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다.

여행기는 여행을 다녀온 후에 쓰는 게 맞지만, 난 아직 떠나기도 전이다.

심지어 언제 떠날지조차 정해놓지도 않았다. 정하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380만원

그나마도 전역할 때 쥐고있던 420에서 의미없는 pc방비 같은 것들로 조금씩 줄어들어버린 380

분명히 빛날줄만 알았던, "전역"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돈.

난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것만 같아서 무섭다.

단순히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하루들이 쌓인 인생이 될까봐

인생의 끝에서 후회할것만 같아서 무섭다.


1.

여행은 뭘까?

정말 간단한 질문이지만,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입대하기 전, 혼자 배낭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도 제대했고..

이 2번의 길. 대충 여행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했던 길의 시작점에서는 변화를 확신했었다.

부산까지만 도착하면 분명 내 인생에도 의미가 생길거야 라고 믿었었고

전역하기만 하면 하루하루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누릴 수 있을거야 라고 확신했었다. 누구나 그랬었듯..

지금의 나는 2019년을 살고 있다.

17년도의 고생길도 18년도의 군장길도 모두 확실히 지난 지금이지만 난 너무나도 똑같다.

삶의 의미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성장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누워있고

나이만 바뀌어있는 모습으로 pc방을 간다.

여행만이 내가 바뀔 수 있는 길인것만 같아 부모님께 3월 말쯤에 크로아티아로 1달간 여행을 간다고 말했지만.. 난 바뀌지 않을것을 알고있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가장 비슷한 느낌인것 같다.

우리 엄마가 끓인 소고기무국과 배추된장국은 비슷한 맛이 난다.

국물만 먹으면 조금 헷갈릴 수도 있을 정도로..

결국은 비슷한 맛이 나는데 그 와중에 소고기 몇 점으로, 된장 조금으로 완전히 다른 이름의 음식이 되어버린다.

여행장소나 기간따위는 상괸없다.

엇이 내 스펙에 추가되던 결국은 지금과 똑같은 일상,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올게 뻔한데..

과연 여행이라는 것이 돈낭비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맘 편하게 돈을 써본적도 마음 가는대로 살아본 적도 없는 내게 여행이란 뭘까?


2.

380만원으로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유럽 미국 동남아 남미 어디든 갈 수 있겠지.

그래서 난 모두가 많이 간다는 유럽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날짜가 지나갈수록 겁이 났다.

군대에서 돈을 모을 땐 분명 냉동식품이나 과자같은, 자잘한 돈을 아껴 전역하고나서 더 가치있는데 쓰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막상 이제와서는 왜 가는지, 가서 뭘 하고 싶은건지, 어디로 가고 싶은건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냥 남들따라 적당한 곳에 가볼까 라는게 솔직한 내 마음.

가치라고? 지금 어디로 갈지조차 막막해 외면하면서 과연 후회없는 여행을 보내고 올 수 있을까?

그 길마저 끝나고 다시 돌아온다면, 정말로 더 이상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으리라.

군필의 22살은 이제 '평범하게' 살아가며 1년 3년 10년 20년을 필름 끊긴 사람처럼 뭐 했는지도 모른채로 흘려보내게 될 테지..

난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그러면 세계일주를 해 볼까? 라고도 몇 번이나 가볍게 생각했지만, 역시나 내가 쥔 알량한 무기력함과 안전을 잃기 무서워 난 침묵했다.


3.

난 돈을 벌고 싶다.

이 간단한 문장으로 지금껏 꽤나 많은 거짓말을 했다.

나한테건 다른 사람에게건.

부모님따라 인문계를 와 남들 말 따라서 이과를 선택한 나는 항상 엎드려 자기만 했다.

고2쯤이었나, 평소처럼 자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깨우며 나중에 어떻게 살려고 이러느냐고 물었다.

생각해본적이 없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세계일주를 하면서 살 거라고.

그때는 단순히 세계일주만 하면 일지로 떼돈을 벌 거라고만 생각해서 아무 걱정이 없었다.

안되면? 뭐 어떻게든 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패했으며 생각한 적도 없었던 힘든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군대나 갔다오자 싶어 입대 날짜를 대강 생각해두고 그만두었다.

군대만 갔다오면 철들었을테니까 알아서 잘 살겠지.. 날 믿었다기보다는 고민하기 싫었다.

그리고 입대 전이니까 싶어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냥 tv에서나 보던 부산에만 도착하면 모두가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며 알아봐줄 줄 알았고,

여행기를 쓰면 대박이 나 부자가 될 줄 알았다.

분명 그렇게 느껴 출발했던 건데,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그간 봐왔던, 나보다 훨씬 능력있고 잘나가는던 속물들과 똑같은 모습인것만 같아서..

다르다고 생각했던, 능력은 없어도 순수하다고 자위하던 내 모습이 깨질 테니까.

그 쯤부터 돈과 명예욕을 숨기며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난 자아를 찾는다며 여행을 다녀와 여행기를 쓰고, 대박이 나 TV에까지 나오는 것을 상상한다.

그냥 병신.

나도 돈과 명예를 얻어 당당해지고 싶은데.. 허무할 것 같다고 자위한다.

그러면서도 운동, 공부, 식습관, 게임.. 고쳐야 할 것들마저 하나하나 너무나 큰 벽이기에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눈을 돌린다.

변하지도 않고 변할 생각조차 없다면 스트레스라도 받지 않겠지만 스트레스만 받고 있다.

20살이 지난 삶이란건 원래 이렇게 무기력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