상당하다고는 하나 결국 따지고 보면 공무원이다. 그리고 공무원은 일이 귀찮게 꼬이는 걸 지독히 싫어한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겨놓지 않으려 할 정도로.

"제가 입을 다물길 원하시는 건가요?"
"물론 맨 입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야. 교장의 권한으로 자네에게 1학년 출입 금지 구역의 입장 허가, 그리고 자그마한 아티팩트 하나를 내주도록 하지. 어때, 썩 괜찮은 제안이지 않나?"

이 말인즉슨 나를 공범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소리다. 내게 금품을 먹이는 대가로 입을 다물게 하고, 혹여나 추후 두 선생의 퇴직 경위를 캐묻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켕기는 구석이 있어 함부로 폭로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눈치챘다 한들 내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6성급 마법사는 할 수 있는 것이 할 수 없는 것보다 많은 존재였고, 정신 조작 또한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제안을 거절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제안이 천종서 교장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온건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신입생에 대한 교장으로서의 최대한의 배려가 담긴 제안.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도록 하죠."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지못해 교장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좋아, 이로써 계약은 체결된 거네. 약속한 보상은 내일 중으로 보내도록 하지. 그럼, 이만 가봐도 좋네. 오늘 하루 정말로 고생 많았어."

영락없이 교사간 불건전 이성 교제 은폐 사건의 연루자로 전락해버렸다.



*



피곤하디 피곤한 하루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상태창이 다시 튀어나온 것도 그때였다.

[이번 비밀은 아카데미의 수많은 비밀들 중에서도 아주 사소하고도 깜찍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명 또한 대단히 간단했죠. 하지만 아카데미의 모든 비밀이 이와 같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괴물이 있을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경각심 없이 다가간 것은 대단히 경솔한 행위였습니다. 허나, 결과는 과정보다 우선되는 법이죠.]

[축하합니다! 당신은 별관을 배회하는 괴물의 정체를 성공적으로 해명해 냈습니다. 그 결과 교장과의 커넥션을 만들고 귀중한 아티팩트 또한 약속받은 데다가 출입 금지 구역의 입장 허가까지 받아냈군요. 이로써 당신은 루시아드 아카데미를 보다 자유로이 누빌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 : 푸른 안개, 임시 통행증]

내용이나 정체는 둘째치고 일단 보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따지고 보면 오늘 내가 못 볼 꼴을 겪은 것도 이 창 때문이잖아. 그런 주제에 내 행동에 뭐라 훈수질 두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하지만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니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안개. 정황상 교장이 내게 주기로 한 아티팩트의 명칭으로 보이는 단어. 임시 통행증이야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니 그렇다 쳐도 아티팩트는 각기 고유의 명칭을 지닌다. 상태창은 내가 받게 될 아티팩트가 무엇인지 이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이름을 대놓고 못 박았다.

그 형태가 워낙에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상태창과 유사하기에 상태창이라 칭하고는 있지만 실상 이것이 상태창인지, 아니면 그 외의 무언가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상태창의 정체는 뭐지? 그리고, 상태창에서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아카데미는 대체 뭐하는 곳이지?



2화 - 동료가 돼라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카데미에 등교했다.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긴 하다.

그렇다고 기껏 들어온 아카데미를 멋대로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루시아드 아카데미는 일단 졸업만 하면 그 졸업장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현대 사회에서 절대적인 입지를 자랑한다. 그걸 포기하기엔 기껏 입학한 게 아쉬워진다.

게다가 루시아드 아카데미는 입학하기가 힘들 뿐이지, 일단 들어오고 나면 어지간한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무난하게 졸업한다. 당장 지난 10년을 돌이켜 봐도 퇴학자가 두 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루시아드 아카데미에서 퇴학자가 나온다? 그것도 선생 둘이 퇴직한 시기에 겹쳐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그럴 바에야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아카데미 다니는 게 낫다.

반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아직 이틀째라 그런지 확실히 애들끼리 서먹서먹한 게 느껴진다. 일주일만 지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해지겠지만.

그건 그렇고 이제서야 두 번째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음이 실감된다. 학교를 두 번이나 다니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어쩐지 감회에 젖어 교실을 둘러보았다.

[퀘스트 발생 : 동급생 '박준'이 지닌 이능의 정체를 밝혀내보세요!]

[퀘스트 발생 : 동급생 '이하은'의 가문이 은폐한 진실을 파헤쳐보세요!]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감상을 깨는 이물질이 눈앞에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상태창은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얌전히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왜,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

원래부터 넘쳐나던 호기심이다. 아직 상태창에 대해 잘은 몰라도 아카데미의 각종 비밀들을 이렇게 내게 가져다준다면 적어도 심심할 일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는 해도 동급생들의 비밀까지 가져올 거라는 생각지 못했지만.

그 내용도 내용이다. 어제 나타났던 퀘스트에 비해 목표하는 바가 훨씬 또렷이 제시되었다. 비밀을 밝혀내라고는 하나 이미 상태창에서 알려준 대략적인 내용만으로도 절반쯤은 까발려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와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나타난 이유가 뭘까.

…근데 박준이 누구지?

이하은은 안 봐도 알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법 명가의 장녀이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각종 미디어에 노출된 탓에 그 얼굴도 익히 알았다. 내 앞자리에 앉은 수려한 외모의 흑발 여학생.

하지만 박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이능은 마법이나 검술의 재능보다도 훨씬 희귀하니 동급생 중에 이능 보유자가 있다면 알 법도 한데 어째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다.

이능의 정체를 밝혀내라는 걸 보면, 이능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건가?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이능은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은 만큼 타인의 탐지도 불가능하니까. 스스로 나서서 밝히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능을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아무리 사소한 이능이라도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가장 자그마한 이능조차 어지간한 마법의 신비를 가볍게 능가한다.

루시아드 아카데미에 입학한 시점에서 관련 업계로 진출할 생각인 걸 텐데 감추었을 때의 메리트를 모르겠다. 거기에 이능을 숨겼음에도 루시아드 아카데미의 입학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도 신경 쓰이고….

…아. 얘구나.

다행히 찾아 헤맬 필요는 없었다. 상태창이 마치 퀘스트 NPC를 표시하는 것처럼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으니까.

멀리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가까워서 상태창의 위치가 달라졌음을 자각하지 못했던 거지.

박준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었다. 여느 무투 계열 지망생들처럼 적당히 훤칠하고 적당히 번듯하게 생긴 남자아이.

퀘스트의 당사자 둘이 각자 앞자리와 옆자리라.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가까워서 좋네.

아직까지 말을 걸어본 적은 없지만 앞으로 차차 가까워지면 되겠지.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상태창에서 보여진 내용에 따르면 둘 다 아주 흥미로운 탐구 대상 같았으니까.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딱 좋았다.



*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담임이 들어왔다.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 마법진 단순화 연구로 관련 업계에 파장을 몰고 온 고전마법학의 권위자로 기억하고 있다.

"일단 출석을 부르기 전에 미리 전달해야 할 사항이 있어. 원래도 학기 초에는 어수선하지만 올해는 특히나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학사 일정이 좀 꼬였거든."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드러났다.

…음.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괜히 나 때문에 일거리가 많아진 건가.

아니, 아니지. 잘못한 건 학교에서 이상한 짓을 한 그 작자들이다.

나는 단지 그 사실을 학측에 고발했을 뿐 아니던가. 교육자라는 양반들이 솔선수범해도 모자랄 판에 불건전 이성 교제를 나서서 장려하는데 퇴직시키는 게 맞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래서 오늘은 일정을 조금 바꿔서, 동아리 활동에 대한 안내가 우선될 예정이야."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자기합리화가 내면에서 오가는 와중 담임의 입에서 오늘의 일정이 고지되었다.

흠, 동아리 활동이라.

루시아드 아카데미가 학생 자치 활동에 신경씀은 유명했다. 그 일환으로 동아리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굉장히 컸다.

물론 동아리 활동은 어디까지나 동아리 활동이지만.

인맥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다들 고등학생이다. 그딴 복잡한 계산보다는 흥미 위주로 동아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재능은 보장된 인재라 가릴 필요가 딱히 없는 것도 이런 풍조에 한몫했고.

그나저나 어느 동아리를 들어가야 할까.

입학 전에 대충 알아보긴 했으나 그다지 관심을 크게 가지진 않았다. 동아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암만 크다 한들 나는 기본적으로 사교성이 그다지 없는 편이었다. 어차피 졸업은 알아서 하게 되어 있으니 적당히 시간이나 떼우다가 나올 작정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만 할 두 사람이 생겼다. 각기 다른 동아리에 들어가더라도 친해질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소속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친해지는 지름길 아니겠는가.

게다가 가뜩이나 사교성이 안 좋은 나다. 동아리 활동이라도 함께 하지 않는 이상 가까워지기란 요원한 일이다.

…호기심은 많은 주제에 사교성은 떨어지다니. 모순된 성격이지만 어쩌겠나. 원래부터 이런 인간인 것을.

하여간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다. 모자란 사교성으로나마 어떻게든 얘기를 나눠보는 수밖에.



*



비록 지금은 여자아이의 몸이 되었다지만 그 자아는 여전히 남성의 것이었다. 대하기 쉬운 상대를 선택하자면 역시 남자 쪽이었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야."
"응?"

박준도 내 쪽을 보았다.

으음, 벌써부터 어색하다. 그나마 만만할 뿐이지 남자든 여자든 고등학생 상대로 할 말이 그다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적당한 주제로 적당히 분위기를 풀어나가며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수순은 내게 있어 이상론에 불과했다.

그럼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 넌 어떤 동아리 들어갈 거야?"
"동아리? 일단은 검술연구회가 제일 무난하지 않나 싶은데, 왜?"

검 쓰는 애였구나. 하긴 무투 계열 중에선 제일 흔하긴 하지.

"아니, 그냥. 옆자리잖아. 나는 아직 어느 동아리 들어갈지 못 정했거든."
"너도 전공 과목 정해 둔 거 있지 않아? 대충 그쪽 계열에서 정하면 되잖아."
"그게 제일 무난하긴 한데 역시 재미없잖아, 그런 건. 기왕이면 전공이랑 아예 동떨어진 쪽으로 가고 싶어서."
"확실히 그렇긴 하네. 나도 그냥 관성적으로 검술 관련으로 생각이 쏠렸는데 아카데미 내내 검 휘두르면 질릴 거 같단 말이지."

오, 생각보다 말이 잘 이어진다. 척 보기에는 좀 무뚝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받아주는 성격이구나.

"그치, 그래서 고민이라니까. 막상 흥미 위주로 봐도 내 취향하고 부합하는 곳이 딱히 없어서."

박준이 팔짱을 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가 없는 거야? 그러면 새로 만들면 되잖아."
"막상 만들어도 들어올 사람이 없을 거 같은데. 동아리 그거 최소 3인부터 시작 아니야?"

물론 신생 동아리를 만들어서 박준, 이하은, 나 이렇게 셋이서 활동한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쉽지 않을 거 같은데.

"그거야 채우면 되지. 세 명 정도야 쉽게 모이잖아."
"그, 그치만…."

내가 우물쭈물대는 사이 박준은 내 앞자리의 이하은을 불렀다.

"야, 이하은! 나랑 얘랑 동아리 새로 하나 만들기로 했는데 만들면 너도 들어올래?"

이하은이 그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박준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나를 보았다.

나를 조금… 오래 봤다.

무, 무슨 의미지? 내가 마음에 안 들었나? 그치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하은은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들어갈게."
"좋아, 그럼 이렇게 셋이서 동아리 만드는 거다? 부장은 당연히 너고."
"으, 응?"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레 진행돼서 잘 이해가 안 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 음.

일단 같은 동아리에 들어갔으니, 목표는 달성인가?



3화 - 동아리 결성

"응? 신규 동아리를 개설하고 싶다고?"

내가 넌지시 말하자 1학년 1반의 담임인 이예지 선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소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하긴 신입생이 나서서 동아리 개설을 하는 경우는 아무래도 드물다. 보통 2학년 즈음 되어 학교에 어느 정도 적응해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만들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지.

"네. 입학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아무리 봐도 제가 원하는 동아리는 없는 거 같아서요."

조금 전 동아리 개설 계획을 급조했으면서, 심지어 동아리 활동 주제보다도 동아리 결성을 먼저 정했으면서도 거짓말을 한다. 원래 이런 건 애초부터 계획이 있었다는 듯 굴어야 잘 먹힌다.

"으음, 안 될 건 없지만 인원수 제한이 있거든. 같이 하기로 한 애들은 있니?"
"아, 네. 반 애들하고 셋이서 하기로 했어요."
"그래? 그럼 신청서 줄 테니까 여기서 작성하고 제출해."

나는 신청서를 받아 들고는 곧장 펜을 끄적이며 공란을 채워갔다.

그나저나 이제 와서 깨달은 건데 나, 졸지에 부장이 되어버렸다.

단체 활동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어 부장 노릇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거 되게 귀찮지 않으려나. 활동 보고서 같은 거도 작성해야 할 텐데 그거 다 부장 업무잖아.

물론 호기심에 패배한 내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두 번째 학교생활은 생각했던 바와 조금 많이 달라질 것 같았다.

신청서 작성은 금방 끝났다. 나는 신청서를 이예지 선생에게 건넸다. 이예지 선생은 신청서를 쓱 훑어보았다.

"으음, 이런 동아리구나? 의외네. 생긴 걸로 봐서는 이런 쪽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 이미지가 대체 어땠길래."
"도서부 같은 동아리 들어갈 줄 알았지. 보통 마법학 전공 애들은 책 좋아하잖아?"

아,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몸 쓸 일보다는 머리 쓸 일이 많으니 성향도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얌전하고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아아, 내가 담당인 동아리에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어지는 이예지 선생의 말 사이에 거슬리는 단어가 끼어 있었다.

귀엽다, 라. 확실히 지금 몸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귀엽긴 하다. 그런데 그걸 막상 남의 입으로 듣게 되니 영 거부감이 든다. 내 영혼이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걸 부정하고 있어.

"아, 아무튼 신청서도 냈으니까 동아리 개설 가능한 거 맞죠?"
"응. 아마 2교시 되기 전에는 부실 배정 받을 수 있을 거야. 오늘은 하루 종일 동아리 활동 시간이니 부실 확인하고, 비품 추가로 필요한 거 있으면 신청해."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무실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여자아이 취급받는 건.



*



2교시, 나와 박준과 이하은은 부실에 모인 채였다.

우리에게 배정된 부실은 별관 2층에 있었다. 부실은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탁자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교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크기는 본관의 교실보다는 작아도 고작 학생 셋이서 쓰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탁자에 빙 둘러앉은 채 있자니 박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그래서 우리 뭐 하는 동아리야?"
"…그걸 이제 와서 묻는 거야?"

박준의 말에 핀잔부터 나갔다.

물론 덕분에 동아리 무사히 만들게 되었으니 고맙긴 한데, 암만 그래도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둘 다 동아리명 정하기도 전에 들어오겠다고 해서 나 혼자 머리 굴려서 활동 목적 같은 거 정해야 했잖아.

"애초에 둘 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 들어오겠다고 한 거야? 뭐 하는 동아리인지 듣지도 않고서."
"그냥 재밌을 거 같아서 왔는데."

박준이 지나치리만치 시원스레 대답했다.

"재밌을 거 같다니 뭘 보고…."
"같은 반 신입생 셋이서 동아리 만들어서 활동한다 치면 딱 봐도 재밌어 보이잖아? 이하은도 들어오겠다 할 거라고는 나도 예상 못했지만."
"응? 둘이 친해서 권유한 거 아니었어?"
"아카데미 와서 처음 봤는데?"

뭣.

처음 보는 애한테 다짜고짜 가입 권유를 한다고? 이게 고등학생의 친화력이라 이건가. 진짜 쉽지 않네.

"그럼 이하은 너는 왜 들어오겠다고 한 건데?"

나는 시선을 돌려 이하은 쪽을 보았다.

박준이야 아무 생각 없었다 쳐도 이하은은 어쩌다가 들어왔는지를 모르겠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동아리에 이하은을 끌어들여도 괜찮았던 걸까.

이하은은 동아리 가입 의사를 밝히기 직전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냥."
"그냥?"
"…응."

그냥이라니. 대답에 맥아리가 없다. 분명 인터넷에서 봤을 때는 좀 더 똑 부러진 성격 같았는데 막상 보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다. 애가 좀 맹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뭐, 아무렴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나. 이렇게 우리가 한 배를 타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교탁 앞에 섰다.

"우리 동아리명은 학교조사부야. 아카데미의 역사를 탐구 대상으로 삼아 각종 구역들을 조사한다, 가 활동 계획이고. 대놓고 말하자면 아카데미에 있는 각종 비밀이나 소문들을 파헤치는 게 목적이야."

박준이 흥미가 생겼는지 반응을 보였다.

"비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별관에 괴물이 산다든가 하는 소문 있잖아. 아카데미도 워낙 넓고 온갖 신비들이 모여든 본산지 같은 느낌이니까."

물론 별관의 괴물은 그, 다소 불건전하긴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충분히 괴물 취급받을 만하긴 했다. 주로 성욕 측면에서.

"아, 학교 괴담 같은 거? 7대 불가사의?"
"으음, 뭐 대충 비슷한 느낌인가? 물론 규모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까 7가지보다는 훨씬 많겠지만."

내가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결정한 내용이었다. 기왕 동아리를 만든다면 내 흥미와 직결된 편이 좋으니까.

상태창이 앞으로도 계속 튀어나온다면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목 하에 훨씬 편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루시아드 아카데미는 동아리 활동의 비중이 높으니만큼 동아리 활동이라 핑계대면 대체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만약 상태창이 더 이상 안 나온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퀘스트 발생 : 동급생 '박준'이 지닌 이능의 정체를 밝혀내보세요!]

[퀘스트 발생 : 동급생 '이하은'의 가문이 은폐한 진실을 파헤쳐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퀘스트 두 개가 또렷이 보이는 만큼 당분간은 필요 없는 고민 같다.

"괜찮은데? 소문대로 화장실 수도관 안쪽 비밀 통로에 바실리스크가 산다거나 하면 재밌을 거 같잖아. 고대 생물하고 전투 경험 쌓을 기회이기도 하고."

…그 소문의 출처가 내가 기억하는 서양의 모 원조 아카데미물로 추정되는 건 둘째치고 싸울 생각부터 하다니, 제정신인가?

본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존재했고, 그들 중 인간과 소통하지 못하는 종족들은 몬스터로 분류됐다. 바실리스크는 몬스터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유달리 적대적인 데다가 개체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라 결국 완전히 박멸된 종족이었다.

당시 바실리스크 토벌을 위해 투입되었던 인력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일개 아카데미 학생 수준에서는 감당 못 할 게 뻔하다. 그런데 바실리스크 상대로 어디 마실 나간다는 듯 말하다니, 만용인 건지 아니면 그놈의 이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건지. 어느 쪽이든 상식인 입장에서 보기에 골치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야, 바실리스크가 있으면 신고할 생각부터 해야지 뭔 싸울 생각부터 하고 있어? 미쳤냐?"

박준은 나를 살짝 내려다보는 얼굴로 말했다. 그 표정이 조금 열받았다.

"1000년 전에 이미 분석 끝나서 약점 다 드러난 몬스터 상대하기가 그렇게 무서워? 쫄았냐?"

…이 새끼가?

"쪼, 쫄기는 누가 쫄아? 나도 바실리스크 정도는 혼자서 잡을 자신 있거든? 그냥 신고하는 게 절차에 맞으니까 하는 거지. 넌 법도 안 지켜?"
"쫀 거 맞으면서 왜 이렇게 혀가 길어. 비밀 공간 들어간 시점에서 교칙 위반인데 법을 왜 따져?"
"비밀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그냥 바실리스크 만났을 경우만 말한 거잖아. 그리고 바실리스크가 좆으로 보이냐? 이미 발현한 마법도 석화로 상쇄시키는 놈인데?"
"그건 마법사한테나 해당되고 나는 상관없는데? 눈 감고 오러 두르고 기감으로 탐지하면 석화의 마안 파훼 끝인데?"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성격 좋은 앤줄 알았는데 의외의 면모를 발견했다. 박준 이 새끼, 생각보다 고집이 세다. 말싸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물러설 수는 없다. 도발을 당했는데 여기서 꼬리를 내리면 완전히 패배자로 전락해 버리는 거잖아.

솔직히 썩 어른스러운 행동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지금은 나도 고등학생이다. 그리고 원래 고등학생은 좀 유치하게 굴어도 된다.

그렇게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이어지던 논쟁은 이하은이 입을 엶으로써 끝났다.

"…아. 불가사의 같은 거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어."

설마 지금껏 아카데미의 소문에 대해 생각했던 걸까.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작스레 입을 연 이하은 쪽으로 나와 박준의 시선이 쏠렸다.

"응?"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말인데, 체육관 건물 지하 어딘가에, 원래 크기라면 존재할 수 없는 거대한 방이 있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상태창이 반짝였다. 나는 곧바로 상태창에 새롭게 떠오른 문장을 읽었다.

[퀘스트 발생 : 체육관 지하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공간을 파헤쳐보세요!]

…아무래도 바로 당첨인 모양이었다.



4화 - 지하를 향해

이하은의 가문은 마법 명가다. 당연하게도 이하은의 아버지 또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였고, 여느 재능 있는 이들이 그렇듯 루시아드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었다. 이하은이 아버지로부터 아카데미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자식에게 늘어놓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신빙성도 있겠지. 마침 상태창도 그를 보증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

내가 묻자 이하은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응. 하지만, 나도 들은 게 그다지 많지 않아서…."
"괜찮아. 대략적이라도 괜찮으니 아는 게 있으면 말해줘."
"그렇다면야, 응."

이하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특유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하은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이하은의 아버지는 학창 시절 마법사이면서도 드물게 체육 활동을 즐기는 학생이었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여가 시간이 날 때마다 체육관에 나섰으며, 그를 모르는 학생들로부터는 무투 전공이라 오해받을 지경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과를 모두 마친 후 체육관에 나섰다. 체육관에 살다시피 하며 친해진 무투 전공 학생들과 만나 한창 배구 시합을 하는 도중 문제가 생겼다. 비품으로 놓여 있던 배구공이 전부 터져버린 것이다.

신체 강화를 사용하는 마법사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무투 전공 학생들에게 얻어맞으니만큼 공이 터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다. 다만 공이 전부 떨어지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국 마지막 공을 터트린 범인인 그가 지하 2층, 창고층으로 내려가 공을 가져오기로 결정됐다.

나름 체육관에 오래 드나들며 익숙해진 그였으나 막상 창고층에 오는 경우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온 장소에서 공을 찾아 복도와 방을 들락날락하던 그는 또 다른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해당 방은 여태껏 본 방들과는 달리 희미한 불빛조차 없이 어두웠다. 그는 굳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스위치를 찾기보다는 발광 마법을 사용하기를 택했다.

빛이 생겨난 순간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발광 마법을 사용했음에도 벽이 보이지 않았다. 방의 구조를 알 수 없었다. 발광 마법의 빛을 키웠음에도 여전했다. 계속해서 빛을 키워도, 광장을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빛을 내게 했음에도 여전히 방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등골을 스치는 오한에 본능적으로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다시 문을 열었을 때는 그가 보았던 것이 전부 착각이었다는 듯 평범한 창고가 나타났다.

그 한 켠에는 배구공이 한가득 쌓인 보관대가 놓여 있었다.



*



"…여기까지가 내가 들은 내용이야."

이하은은 이야기를 마침과 동시에 눈을 떴다.

어느샌가 이야기에 몰입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박준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체육관에 그런 방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네. 아카데미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어."

박준이 말하는 커뮤니티란 아마도 루시아드 아카데미 갤러리겠지.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였다면 대놓고 당당하게 말하지 굳이 저렇게 돌려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커뮤니티가 대부분의 소문의 출처인 건 맞지만 모두가 커뮤니티를 하는 건 아니니까. 이하은네 아버지가 커뮤니티 같은 거 하실 이미지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내 말에 박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하은의 아버지인 이백한 또한 각종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었다. 사진으로 보았던 그 근엄한 얼굴로 갤러리에 글을 쓰는 모습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체육관 지하라면 드나드는 사람이 제법 있었을 텐데 관련 소문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만약 그 방이 실존한다면 몇 명 정도는 더 봤어야 정상이잖아?"
"그러니까 한 번 찾아볼 가치가 있는 거지. 어딘가 모순된 점이 있어야 더 재밌잖아."

이하은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무언가 생각이 난 건지 슬쩍 의문점을 털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생각했던 건데, 방의 원리 자체도 궁금해. 방은 어떻게 그렇게 넓은 공간을 지녔는지,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는지. 공간 확장 마법을 사용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확장 가능 면적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만약 실존한다면 한 번 보고 싶어."
"확실히 공간 계열 마법 자체도 고난이도에 반영구적 시행도 어렵긴 하지. 나도 궁금하긴 하네."

일단 박준과 이하은 둘 다 이번 건에 대해 상당히 흥미를 느끼는 듯하다. 나 역시도 그렇고.

[퀘스트 발생 : 체육관 지하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공간을 파헤쳐보세요!]

퀘스트가 그 방의 존재에 대해 확언하고 있다. 5성급 마법사의 재목이었던 학생조차 정체를 해명할 수 없었던 방의 존재를.

방의 존재에 대해서는 오직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다. 매년 학교 관리의 일환으로라도 창고층을 정리할 학교 측에서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혹은 알고도 방치했기에 방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통상적인 공간 확장 마법은 그 원본의 10배까지가 한계다. 사용자의 성급이 올라갈수록 그 한계도 늘어나겠으나 여전히 일반적인 크기의 방을 광장보다도 넓게 만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하은이 풀어놓은 짧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적잖은 의문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숨겨진 방의 존재는 단언컨대 흥미로운 주제였다.

나는 박준과 이하은을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체육관으로 가 보자. 이대로 있어 봐야 탁상공론이고,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동아리 활동이니까 시간도 많잖아? 한 번 찾아보자. 그 방."

박준과 이하은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학교조사부의 첫 활동이 결정되었다.



*



루시아드 아카데미는 넓다. 그 방대한 부지는 단순히 학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소도시에 가깝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일반적인 학교라면 다목적강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을 강당, 체육관, 대련실 따위가 아예 각기 다른 건물로 존재했다. 덕분에 체육관은 오로지 체육 활동만을 위한 장소로 사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체육관은 넓었다. 위로 4층, 아래로 2층. 도합 6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하층을 제외한 각 층의 높이만 40m에 달했다. 일개 학교 체육관이라 보기에는 지나치게 장대한 규모였으나 그 학교가 온갖 능력자들을 가르치는 곳임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적당한 크기였다.

나와 박준과 이하은은 그 체육관에서도 유일한 비활동구역인 지하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 문득 떠올랐다는 듯 박준이 물었다.

"근데 체육관 창고층 1학년 출입 금지 구역 아니야? 우리 못 가잖아."

그 말대로였다.
루시아드 아카데미에는 곳곳에 1학년 출입 금지 구역이 존재해 2학년 이상의 학생들에게만 허용된 구역이 있었다. 아카데미 측에서는 아직 미숙한 1학년에게는 지나치게 위험한 장소라 금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어차피 학생 개인의 역량에 따라 학년 따위 무의미한 실력을 보이는 경우도 많고, 아카데미 재학생에게 위험할 정도라면 고작 한 살 차이 정도로 대응의 여지가 갈리지도 않는다. 정말 안전을 위한 교칙이라면 아예 학생 출입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는 편이 올바른 대응이다.
몇몇 구역은 정말로 위험성이 존재해 그럭저럭 납득가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체육관 창고층은 선정 기준에 대해 의문이 들게끔 만든다. 때문에 금지 구역은 실상 케케묵은 관습의 일환 정도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교칙은 교칙이라 1학년은 가고 싶어도 마지못해 발길을 돌려야 하지만….

"그건 너 같은 허접한테나 적용되는 소리고."

나는 박준을 보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손에는 자그마한 카드 한 장이 쥐어진 채였다.

"짜잔."

박준은 느닷없이 들은 허접 소리에 얼굴을 찌푸리기도 잠시, 이내 내가 들이민 카드를 들여보았다.

"…뭐야? 통행증이네? 이거 어디서 얻은 거야?"
"아까 교장 선생님께 직접 받았지. 비품으로 신청하니까 부장 전용으로 하나 발급해 주시던데."

실상은 어제 약속한 물건을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서 진실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부정부패를 통해 손에 넣은 권력을 당당히 내보이며 떵떵거렸다.

"봤냐?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라고. 우리 둘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구나."
"크, 크윽…."
"자, 박준 부원. 대답해 볼까요? 바실리스크를 만났을 때 올바른 대처법은?"

박준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분한 표정을 짓더니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얌전히, 학교 측에, 신고하는 겁니다…."
"음음, 그래그래. 이젠 대들지 마라?"

나는 만면에 승자의 미소를 띄우며 만족스레 웃었다. 유치한 승부를 추악한 어른의 방식으로 이겼지만 어쨌거나 최종 승자는 나다.

왜, 상태창도 결과는 과정보다 우선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스스로가 거둔 승리에 한 점 부끄럼 없음을 확신했다.

이동하는 도중 일어난 일련의 촌극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던 이하은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 입구. 도착했어."
"그렇네. 말해줘서 고마워."

나는 통행증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검문 기계에 통행증을 대니 가벼운 마법적 작용이 오가더니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렸다.

나와 박준과 이하은, 세 명의 1학년생은 비로소 1학년 출입 금지 구역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