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말
잠깐의 걷기 여행기
아르헨티나의 중부지방은, 계속 이런 풍경이었습니다.
초원지대가 전부인 곳에서 묵묵히 달렸습니다.
사실, 이때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국 전 영상일을 하고 번 돈으로 온 여행인데
임금이 들어올 날이 지났는데도 제때 들어오지 않아서 자금이 모자랐습니다.
돈이야 어찌어찌 빌려서라도 마련하면 되었지만,
그보다 더 스트레스 받는 것은 사실 여행이 조금 길어지면서 지루함도 느끼고 즐거운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캠핑할 만한 좋은 장소를 찾아내는 소소한 즐거움은 있었지만,
돈 관련과 외로움과 지루함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길도 안좋은 상태이고...
정신을 꽉 잡지 않으면 그냥 여기서 여행을 포기할 수도 있을것만 같았습니다.
저의 자전거 여행의 목적은 그냥 여행이 너무 좋아서 하는, 수단자체가 목적인 셈인데,
이럴 경우 목표의식이 흐릿해지면 종종 고생하고 있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낄때도 있습니다.

아무말 없이 자전거를 타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는데,
어느새 제가 왜 우수아이아에 가고있는지 정확히 답을 못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이 자전거 여행을 통해서 제가 얻으려는 '답'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겠죠.
론니 플래닛이 시켜서 한 자전거 여행은 아니지만,
저 버스여행자들은 상상도 못할 것들이 대체 무엇인지.
항상 저 상상도 못할 것들이 뭔지 궁금했습니다.
또 우수아이아에서 여행이 모두 끝났을 때,
내가 '것'들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구요.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외로움과 지루함이 모두 여행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전거여행의 과정은 인생 전체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계속 되는 것이 그렇고,
언제나 좋은일만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르막은 천천히 올라가야 하고 무지 힘들지만
내리막은 짜릿하고 신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는 점도.
여행 초반에는 훗날을 고대하고
여행 후반에는 여행 초기를 그리워하며
빵빵한 장비로 편하게 여행하는 사람,
보잘것 없는 자전거로도 잘만 달리는 사람.
비가 오고 길도 안좋을 수도 있지만,
곧 다시 좋은 날씨가 나타나고 좋은 길도 나온다는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연은 천문학적인 숫자의 확률이라는 것.
내가 계획한 것과는 굉장히 다른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
여러가지 갈림길과 이정표가 있지만,
어떤곳으로 향할지의 선택은 온전히 자기 몫이라는 것.
아무리 골치아픈 일이 많이 생겨도
심지어 자전거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여행자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래서 저는,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며칠간의 여행기에는 쓸 것이 별로 없더군요.

멘도사에서 이만큼 왔습니다.
약 1100km정도 왔네요.
12월 28일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 (San Martin de Los Andes)
황량한 지역이 쭉 계속 되다가 호수와 나무가 많아지는 지역이 나옵니다.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라는 호수마을에서 약 이틀간 묵고, 다시 남쪽을 향해 떠납니다.

저의 목적지는 까레테라 아우스트랄.
칠레에 있는 유명한 길로 자전거 여행자들 사이에서 파키스탄, 인도 북부쪽에 있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와 함께
꼭 달려봐야 할 길로 유명합니다.
소 바베큐가 유명한 나라답게,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렇게 아무렇게나 싸돌아댕기는 야생소인지 모를 녀석들이
도로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참...맛있겠다...헤헤
아르헨티나의 집들은 유럽의 그것들 처럼 예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지만,
아르헨티나만의 특색이라던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호수가 정말 크고 많았습니다.
빙하가 녹은 물이라 그런지 색도 새파란색이 감도는게 볼만하더군요.
곳곳에서 물을 마실 수 있는 포인트를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몇 안되는 장점중 하나.
항상 물을 큼지막하게 지니고 다녀야 했던 사막보다는 좀 더 물에 관해서 여유롭습니다.
수질도 좋구요.
어느덧 지루함과 외로움에도 많이 익숙해 졌습니다.
처음에는 충분히 예상하고 왔음에도 익숙하지가 않았습니다.
셀카한방 찍고 다시 자전거에 오르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바퀴가 터지는 소리인 줄 알고 타이어를 만져보았으나 아무렇지 않은 상태.
그런데 바퀴가 계속 브레이크에 닿습니다.
심하게 뒤틀려버린 휠.
알고보니 스포크가 하나 부러져 있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스포크가 부러진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굉장히 당혹해합니다.
그간의 자전거 여행은 모두 40일 안에 끝나는 짧은 여행이어서 스포크가 부러지는 것에 대해
딱히 대비하지 않았는데,
비포장이 대부분인 남미에서 3개월 내내 무거운 짐을 싣고 험하게 탔으니
스포크가 안부러지고 버텼던게 신기하긴 하겠죠.
그래도 이런 인적드문 도로에서 스포크가 부러지니 난감한 상황입니다.
다시 산 마르틴으로 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리 왔고,
차도 몇대 안지나가고...제가 가진 장비는 스포크렌치가 전부인데...
통 답이 없는 상황인데 그 순간
자전거를 몇대 실은 자동차가 보여서 무작정 뛰어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스위스인과 아르헨티나인들로 구성된 이 라이딩 팀은 정말 고맙게도 제 자전거를 엄청난 속도로 고쳐줍니다.
차에 모든 수리장비를 싣고 다니니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만서도...
제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지갑에서 만원정도의 아르헨티나 돈을 건네자
극도로 사양하면서,
대신 자신들의 팀을 꼭 기억해 달라고.
물론 거기서 무작정 돈으로 성의를 보이려 했던 저의 태도가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정도로 감사했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앞 자전거 팀을 따라잡아야 한다며 뿅 하고 사라지는 은인들.
그런데 이게...한번 바퀴가 부러지니까
갑자기 자전거타기가 조심스러워 집니다.
사실 무게 생각 안하고 짐을 이것저것 마구마구 실었었는데,
이제 배분을 좀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팁을 한가지 드리자면, 저는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양쪽 패니어의 짐 무게 배분을 언밸런스하게 하면 더 부러지기 쉽더군요.
저같은 경우 한쪽에만 무거운 것들을 잔뜩 실었었는데 그게 원인이었나 봅니다.)
산이 여기저기 많은 지역이라 업힐과 다운힐의 반복입니다.
미라도르(Mirador)는 전망대 입니다.
호수를 관망하는 이런 전망대가 곳곳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잠시 쉬어가기도 괜찮았습니다.
과장해서 말하면 그냥 발에 채이는게 호수들.
한 2시간 남짓 갔을까.
아까와 똑같은 소리가 또 나며 바퀴가 다시 심하게 휩니다.
두번째 스포크 부러짐...
하루에 두번이나 스포크가 부러졌다는 건
여태까지 바퀴에 쌓여왔던 피로가 누적되어서 이제 그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
아마 다른 모든 스포크들의 장력 상태도 엉망일 것입니다.
문제는 스포크 장력 조절은 저같은 수리 초보자가 함부로 건들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전거 수리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신중하게 하는 걸 많이 봐왔기도 했구요.
아까처럼 자전거를 실은 차가 지나가는 행운도 이번에는 기대하지 못할 듯 합니다.
안그래도 여행 위기 상태였는데 자전거마저 이모양이니 갑자기 짜증이 확 나서
일단 내려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볼까 하고 C발C발 중얼거리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한 베낭여행자들이 옆으로 지나갑니다.
음...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제가 자전거를 질질 끌며 슬그머니 다가가서
자전거가 망가져서 그런데 같이가도 되냐고 묻자
영어에 자신없어 했지만 그들은 좋다 상관없다며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전거가 망가진 덕분에,
자전거 여행자에서 한순간 베낭여행자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다른 종류의 여행자가 된 것이 은근히 들뜹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이었고, 이곳에서 약 400km 떨어진네우켄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몰랐던 정보인데, 제가 가는 이 길이 굉장히 유명한 길로,
바로 씨에떼 라고스(7개의 호수)가 있는 아르헨티나의 관광지라고 합니다.
왼쪽부터 니콜라스, 헨리, 호세.
이들의 관계는 헨리의 조카가 니콜라스고, 호세는 헨리의 절친이라고 합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스페인어와 영어단어를 섞어가면서 대화를 진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 배운 스페인어도 많았구요.
굉장히 친절하게 아르헨티나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보구요.
특히 니콜라스와는 나이가 어려서 (22살) 와우 얘기를 하면서 엉뚱한곳에서 공감대를 찾았습니다.
뭐 저야 와우는 군대가면서 그만둬서 안한지 7~8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옛 기억이 새록새록 돋더군요.
역시 음악, 게임같은 것들 아래 세계인은 하나.
그냥 혼자 걸었다면 지루할 뻔 했던 길이었지만,
오랜만에 사람들과 함께 하니 정말 천천히 걸으면서 하는 여행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속도를 내는 것에, 그리고 힘든것에 굉장히 민감한데,
걷게 되면 어차피 속도는 일정하니 크게 신경쓰이지도 않구요.
(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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