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을 나섰을 때는 이미 어둑해졌을 즈음이었다.
막상 돌아가려니 트램 정류장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또 어찌저찌 정류장을 찾으니 트램 번호를 모른다는 생각도 떠올랐고.
하지만 그냥 탔다.
일단 이거다 싶은 트램으로 타서 징수원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물었다.
어디서 내려야 하냐고.
그러자 무서운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다가 말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다시 말 걸기도 무안해서 일단은 앉았다.
아니라고도 안했으니까 맞게 타건가 생각했음.
중간쯤부터 이게 아닌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물어보기 무섭다고..!
그러다 중간에 어떤 손님하고 얘기하더니, 나를 가리키며 또 뭐라고 말했음.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고 난 러시아어를 못해서 소통이 안되니 다른 손님에게 통역을 부탁한 것.
알고보니 트램을 아예 잘못 탔었다.
대화가 아예 안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 된것도 아니었다.
그 손님은 영어에 서툴렀고, 난 러시아어를 몰랐다.
처음에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다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음.
그래서 그 손님을 따라 중간에서 내렸다.
징수원은 요금조차 받지 않고 내려줬음.
돈보다는 마음이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길거리에 다다르자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며 돌아갔다.
아마 일부러 안내해주려 다른 정거장에 내린 느낌이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데도 수고스럽게 만든 것이 미안했다.
그런데 뭔가 주변이 낯이 익었다.
설마
알고보니 낮에 헤멨던 장소였다. 바이칼행 버스 정류장 부근.
그러니까,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린 후,
계속 같은 장소 근처만 빙빙 돈 셈이었다.
짜증날법도 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차분하다기보다,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우마르와 가출? 한 후로, 혼자 러시아 국내선을 탄 이후로, 조금씩 겁이 없어지고 있었다.
낮과 지금이 다른 건 어두워진 것 뿐, 걱정할 건 없다.
다시 처음 바이칼에서 돌아와 트램 정류장을 찾을 때처럼 길을 물어봤다.
밤이라 무섭게 보일수도 있으니, 남자나 2명 이상인 사람들에게만.
도중에 또 친절한 여자 2명이 구글 맵으로 길을 찾아봐주었다.
그런데 어디쯤에서 타면 된다고 나와도 트램 번호나 가는 방향, 정류장까지는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러시아어라 내가 못 읽은것일수도.
여하튼 대강의 위치만 확인하고 뭐 아니면 택시나 타지 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다 보면 나오겠지.. 뭐 알아서 잘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걷고 있었는데 무언가 느낌이 또 왔다.
길이 눈에 익었다.
설마
아침에 트램에서 봤던 길인가?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지만 걸을수록 확신이 들었다. 이 길이 맞다고.
트램 까짓거, 못 타도 걸어가면 되겠네.
그닥 겁먹지도 않았지만, 겁먹을 것 하나 없다.
그러며 가벼운 기분으로 걷던 중, 한 외국인을 보았다.
러시아인 말고 다른 외국인. 왠지 모르게 러시아인 같지는 않았다.
느낌에 미국인같았음.
신기하다 하면서 지나가는데 또다시 느낌이 왔다.
정류장 표시도 없는데 왜 길 한가운데 서있는거지?
혹시 저기가 트램 정류장?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계속 앞으로 걸었다. 괜히 돌아가기 쪽팔렸음.
그렇게 가다, 고민하면서 발걸음을 늦추다, 멈춰서 고민하다 결국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뭐하고 있냐고 물어봤다.
느낌대로, 트램 정류장이 맞았다.
표지판이 없어서 번호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트램일거란 확신에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히 아침에 봤던 경로였으니까.
남자의 이름은 로버트라고 했다.
목도리와 코트, 큰 키, 큰 눈 이런 모습들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 알고보니 특수요원인 점잖은 중년을 생각나게 했다.
한 20분정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업무차 출장을 와있는데, 몇 번 왔었지만 트램은 처음이라고 했다.
항상 택시만 타다가 처음 트램에 도전해봤는데, 20분째 오지 않고 있다고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ㅋㅋ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기다리던 중이었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로버트가 택시를 타자고 제안했다.
이렇게까지 간격이 긴 건 이상한 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거절했다. 돈도 그렇지만 걸어가도 크게 상관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택시는 타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고.
그렇게 계속 기다렸다.
얼마쯤 시간이 또 지난 후, 로버트가 택시비는 전부 자신이 부담할테니 부르자고 다시 말했다.
갈팡질팡했다.
솔직히 좀 피곤하기도 한데...
그러다 그냥 부르자고 말하려는 순간,
마법처럼 반대 차선으로 트램이 지나갔다.
그리고 조금 뒤, 트램에 탔다.
트램을 타고 가면서도 많은 얘기를 했다.
영화부터 결혼, 나이와 취미까지.
기억에 남는 건 행복에 관한 말.
나는 오늘 바이칼에서 실컷 구르다가 왔다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로버트가 자신도 가끔 겨울에 보트와 스키를 타러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배낭여행이 상당히 힘들지 않냐고 덧붙였다.
난 힘든건가?
다른 순간이었다면 그렇다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적같은 도움들과 내 후련함이 뒤섞였던 그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난 젊음이 있어서 괜찮다고 말했다.
돈으로 스키와 보트는 탈 수 있어도 젊음은 살 수 없다고,
재미를 꼭 돈으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곧 로버트도, 승객들도 내리기 시작하며 중간부터는 앉아서 갈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안내방송을 알아듣던 (차이까 스브르럽스키 으르크넠) 어떡하던 내가 내려야지 생각했음.
징수원에게는 돈만 지불했다.
그러다 종점에서 내릴 곳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징수원이 도와줬다.. 다행히 목적지가 종점 부근이어서 금방 돌아올 수 있었음.
러시아 징수원 최고
결국 도착하니까 진짜 한밤중이었다.
이날의 일기.
내가 잠자리를 가리진 않을텐데.. 왜 계속 자면서 깰까? 깨도 피곤하고..
난 아직 그대로인데, 난 아직 한심하고 확실하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인데 벌써 끝나도 될까? 이젠 어떡해야 하지?
나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다. 나는, 끝나지 않는 트램 속에서 살고 있다.
케밥도 딱 80루블이 적당하다.. 이제 빵말고 케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지 10분만에 생각 바뀜.. 후회된다규.
이 세상 모든게 눈이야. 시골길을 지나던 어릴 적의 나와 눈밭에 누워있는 나..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공드리" 처럼..
그래, 아무리 꼬여있어도 발자국은 앞으로 간다. 뒤로 남는다.. 그리고 이어진다!
로버트, 트램 3분, 여자 2명, 버스기사님, 19살, 아주머니까지.. 기적을 찾아 만들어내는 느낌이야.
내 경험 덕분에 버스 정류장을 찾았았지. 친절했던 트램 요원 덕분에 또 친절한 친구를 만나고, 덕분에 2명을 만나고,
덕분에 로버트를 만나고 덕분에 트램을 탔고 덕분에 아주머니를 만나고.. 로버트도 정말 신기한 일이지.
어떻게 딱 그 시간에, 그 정류장에 있었던 건지.. 맞아. 재미는 꼭 돈으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어쨌거나 중요한 건, 난 살아있다는 것.
기억하자. 행복의 조건이란 것. 기적들 덕분에 기적같은 하루였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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