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사는 원래 이사를 갈때는 근무지를 먼저 정하고 이동한다.


이건 안경사 뿐만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당연한 것.


하지만 이번 이사의 경우는 내가 혼이 다 빠져서 쓰러진채


어쩔 수 없이 그럴거면 여친네 대학이라도 다니기 쉬운 곳으로 이사간거라


나는 이사를 해두고 직장을 알아봐야 했다.


노동부에 찾아가 판교 사장에게 못받은 임금을 신고하던 쯔음


그때 내가 잠시 일했던 구리의 그 사장님한테 안부차 연락이 왔다.


안부가 아니라 분명 내가 일하고 있는지 찔러보는 것이리라


어디서 일하고 있냐길래 쉬고 있다고 했더니 당장 와보라고 성화였다.


하.... 이 인간이랑 또 엮이면 안될거 같은데


망설이고 있으니 그 한심한 원장 잘랐고 이제 너 하고싶은대로 맘대로 해도


누구 하나 뭐라할 사람이 없다고 장담을 늘어놓았다.


.....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후로 며칠에 한번씩 연락해서 들볶아대는데 그때는 차마 차단을 못했다.


그래도 내가 혼자 분당에서 프차의 횡포에 고군분투 하고 있을때


프차 본사에 아는 사람에게 한번 전화를 넣어줬던 은혜(?)가 있었으니.


(효과는 없었지만)


날짜를 잡고 가보니 가게 주변 분위기가 휑했다.


상가 좌우로 가게들이 다 나갔다.


안경원에는 사장과 나보다 대여섯살 많은 안경사, 그리고 사장의 친구로


알바중이라는 나이 지긋한 친구분이 있었다.


이미 나머지 안경사들은 다 나갔다고.



출근 며칠이 안되서 그 친구분과는 빠르게 가까워졌는데


나이로 치면 부장 이상인데 보통 그러면 잡일이나 기계, PC다루는 일은


밑에 있는 내가 도맡아서 해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대여섯살 많았던 그 안경사는 사실상 젊은 부장이었는데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고


딱 그런 모양새였다.


이전과 달리 직원이 다 빠져나가서 사장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돌아가는 꼴은 이전보다 더 가관이었다.


매출이나 객수나 이전보다 확실히 빠졌는데


그러니 사장이 거기에 가져온 솔루션은...


바로 사은품


그렇다.


바뀌긴 커녕 더욱 늘어난 사은품에 내 골머리가 아파왔다.


아이스크림과 커피와 사은품으로 줄 온갖 쓰레기들(밥통, 컵, 뭐 자질구레한 그런거)


손님한테 뭐 먹으라고 자꾸 강요하는건 더 심해졌다.


늙는다는건 자신의 편견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가기 마련이다.


장사가 안되면 근본적인 변화를 캐치하는게 아니라 기존에 방식을 더 강화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안경렌즈 가격은 하나도 안올려놨고 니콘의 프레지오 밸런스는 50%를 때리고 있었다.


콘택트렌즈 가격도 인근에 새로 생긴 ㅇㄸ의 시세에 맞춰놨다.


그냥 버려야지 그걸 또 맞춰주고 있네....


가격만 보면 뭐 날림으로 그냥 다 쳐내란 소리밖에 안되는데.


나는 콘택트만 가격표대로 해주고 나머진 나 꼴리는대로 받아냈다.


대신 검안부터 조제 피팅까지 물이 오른 실력대로 맞춰주고.


사장은 어김없이 클레임이 매일 터졌고 매일 적응하라고 강요하는 나날이었는데


사장이 없는 날에는 사장님 있을때 오라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구리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 시간이 넉넉할리 없으니


마지못해서 다시 검안해주고 재주문 해주는 건수가 늘기 시작했다.


이전에 근무할때는 그나마 사장이 별로 손님을 안받아서 괜찮았는데


사장이 집중 근무하자 클레임은 정비례해서 늘어났다.


아니 그래도 3-4단계 과교정이 이렇게 많냐.... 난시축은 왜 또 엉뚱하게 꽂혀있고...


검안 개념이 없는 올드 세대가 경쟁이 별로 없는 지방에 오래 있으면


종종 보이는 방식인데


손님이 덜 보인다 하면 무조건 마이너스 값을 올려버린다.


이러면 초점은 망막 뒤로 이동하고 이걸 다시 망막으로 당기려고 수정체근이


긴장하며 조절이 발생하는데, 조절이 개입되면 상은 일단 선명해진다.


그러나 긴장이 지속될 수 있는 젊은 나이면 모를까 40대를 넘기면 그건 어렵다.


조절력이 소진되서 다시 흐려질때 도수를 낮추는건 꽤 어려운 일이다.


손님 입장에선 자신이 돈을 내고 새 안경을 했는데, 최대 시력이 오히려


더 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그것이 지속성이 없는 시력이라는 설득은


그나마 서울권에서는 먹히지만 지방에 가면 잘 안먹힌다.


교육율이 떨어지는 동네일수록 과교정으로 일단 안경원 안에서는


선명하게 조져주고 내보내는 일이 잦아진다. 특히 마이너스 방향으로


과교정을 하게 되면 상이 살짝 축소되면서 선명하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화질 떨어지는 동영상 축소하면 선명하게 보이듯이.


근처 ㅇㄸ이나 저가 안경원이 많기에 마이너스 과교정 상태로


오는 고객들도 많았지만, 사장도 만만치않게 마이너스를 때려넣었다.


그걸 다 풀어서 완전교정 수준으로 낮추거나 한단계만 과교정하고


이게 맞고 그동안 겪은 증상들이 노안이 아니라 지나친 과교정으로


근거리 불편을 야기한 것이라 차근차근 설명하고 재주문으로 돌려주는게


반복되니 사장은 뿔이 났다.


자기가 해준 손님인데 내가 바꿔준 안경을 써보고 환한 표정으로


커피나 음료수를 사주고 가는걸 보니 존심이 뒤틀릴 수 밖에.


나는 그런 재교정 손님이 오면 최대한 사장 눈에 안띄게 구석으로


숨겨보려 했지만 그게 되나.


얼마 뒤부터 사장은 나를 불러다 왜 렌즈값을 더 받냐고 혼을 냈다.


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니 제대로 된 비용을 받아야 맞았다.


사장이 손님 2명 쳐낼 시간에 1명 상대하고 2개 만들 시간에


고민하며 1개 완성하니 마진은 2배수가 나와야 하고


그러니 50% 대신 2-30%만 할인해줘도 사실 클레임 거는 손님은 없었다.


현수막에 50%는 뭐냐고 하면 적당히 둘러대고 매출을 땡겨줬다.


하지만 사장은 매출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싸다는 인식이 박히면 인근 다른 저가 안경원 간다는 두려움을


깊이 품고 있었다. 


그 두려움 때문에 또 하나의 경향이 있었는데, 그건 최저가 다초점을


국산이 아닌 수입으로 민다는 점이었다. 보통 안경사들은 특정 가격대


이하는 수입 대신 국산으로 돌리는 편인데, 이는 수입 최하급보다야


국산 어정쩡한 다초점들이 같은 값이면 좀더 나은 스펙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은 손님이 등돌리고 나갈때 머릿속에


남는건 브랜드밖에 없으니 돈이 없더라도 브랜드 렌즈를 팔아야


나중에 좋은 브랜드를 값싸게 했다고 기억이 남을거라 주장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했지만 나로선 만족스럽진 않았다.


인근에 저가 안경원보다 보통 안경원이 더 많았는데


사장 눈에는 ㅇㄸ만 보이고 모든 전략이 그것을 의식한 듯 싶었다.


그때까진 ㅇㄸ이 하나 서면 주변 상권은 영향을 꽤 받던 시기다.


열에 한둘은 눈을 뜨고 프리미엄 안경원으로 성장을 보채지만


나머지는 빠르게 겐또가 나와서 문닫고 나가던가


같이 죽어보자고 흑화했다가


진짜 자금이 바닥난 쪽부터 문을 닫고 나갔다.


이 사장도 여기까지구나....




그동안 만난 사장들을 생각해보면


ㄷㅂㅊ가 서울 석권을 목표로 초대형 안경원을 세우자


오히려 잘됐다고 ㄷㅂㅊ랑 한판 붙어보겠다고 그 맞은편을 인수하고


안경원을 차려버리는 분당의 사장



돈에 혈안이 되어 손님들 호구만들 궁리만 하면서


사기와 임금체불을 밥먹듯 할 망정, 안경밥 먹은 짬빠는 있어서 선수급을


알아보고 원장으로 전권을 맡길줄은 알았던 판교의 사장



회사 소속이지만 원장 책임제로 자기 안경원의 전반적인


퀄리티와 고객 수준을 통제하며 숫자가 적당히 이쁘게 유지되도록


컨트롤에 능숙했던 용인의 사장 A



이런 사장들과 비교하면 배포나 능력치가 너무나 후달렸다.


그는 지방에서 꾸준히 성장하긴 했지만 시대적인 흐름에는 완전히 뒤쳐졌고


시골에서나 먹혔던 자신의 성공방정식을 바꿀 줄 몰랐다.



그 쯔음 친구분으로부터 슬슬 이곳의 내막을 듣기 시작했다.


젊은 부장격인 그 안경사는 사장의 전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동안 그 점을 이용해서 근무하던 다른 안경사들을 계속 모함했고


덕분에 두명이 두손 들고 나갔었다는 것.


어쩐지 나를 보는 눈빛이 영 꺼림직하더라니.


사장은 계속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다른 직원들을 내보내고 있으니


점점 그 부장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건물이 이미 재개발 지구에 들어가서


인근 상점들은 정리하고 나간 것이었다고.


사장은 매장 이전을 할지 폐업을 할지 가늠중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되면 근무를 안할테니 비밀로 한것.


안그래도 마음속에 일찍 짐을 싸고 있었던 나는 그걸 카드로 쟁여뒀다.



한달이 되어 사장과 월급 얘길 했는데


사장은 세후 270만 주겠다고 했다.


내가 무척 불만스러웠는데 그때만큼은 내가 그것밖에 안된다고


일단 일하면서 매출 늘면 알아서 챙겨준다 윽박지르니 별수 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 더 들어오면 바로 그만둬야겠다.


(그러나 구인은 매일같이 올려도 이미 소문이 나서 반응이 없었다)


거래처 사람들은 나랑 일 얘길 하다 종종 언제 폐업하고 나가는지


묻고는 했다.


쉿!


나는 조용히 하란 사인을 보내고 나는 그거 모르는 사람이어야 하니


나한테 얘기한적 없는거라고 입막음을 시켰다.


어차피 이렇게 다 알게 될껀데 나한테 비밀로 하겠다니 참....



이전에 구리에 처음 왔을때는 강남에서 한참 군기가 바짝 들었던 상태로


눈에 뭐가 뵈이는게 없었다.


오자마자 매장 전체를 점검해서 비효율적인 문제들을 리스트를 작성하고


메뉴얼도 만들고 시스템도 개선했고, 또한 비용적으로 쳐낼 수 있는 것부터


다 정리하고 엎었다. 여벌 렌즈들 재고도 파악해서 필요없는건 반납하고


대신 잘나갈만한 여벌들로 바꾸고


재고 비용을 거래처가 떠맡아주는 위탁 재고량도 파악해서


거래 규모 대비 위탁량이 적은 업체들은 불러다 위탁을 더 주던지


할인율을 더 주던지 쪼아댔다.


규모가 좀 되는 안경원들은 저녁에 택배를 수거하러 오는데,


택배비가 건당 3천원인게 시세 대비 비쌌었다. 나는 택배 담당자가 왔을때


그 점을 지적해서 재고를 해야한다 주장했고, 어리숙한 담당자는 마지못해


건당 500원을 내리기로 했다.


그때 매장 밖에서 담당자가 돌아가는 뒷모습을 봤었는데


어깨가 추욱 쳐진 뒷모습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는데


내가 너무했나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그걸 같이 본 사장이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뭔가 내가 살던 세상이 깨지던 충격이 있었다.


인간적인 최소한의 연민도 없는 인간에게


푼돈 안겨준들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일까


그래서 구리에 다시 돌아왔을때 나는 그때의 군기 바짝 오른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치밀하고 예민한 성향 어디 안가서 문제 있는건 꼭 고쳐놔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거래처들을 옥죄거나 갑질을 피하고 있었다.


적당히가 있다.


같이 살 수 있는 적당히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야가 넓어지고 전체 흐름이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구리의 손님들은 역시나 말을 안들었다.


아니 내가 어렵게 하는 것이지.


사위가 많지만 처방을 하려고 하면 4만원이 아까워서 튕겨나가던가


안과부터 쪼르르 달려가버리니(다시 올리가 없지) 골치가 아팠다.


한번은 20대 중반 쯤 되는 남자애가 처음 안경쓰러 왔는데


근시는 높지 않았는데 -5디옵터 육박하는 난시였다.


와.....


와........


여태 안경을 안쓰셨다고요?


학생때 두어번 시도하고 못썼다고.


무리해서 개인맞춤 팔고 저교정으로 출고한 뒤


2주 뒤 불러서 다시 난시 높여서 재교정 했다.


사장은 그런 방식이 못내 불만스러워했다.



한번은 다른 젊은애가 레이벤을 사왔는데


경사각이 오지게 숙여진 타입이었다.


레이벤에 앞으로 숙여진 그런 테가 많다.


난 매장에 들고오던 테를 보자마자 재빨리 손님을


뺏어가듯 낚아채갔다.


저거 분명 다른 사람이 받으면 걍 처방대로 넣는다는 직감


경사각이 오지면 제일 우선은 개인맞춤 렌즈로 그 경사각을


반영하는 렌즈를 주문하는 것이지만


행색이 딱 봐도 10만원 후반대 렌즈 읊는 순간 ㅇㄸ으로


튈게 뻔해서


그런 경우 경사각을 고려해서 난시값을 조정한 여벌렌즈를


넣으면 그나마 낫다.


예로 검안해서 근시만 있다고 했을때, 근시 그대로 경사각이


숙여지면 수직 난시가 발생한다.


따라서 수평 난시를 넣어주면 수직 난시값과 합쳐져


근시만 교정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반대로 수평 난시가 있다 치면, 경사각을 적용하면 렌즈의


수평난시가 사라지기 때문에, 수평난시를 더 높게 처방해야 한다.


다들 모르고 나만 알면 여러가지로 피곤해진다.


모른체 하고 넘어가려면 내가 괴롭다.




이전에 일했던 강남 매장에 놀러갈 일이 있었는데


당시 새로운 원장이 와서 인사를 나눌 일이 있었다.


얘길 나누다보니 구리의 사장 밑에서 원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아 그 사장님?


예전에 대단하신 양반이었단 애매한 칭찬


그 오묘한 눈빛과 말투가 모든걸 말해준다.


너 오래 못있겠단 표정이 다 보였다.


나도 멋적게 웃는거 말곤 할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