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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시선의 전복: <저지능>이 묻는 오만의 기원
[기획 평론] 화이트 큐브에 갇힌 야생성, 우리는 누구를 비웃고 있는가?
글: 엘론드 폰 클라인 (월간 <아트 & 마나> 수석 평론가)

올해 열린 제14회 합정역 제국 비엔날레 중앙홀에서 가장 거센 논란의 중심에 선 작품은 단연코 익명의 작가가 출품한 <저지능(Low Intelligence)>이다.

작품은 충격적일 만큼 직관적이다. 철창으로 이루어진 미니멀리즘적인 정육면체 프레임, 그리고 그 안에 포획되어 살아 숨 쉬는 한 마리의 붉은 눈 고블린. 작가는 이 날것의 생명체 앞에 <저지능>이라는 단 세 글자의 명제를 툭 던져놓았다.

대중은 묻는다. "이게 예술인가? 아니면 단순한 마물 학대인가?" 그러나 이 질문이야말로 작가가 쳐놓은 치밀한 관념적 덫이다.

1. 대상의 물화(物化)와 화이트 큐브의 폭력성
   우선 공간적 맥락을 짚어보자. 어두운 동굴과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 있어야 할 고블린이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는 멸균된 문명의 공간으로 강제 이식되었다. 작가는 이 폭력적인 데페이즈망(Dépaysement, 낯설게 하기)을 통해, 이세계 종족들이 타자를 어떻게 대상화하고 전리품으로 소비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전시실 안에서 고블린이 무의미하게 코를 후비거나 관람객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짖는 파편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 인간 중심주의적 생태관에 대한 전위적인 퍼포먼스로 승화된다.

2. <저지능> : 관음증적 시선에 대한 거울
   작품의 제목인 <저지능>은 과연 철창 안의 고블린을 향한 명명(命名)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는 철저한 기호학적 반어법이다.
관람객들은 안전한 유리벽 너머에서 고블린의 미개함을 감상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그러나 고블린의 탁하고 초점 없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이 시선의 위계는 붕괴된다. 아무런 철학적 번뇌 없이 본능만으로 존재하는 고블린 앞에서, 대상에 억지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예술'이라 포장하며 샴페인을 들이켜는 고위 귀족들과 평론가들의 허영심이야말로 진정한 '저지능'의 표상으로 전락한다. 작가는 고블린이라는 살아있는 오브제를 거울 삼아, 이세계 지식인들의 기만적인 오만함을 날카롭게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3. 생명 정치학적 도발
   이 작품은 전시 기간 내내 살아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를 넘어선 바이오 아트(Bio-art)의 궁극적 형태를 취한다. 고블린이 배설을 하고, 배고픔에 울부짖으며 악취를 풍길 때마다 작품의 아우라(Aura)는 매 순간 갱신된다. 이것은 박제된 몬스터의 사체가 줄 수 없는, 철저히 생명 정치학적인 도발이다.
결론적으로 <저지능>은 불쾌하지만 위대한 걸작이다.
작가는 질문한다. 전시실이라는 결계의 안과 밖, 진짜 '저지능'의 우물 안에 갇힌 것은 저 흉측한 피조물인가, 아니면 타자의 고통과 원초적 무지를 예술이란 이름으로 착취하며 즐거워하는 우리 자신인가?

전시관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눈으로 숲 속의 마물들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럴싸해서 얼탱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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