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참! 난데없이 장문의 글을 독수리 타법으로 쓰려니 손가락 아프게 생겼군.

가끔씩 들어 와서 이런 글 저런 글 읽고 가아끔 댓글 쓰는 재미가 있었는데 내 글이 논란거리가 될 줄은 몰랐네.

우선 글이 길어질 것에 대해 양해부터 구하고,,,, 소위 3줄 요약 식으로 될 노릇이 아니므로.

다음 이왕 일케 된 거 한 사람 칭찬도 좀 하고 가자. 이일의 발단이 ㅇㅇ223.38님이 오성이 뭐냐고 물어보는 글을

올린 건데, 때문에 난 ㅇㅇ님을 아주 좋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게 모르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묻기를

꺼리기 마련인데 ㅇㅇ님은 용감하게 그것도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곳에 큰 소리로 물었기 때문이다. 앎에 때가

따로 있고 나이 학력이 따로 있고 수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궁금할 때 의문이 떠오를 때 알고 싶을

때 어디서나 아무나 붙잡고 물을 수 있다면 평생을 알아가야 하는(‘사람이라는 말이 살다알다가 합해진 말이다.)

존재로서, 본인이 알던 모르던, 좋은 학문적 바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은 묻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니깐. ^^

 

내가 가끔씩 댓글을 쓰는 이유는 본가(검갤)나 분가해 나온 여기나 언제부턴지 검도 자체에 관한 글은 거의 없고

곁가지에 관한 글들뿐 오래 전 검갤의 치열한 논쟁(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반말이 예의?였을 뿐) 같은 일은 볼 수가

없어서 어쩌면 내 글이 그런 건강한 논쟁을 되살리는 불씨라도 될까하고 잘못알고 있거나 어긋난 것 특히 오래 돼서

빠지거나 잊힌 것들을 내 나름대로 돌이키고 되살려 보고자한 것이다.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별 반응이 없더라. 그런데

전혀 뜻밖으로 오성에서 터졌네. 난 오성이라는 낱말을 이성이나 감성처럼 자주 쓰는 말은 아니라도 다들 알고 있는

낱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가봐. ! 그러더니 난데없이 칸트가 등장하고(내가 빌미를 주긴했지) 내가 무식한 게

아는 척하는 사람이 돼버렸네. 쩝쩝! 하긴 뭐 결코 내노라할 정도로 유식한 사람은 아니지. 해서 그 철학 전공자한텐 미안하다.

먼저 밝혀두는데 내가 쓰는 오성이라는 말은 칸트하고는 관계가 없다. 칸트에 관해서는 오오래 전 고딩 때 사회인지 윤리인지

그런 수업시간에 주어들은 거 밖에 없다.

글고 내 앎의 문제점은 욕이나 험한 말(ㅇㅇ223.39님이 ㅇㅇ223.38님의 본문 댓글에서 내가 험한 말 했다고 그러는데, 나 그런

말 한적 없다. 같은 닉을 두세 번 본적은 있다. ㅇㅇ도 많지?^^)로 두들겨 패지만 말고 바르게 가르쳐주면 고맙겠다.

 

 

각설하고, 오성을 한자로 悟性이라고 쓴다. 는 자전을 보면 깨달을 오라고 돼 있다. 문제는 이 깨닫는다는 게 뭐냐 인데, 조금

풀어놓으면 깨고 다다르다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고 어디에 다다르나? 이쯤이면 떠오르는 게 있을 텐데 의문, 어려움,

고통의 벽(난관)을 깨부수고 목표에 이르다 또는 목적을 이루다라고 좀 더 길게 풀어놓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예를 들면

좋겠으나 빼버리고 검도 수련으로 한정해보면, 처음 검도장엘 들어선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문과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터득하기까지의 벽이라고 부르는 난관들 또 그에 따른 고통이 있었을 것이고 모두들 그 많은 벽들을 훌륭하게

깨부수고 지금 그 실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초보자는 앞으로 그래야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각자 자리는 다르더라도 지금

이전의 것에 대해서는, 설령 충분치 않더라도, 거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그만큼의 깨달음을 각자는 얻은 것이다. 앞으로

많이 남아 있지만..... 어쨌든 매 고비마다 쉬고 싶거나 그만 두고 싶은 것을 참아 이기고(이를 위한 가르침도 여럿 있다.

백척간두 진일보 등) 열심히 연습하는 동안 어느 날 어느 때에 ! 그렇구나. 이거야! 이거였어!” 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뒤로는 그 어려웠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쉬워졌을 것이다. 그러면 신나고 즐거웠겠지? 그 아! 하는 그것이 . 그것을

불교의 선()에서는 돈오(頓悟)라고 한다. 이에 상대 되는 말로 점오(漸悟)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기를 앞의 것은 문득 알게

되었다고 하고 뒤의 것은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오오오래 전에 돈오다 점오다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어느 것이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기질과 근성(근기라고 한다)에 따라 다른 것뿐이다. 어쨌든 그 할 수 있는 성, 즉 힘

또는 가능성을 오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는 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면 모든 것에 다 있고 각각의 일 속에서

이런 것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 소위 실력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 좋은 지도자는 이것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오성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 다만 어떤 원인이나 이유(욕심, 두려움, 불만, 분노, 의심, 미련, 집착.... 따위)로 그것이

가려져 있고 두껍게 먼지가 쌓여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두께의 차이가 사람의 차이이며 실력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자기를 살펴서 그 두꺼운 먼지를 걷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수단을 공부(工夫: 중국말로 쿵푸라고 읽는다. 쿵푸는 중국무술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라고 한다. 그 공부를 시작하고 향상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을 오성이라고 한다.

 

깨달음이란 사물(인간도 개념적으로는 사물에 속한다)이 빗어내는 현상들 속에서 내가 하는 일과 그 일이 보다 나아질(어제의 나를

이기는 ^^) 수 있는 이치를 알아내는 능력, 달리 말하면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에서 같은 것을 찾아내는 능력을 말하는데

그것을 깨우는 오래된 가르침들이 있다. 앞서 말한 선에서 공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긴 글 싫어하니 하나만 소개하겠다.

알다시피 기본자세에서 죽도를 들고 있는 모양(죽도의 연장선이 눈을 가리키는)을 겨눔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같은 것을 일본에서는

(: 얽을 구)’라고 말한다. 그 뜻이 얽다인데 상대의 죽도를 내 죽도로 얽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자유를 빼앗는 걸 말한다.

이 이치를 가르치기 위한 말 중에 물 위에 뜬 통나무라는 가르침이 있다. 물 위에 뜬 나무토막을 본적이 있나? 그 나무토막을 누르고

때려보았나? 내 죽도의 중심과 자유를 빼앗기 위한 상대의 시도를 무력화하고 역으로 내 죽도의 자유를 되찾고 상대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법 또는 요령(에이가가 이걸 참 잘한다)을 물 위에 떠있는 나무토막이 외력에 반응하는 현상에서 찾아낸 것이다. 이와 같은 통찰과

능력을 한자로 라고 하고 우리말로 깨달음이라고 하며 그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오성이라고 한다. 같은 목적의 가르침을 하나

더 소개를 하되 풀이는 하지 않고 숙제로 남기겠다. ‘수월의 구(水月)’라는 게 있다. 나는 이 두 공안을 깨우치고 일취월장했다. 후자의

힌트는 아이러니하게도 댄스dance . 잘난 척해서 미안하다.ㅋㅋㅋ

 

이걸로 충분한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 정도로 말하고 맺을 것인데 사족인 줄 알면서도 이러한 것을 보다 폭 넓은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적

문제로 확대해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사회문제 중 하나인 부동산문제도 이런 식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나 

이 문제를 정부정책과 부동산투기꾼과의 싸움이라고 할 때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기 위한 대책이 나올 때마다 마치 이를 비웃듯

장소를 옮겨가며 벌어지는 소위 풍선효과를 물 위에 뜬 통나무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과연 누가 이길까? 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