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세계 테마기행인데요. 박민우씨인가요?\"

나는 아직도 이 전화를 받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사람도 아니다.
유명한 사람이 여행을 하는 다큐멘터리 정도? 그런데 나한테 왜 전화를 했지? 나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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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에 가보고 싶은가요?\"



그 전화속 목소리는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었다. 가만! 내가 아무 나라나 이야기하면 갈 수 있다는 건가? 물론 아니었다. 그냥 질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 것 저 것 물었고, 이 것 저 것 답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한 동안 연락이 없었다. 혹시 내가 출연하는 걸까? 그런 턱없는 기대가 얼마나 허황되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잠깐 헛물을 켰고, 며칠간 더 전화를 기다렸다. 마구마구 기대했던 나는 드디어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이미 기차는 떠났다. 몇몇 출연자 후보에게 전화를 했을 뿐이고, 나는 그 후보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 없는 5번째 후보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내정된 출연자가 사고를 당하거나, 불의의 출연 번복을 했을 경우 예비 5번 정도에 혹시나 하고 올려놓은 보험용 명단이 내 자리일 것이다. 예비 5번. 이게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그제서야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 내가 방송 출연자 5번 정도의 인물로 성장했다니. 이 정도 사실이면 충분히 대견해할만하고 재빨리 전화를 돌려 자랑할 가치가 있다. 특히 순진한 부모님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대학 합격 이후 좀처럼 없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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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방송 출연을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만다는 거죠.\"



실용주의에 입각한 가치관이 확고한 부모님은 그 빛나는 섭외 전화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도 몇 몇 친구들은 \'이야 방송 탈 뻔 했네.\' 라며 내 예상에 근접한 반응을 보였지만, 부모님은 거대한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결혼이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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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에 가죠. 박민우씨 말대로 재밌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달, 아니 거의 두달이 지나서 나는 이런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게 되었다. 내 앞에 4명의 후보가 함께 계모임을 했던 걸까? 상한 짜장면으로 식중독에 걸려 응급실에서 시름거리기라도 하고 있는 걸까? 갑자기 들이닥친 행운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사실 처음 그 정도의 섭외 전화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뻤고, 그게 나에게 걸맞는 행운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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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없어서 비즈니스 석에 앉으셔도 될까요?\"



그만, 그만. 이런 행운은 이제 그만. 보고타로 가는 에어 캐나다 비행기. 그 불친절하고, 나에게 여러번 상처를 주었던 항공사. 2년 전. 내 발이 비행기 복도에 거의 1mm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스튜어디스가 내 발을 쳐놓고 한참 째려보았던 그 에어 캐나다. 내 짐을 모두 분실하고 60만 원으로 끝내죠. 라고 잔인하게 돌아섰던 그 항공사. 그 항공사가 지금 나를 이딴식으로 기쁘게 해주고 있었다. 행운이 겹치면 불안하다. 그딴 식으로 내 불안감을 달구고 그러지 말란 말이야. 아, 비즈니석엔 저렇게 접시에 밥이 나오는구나. 저 은빛 탱탱한 포크와 나이프 좀 봐. 그리고 유리컵은 또 뭐야. 부자들은 요따구 것들을 즐기며 산다는 거지. 행운은 여기까지로 끝내자. 그나저나 나 정말 콜롬비아 가는 거 맞아? 여권 만료일이 지났거나, 여권과 비행기 티켓 영문 이름이 스펠링이 틀리거나, 아니면 EBS의 높으신 분이 불같이 화를 내며 출연자 바꾸라고 당일날 전화를 할 것만 같았다. PD 선생님이 \'민우씨 미안. 그냥 가줘.\'아직도 그런 이야기에 대해 나름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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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나와 함께하는 지재우 카메라 감독님. 무려 SBS 마녀유희 카메라 총감독님. SBS의 베테랑 카메라 감독님이 나를 찍어 주신다. 선량한 인상과 달리 무섭겠지? 그래도 그게 차라리 나아. 이 불안한 행운은 여기서 끝냈으면 해. 보고타에 도착하는 첫날까지 나는 그렇게 불안해했고, 다행이도 내 행운은 딱 콜롬비아에 도착하는 날에 동이 나 버렸다. 지긋지긋한 고생이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랐다. 안녕 콜롬비아, 두근두근 보고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