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분쯤 후에 로베르토는 풀죽은 당나귀와 함께 등장했다. 수도 없이 가출해도, 귀신같은 엄마에게 잡혀오는 날라리 여고생 표정이로구나. 등 뒤에 짐은 또 얼마나 무거웠니? 방송장비까지 짊어진 그 꼴로 연애 좀 해보겠다고 도망간 너를 보니 그 와중에 넘치는 네 기운이 더 대단하구나. 원래 도착하기로 한 시간은 이미 지났다. 차라리 못 도착할 거라 생각하자. 포기하면 맘이 편해진다. 진창 같은 길로 그냥 밤새 걷는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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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아직 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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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못 참고 또 묻고 만다. 포기하라니까! 박민우. 오늘내로 도착 못할 거라 생각하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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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네가 말한 30분 다 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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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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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목마를 때 로베르토가 파인애플을 이렇게 깎아준다. 맛있어요

 

 

마음먹은 대로 착착 실천하고 살았다면 난 이미 공중부양도 했다. 정확히 저녁 10시 반. 우리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살았다. 그 곳엔 수십 개의 그물침대가 바베큐 통돼지처럼 매달려 있었다. 누구는 아직 잠도 못자고 씻지도 못했는데, 먼저 출발한 이들은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다. 잠 몇 시간을 이들보다 손해 본 셈이다. 질투심과 경쟁심이 불처럼 타올라 나는 마구 가방을 뒤졌다.

“쿠키 좀 먹을래?”

그 운동 신경 탁월하고 모든 것이 신나 죽겠다던 비앙카도 찌든 얼굴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웬만해선 풀지 않으려했던 비장의 오레오 쿠키를 풀었다.

“아니,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그래도 먹어. 밥 나오려면 멀었어.”

“아니, 안 먹을래!”

비앙카, 사람 무안하게 그런 식으로 거절하면 이게 다 내 차지로구나. 내심 다 먹어치우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맘껏 먹겠다.

“민우, 그렇게 먹고 밥 먹을 수 있겠어?”

나도 이렇게 먹고 밥 먹을 수 없을 줄 알았다. 이렇게 먹고 밥 먹을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스파게티와 소시지를 깔끔하게 다 해치웠다. 객관적인 내 배 사이즈와 먹고 있는 양을 실측해 보면, 사실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창자에 스파게티를 힘차게 밀어 넣어 내 스스로가 순대가 되고자 하는 4차원 퍼포먼스라고나 할까(너무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이러다 위가 뻥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먹어댔다. 그나마 다른 일행은 모두 자고 있어서 비앙카 정도만이 나의 미친 식욕을 서커스 보듯 입 벌리고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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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는 힘든 코스니까요. 서둘러 주세요.

‘힘든 코스’

‘힘든 코스’

‘힘든 코스’

내 어제의 고통을 능멸하는 잔인한 발언. 그래도 근사한 아침이긴 하다. 찌그러진 고철 냄비에 끓인 커피를 국자로 퍼마시며 밀림의 새소리를 듣는 기분. 그물침대에서 그럭저럭 잠을 잤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이렇게 잘 해 나가단 밀림의 타잔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두 번째 날 아침은 열댓 명이 우루루 움직였다. 늦게 출발한 덕에 다음날 아침에 비로소 우리팀의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벨기에에서 온 가족, 네덜란드 커플, 오스트리아 커플, 콜롬비아 남매, 스위스 여자아이, 비앙카, 나, 스태프, 가이드 등등(세 보니 열 일곱 정도네)병정개미 먹이 찾아 나서듯 그렇게 줄줄이 산길을 올랐다. 사람이 많으니 안심이 된다.

거기다가 벨기에에서 온 부부는 쉰을 넘은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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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열심히 산을 넘는데, 감히 나처럼 아랫것이 엄살 피우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 바람직하게 내 스스로를 닥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살이 거센 시내를 건널 때, 길이 가파를 때. 벨기에 노부부는 아들과 딸의 손힘을 빌어 산을 오른다. 가족의 이상적인 화합과 교감을 보여주는 장면. 가끔은 할아버지 혼자 숨을 헉헉거리며 뒤쳐져 갈 땐, 포기하지 않는 노년의 열정을 보는 것 같아 코끝이 시큰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담배만 끊으면 괜찮을텐데.”

“지금부터라도 끊으시면 되잖아요.”

“그 좋은 걸 어떻게 끊어. 담배 한 대 있어?”

“...”

내가 담배를 핀다면 있는 것 다 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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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야. 비가 오지 않잖아.”

원래는 비가 매일 쏟아 붓는 트레킹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하늘이 우릴 도왔는지, 산행을 시작할 땐 비가 멈추고, 숙소에 도착하면 비가 쏟아졌다.

“모기도 생각보다 심하지 않은데.”

첫날 우리는 모기 없이 쾌적하게 걸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엄청난 모기떼 역시 씨우닷 페르디다 트레킹의 유명한 장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둘째 날이 되자 첫날 참았던 모기들의 대규모 침략전이 시작됐다. 방심했던 먹잇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회심의 기습공격을 하자는 것이 모기들의 전략인 듯 했다. 안심했던 일행의 맨 피부는 재빠르게 모기자국으로 뒤덮였고, 뒤늦게 모기약을 뿌렸지만 달려드는 모기들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온몸에 수박씨앗만한 반점이 두두둑, 양궁 단체전 결승처럼 정신없이 피부에 명중하고 있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이렇게 많이 물렸는데, 모기약이라도 드릴까요?”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벨기에 아저씨. 담배로 찌든 폐로 숨쉬기도 고약하실텐데, 그 흰 다리에 유난히 많은 모기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물리긴 많이 물렸는데, 못 느끼겠어. 그냥 놔둬 보지. 뭐. 어떻게 되나.”

이 아저씨, 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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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좀 없나요, 물?”

맞다. 촬영 중간에 힘들어 잠깐 바닥에 놓았던 물통을 깜박하고 두고 왔다. 산행을 하면서 물이 없다니. 좀 으슥한 곳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있으면 그냥 입을 대고 마시면 됐지만, 때로는 그런 식수원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목은 마르고, 물통은 없다.

“아저씨 물 한 모금만 주세요.”

물은 전쟁터의 총알 같은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할당된 총알이 떨어지면 그런대로 버텨내야 한다. 총알받이로 죽어도 할 말 없다. 총알받이로 죽기 전에 한번 더 거지처럼 부탁해 보기로 했다. 낯선 사람의 물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 하다니. 박민우 뻔뻔하다.

“아저씨, 물 좀 없나요?”

“이거 다 마셔.”

한 통을 통째로 준다. 사랑하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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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물 좀 없어.”

그리고 삼십 분쯤 후에 물을 달라며 벨기에 아저씨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저씨 있을 턱이 없잖아요. 주신 건 보는 자리에서 다 마셨는데. 이 특이한 아저씨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같이 시냇물에 고개 쳐 박고 물을 마시고, 카메라 감독님 담배를 뺏어다 아저씨께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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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

“그런데 왜 오셨어요?”

“애들 부모님 나라니까. 저 두 아이 모두 콜롬비아 고아들이었어. 입양했거든. 아이들에게 부모의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어. 부모도 찾아주고 싶은데, 아직까진 못 찾았어.”

“아빠, 그런 이야기는 너무 사적인 거잖아요?”

우리는 모두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아직도 십대인 딸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더니, 급기야 울면서 뛰쳐나가 버렸다. 괜한 말로 저녁 식사 시간을 망쳐 버린 것 같다. 내 탓이다. 어쩌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나보고 담배 좀 줄이라고 그래서 못 줄인다고 그랬더니 저러네.”

독일어로 이야기해서 전혀 못 알아들었지만, 분명 내 탓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찾지 않는 친부모의 나라에서, 자신의 출생까지 들먹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나저나 자네 친구한테 담배 좀 더 있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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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트레킹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내렸고, 비앙카는 어쩐 일인지 비를 철철 맞으며 숙소 바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우는 거야, 비앙카?”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

“그럼 약을 먹어야지.”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 사실은 남자한테 채였어. 헤어지자고 한 건 내가 먼저였는데, 한 달 후에 내가 다시 합치자고 했더니, 다른 여자 생겼대. 용서가 안 돼. 엉엉.”

“그런 기본도 안 된 놈 때문에 울어, 네가 잘 살아야지. 네가 행복해야 그게 복수가 되는 거야.”

“복수? 문제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미워져야 하는데 그게 안 돼.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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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길을 걷지만 마음은 모두 달랐다. 나에겐 오로지 촬영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멋진 장면이 얼마나 나올까?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모두에게 주어진 고통의 무게만 최고일 거라 여겼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여행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체력이 바닥나고, 한계가 드러날수록 우리는 진실해질 것이다. 그리고 경계심 없이 바짝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트레킹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헤어질 것이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지금 이 순간을 대부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만큼은 내가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다. 비앙카는 내 어깨에 기대어 꽤 오랫동안 울었다(좀 들어가서 울자, 비 오잖아).

 

(에고 아무래도 마지막 편은 월요일 오전 중에 올려야 할 것 같아요.)</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