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b0d121e09c28a8699fe8b115ef0469943afeb8f0



일캐 빡빡한 글을 누가 읽어



디즈니랜드가 처음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경악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돈과 규모의 문제를 떠나서, 기존의 유랑 서커스단 같은 놀이기구 집합소 이상의 주제를 덮어 씌웠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는 자신의 동화 속에 등장하는 환상의 나라를 현실 어딘가에 구현해놓고자 했고, 배를 타고 물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외딴 곳에 너무나 신기하게 말끔한 고성이 들어섰다. 당시에 디즈니랜드가 표상하는 세상은 특정 시대와 국적으로 특정될 수 없는 모호한 곳이었고,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낡은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디즈니가 낡은 지금도 디즈니랜드는 엄밀히 말해 낡지 않았는데,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것만 같은' 가상의 공간을 현실에 덧씌우는 기획이 디즈니랜드로 인하여 전세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공간에서는 물질 뿐 아니라 사람들도 가상의 규칙을 따라야만 하며, 빅토리아 영국을 모사하는 곳에서 직원이 슬랭을 구사하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이론적으로는.) 다만 이들이 디즈니랜드가 아닌 이유는 뚜렷한데, 이들은 디즈니랜드처럼 치유적 용도가 아니다.


디즈니랜드의 기묘한 점은 이 낡은 테마파크에 나이 든 어른들이, 심지어 아이 한 명 대동하지도 않고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 가상의 공간은 동화의 원형을 제공하는 곳이며, 디즈니랜드를 나이 들어서 찾아온다는 건 추억성으로 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가격도, 거리도, 인파도.) 그보다는, 이 동심의 세계에서 치료를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판타지랜드>처럼 그런 미국의 아이 같은 특성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만, 어쨌든 디즈니랜드가 일종의 치유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곳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가상 공간이고, 이곳에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삶의 세부사항에 골치 아파할 필요 없이 다소 뭉글뭉글한 환상에 푹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명시적인 주제를 현실에 구현하는 다른 테마파크는 먼저 그 주제가 정말로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잘 따지지 못했고, 그렇기에 디즈니랜드와는 질적으로 차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될 만한 가상세계가 모두에게 하나씩 있다: 기억 속의 과거.


특정 시대와 누군가의 기억 속 특정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 (사람들이 과거 뿐 아니라 미래도 극심하게 취사편향한다는 점은 일단은 제쳐두자.) 기억은 현실의 굴곡을 매끄럽고 평탄하게 만들어주며, 애초에 굴곡이 있는줄도 몰랐던 곳을 바라볼 때는 기억 속에 평원이 생긴다. 그 평원은 확실히 친숙한 곳이고, <타임 셸터>는 이 친숙한 평원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현실에 펼쳐 보이고자 한다. 시작은 치매 노인들에게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과거를 선보이며 회복을 기대하는 클리닉이었지만, 이내 이 클리닉의 치료는 치매보다는 향수병을 다루는 쪽에 가까워진다. 층별로 서로 다른 시대 분위기를 조성하며 자신이 가장 살기를 꿈꿔왔던 시대의 층에서 생활하는가 하면, 애초에 먼 나라에 있어 한번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했을 '과거'를 살고자 하는 사람도 나온다. 그리고 점차 클리닉의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장소로 확장되기 시작하며, 타임 셸터로 지정된 공간이 하나의 마을 수준이 되는 시점에서부터 조금 이상해진다. 담벼락 하나를 기준으로 이편에서는 2020년대를 살고 있지만, 저편에서는 1960년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1960년대를 살고 있는 이들은 심리적 안정감 측면에서는 치유받고 있지만, 현상유지라는 점에서는 전혀 치유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 이상이다. 클리닉의 몸체 위에서 살아 있는 기억은 일종의 대역이 된다. 신토에는 카타시로形代라는 것이 있다. 종이나 나무로 깎은 인형에 부정을 옮겨 담아 강물에 흘려보내는 의례인데, 핵심은 대역에서 행한 대로 본체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전이의 논리다. 가우스틴의 클리닉은 이 카타시로의 유럽판처럼 작동한다. 1960년대의 냄새를 조향하고 가구를 복제하고 오후의 빛까지 재현해 환자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대역에서 행한 대로 본체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그러나 카타시로에는 원칙이 있다. 일이 끝나면 강물에 흘려보내야 한다. 클리닉의 대역은 흘려보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대역 안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치매 환자만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싶었던 시대의 층을 골라서, 거기서 눌러앉는다. 본체를 구하기 위해 만든 대역이 본체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이가 대륙 전체로 번진다. 클리닉의 규모가 커지고 마을 수준으로 확장되면서, 담벼락 하나를 기준으로 이편에서는 2020년대를 살고 저편에서는 1960년대를 살게 된다. 급기야 각 나라가 '돌아가고 싶은 시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구체적 국가/시대 예시 — 소설에서 확인 필요.] 이것은 향수의 보편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향수의 근본적인 사사로움을 드러낸다. 모두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되,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전부 다르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문장은 오직 '우리' 안에서만 성립하고, 담벼락 너머의 이웃은 전혀 다른 시절을 살고 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재현된 과거가 실제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클리닉의 1960년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는 것은, 2020년대에 조향된 냄새와 복제된 가구가 — 원본이 아닌 것이 — 원본의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대역에서 행한 대로 본체에서도 이루어진다. 카타시로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은 카타시로가 본체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카타시로를 본체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국가 규모로 확장되면, 국민투표로 선택된 1960년대는 실제 1960년대와는 이미 관계없는, 일종의 의례적 재현이 된다.


호라이즌 제로 던의 테나크가 정확히 이 구조 위에 서 있다. 올드 원즈가 남긴 군사 훈련용 홀로그램 — 원래는 시뮬레이션에 불과했던 것 — 을 테나크는 발견하고, 그 전투를 의례적으로 재현하면서 부족 전체의 전사 문화를 그 위에 세운다. 홀로그램 속 전투가 무엇이었는지, 왜 만들어졌는지의 맥락은 이미 소실되어 있다. 남은 것은 재현의 형식뿐이고, 그 형식이 부족의 힘의 원천이 된다. 노라 부족이 올마더 앞에서 행하는 의례도 마찬가지다 — 산 안에 묻힌 것이 테라포밍 AI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만, 재현된 경배는 실제로 부족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갖는다. 타임쉘터의 클리닉이 하는 일이 이것과 다른가? 2020년대에 조향된 1960년대의 냄새는 실제 1960년대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다. 테나크의 전투 의례가 올드 원즈의 전투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듯. 원본의 맥락이 소실된 재현이 주술적 힘을 갖게 되는 구조 — 이것이 카타시로의 논리이고, 타임쉘터의 논리이고, 호라이즌의 논리다.


그러나 재현에는 필연적으로 편집이 따른다. 테나크가 홀로그램에서 보는 것은 전투의 격렬함이지 그 전쟁이 야기한 고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각국이 투표로 선택한 '아름다운 과거'에서 고스포디노프는 나치 시기의 기억, 학살의 역사를 늘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스치듯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것은 단순한 작가적 절제가 아니다. 향수 정치 자체의 서술 문법을 소설이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과거"라는 문장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고통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한다. 소설은 그 괄호 치기를 독자에게도 똑같이 수행하게 만든다 — 짧은 언급을 흘려보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편집에 가담하고 있다. 불가리아 작가가 이것을 쓴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동유럽에서 향수는 서유럽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공산주의 시대에 대한 오스탈기(Ostalgie)가 이미 실존하는 정치적 감정이고, 동시에 EU 가입 이후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미래지향 서사에 대한 만성적 피로가 깔려 있다. 과거로의 퇴행이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일종의 실존적 피난처로 기능하는 구조가 이미 지형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고스포디노프가 이 로컬한 감각을 범유럽적 알레고리로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16년 이후의 유럽이 동유럽의 이 감각을 서유럽도 공유하기 시작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그랬고, 각국의 극우 향수 정치가 그랬다.


임지현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부른 것은 이 편집의 가장 정치화된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민족의 이름으로 뭉뚱그린 후 그 목소리를 대신 무기로서 휘두르는 것. 타임쉘터의 유럽인들이 각자의 '아름다운 과거'를 선택할 때 삭제되는 것은 타자의 고통만이 아니다 — 자기 민족이 가한 고통 역시 삭제된다. 그리고 삭제된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겪은 고통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오래 생각한 끝에 내가 도달한 지점은, 그 편집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 쪽이었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것에 대한 설명보다 선행한다. 우리는 극히 한정된 거주 범위 너머의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그 공동체를 필요로 하고, 그것이 사회적 허구라 하더라도 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쉽게 걷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기억 공동체의 감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규모로,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되느냐에 있다. 클리닉이 치매 환자 한 명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과, 한 나라 전체가 '1960년대로 돌아가겠다'고 투표하는 것 사이의 거리. 전자는 치료일 수 있다. 후자는?* 고스포디노프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클리닉의 문을 열어두고, 들어갈지 말지를 독자에게 넘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보여준다. 카타시로는 강물에 흘려보내야 한다. 붙잡고 있으면 부정이 되돌아온다.


* 이 구조의 극단적 변형을 한국 웹소설에서 본 적이 있다. <학원쟁패>의 세계관에서 지구 문명은 외계 세력에 패배한 후, 자신들의 기술로 능히 압도할 수 있는 과거의 지구 — 평행세계들 — 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으며 일종의 자폐적 제국을 운영하고 있다. 타임쉘터의 유럽이 과거 속으로 웅크리는 것이라면, 이 지구 제국은 과거를 정복한다. 더 강한 적에게 패배한 자가, 자기보다 약한 버전의 자기 자신을 찾아가 지배하는 것 — 희생자의식이 피난처가 아니라 공격의 논리가 되는 순간이다.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둘 다 현재를 직시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구조의 변형이다. 타임쉘터의 카타시로가 본체를 삼키는 것이라면, 이 제국의 카타시로는 본체를 식민지로 삼는다. 어느 쪽이든 카타시로는 강물에 흘려보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