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실패했을 뿐,

그저 무모했을 뿐.

달빛요정의 노래를 듣다보면 소름이 돋는다.

ㅇㅇ처럼, 그들은 그들의 목소리로 담담히 내 이야기를 읇조린다




3월 31일 이르꾸츠크.



러시아 라고 하면 무엇부터 떠오를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러시아는 춥고 무서운 곳.

스킨헤드와 보드카, 백야와 푸틴.

핵무기와 방사능 차. 불곰과 고드름 같은 것들이었다.

인터넷에서 본, 불곰에게 쫒기거나 순식간에 끓는 물이 얼어버리는 곳.

딱 그정도였던 것 같다.

거기에 버스에 몰려다니며 감시한다는 스킨헤드나 우라늄이 은은한 차도 있고

어딘가 지구멸망 시나리오에서 튀어나온 듯한 나라였다.

그런데도 생각 없이 출발했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머리에 뭐가 든건지..

아직 1주일도 안 되었지만,

그래도 이런 것 모두 서서히 깨져가고 있었다.

적어도 스킨헤드나 불곰이 튀어나올거란 생각은 안했음.



다시 바이칼로 출발했다.

조금은 익숙해진 길.

트램을 타고 버스를 타고 바이칼.

내 기분을 제외한 모든 건 어제와 비슷했다.

여전히 하얗게 얼어붙은 호수,

여전히 행복해보이는 사람들.

달랐던 건 나뿐이었다.

혼자 깊숙히 걸어가도

누군가와 같이 온 것처럼 뛰어다녀도 어제와는 달랐다.

무엇을 해도 그저 허전하기만 했다.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자꾸만 조바심을 갖게 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 바이칼 호수.

초조함과 압박감에 짓눌려 불안했다.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건지도 모르면서 마음만 들끓고 있었다.

더 천천히 거닐고 즐기다 왔어도 모자랐을 시간,

내가 스스로를 찌그러트리는 꼴이었다.

남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사진? 타임랩스? 인증샷? 쇼핑? 친구 만들기?

난 어느것도 자신이 없는데..

결국은 이런 고민에 휩싸인채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추위도 한몫을 했다.

반팔로도 따뜻하던 어제와 달리, 유난히 추위가 사무쳤다.

다른 건 몰라도 추위엔 강하다 자부했던 터라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제대로 하는게 하나도 없냐

개떡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 너머에 서 있는것도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괜히 수군대는 것 같았고 뒷담을 하는 것 같았다.

견디기 힘든 피폐함에 억지로라도 기분을 바꿔보려고 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전날처럼 돌아다녀봤지만,

그럼에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힘없이 호수 가장자리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떨면서 조금 더 돌아다녔다.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고.

호숫가 부근은 파도치는 모양 그대로 얼어붙어있던 게 신기했다.

사실 가고 싶던 곳이 있기는 했다.

호수의 우측 끝부분. 얼지 않아 얼음과 물의 경계가 뚜렷하던 곳.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기분에 포기했다.



내가 예민했던 이유.

이것저것 거창하게 적었다만 전부 핑계일 뿐이다.

실상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내 기분을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는 것.

온도도 어제와 비슷했고

사람들도 어제와 비슷했다.

심지어 가방까지 그대로였다.

오직 내 기분만이 달랐을 뿐.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바꿀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싫지만 손댈수가 없었다.

고작 이정도에 달달 떠는것부터

혼자 있자고 했으면서 계속 노래를 들었던 것도,

아무한테나 연락하고 싶었던 것까지 모두 실망스러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식재료를 좀 사기로 했다.

다이어트 가루로는 달랠 수 없는 갈증에 직접 해먹기로 했음.

삼겹살부터 된장찌개, 짜장면.. 은 무리겠지만 괜찮다.

뭐라도 좋으니까 해먹어보자.

거기다 열차에서 먹을 것도 사야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오늘 저녁재료부터 내일 먹을 것까지 터미널 근처 시장에서 모두 다 사자.

시장을 가기로 결심하고, 바가지 쓸 각오까지 마친 상태.

엄마의 마음으로 메뉴를 정했다.

남은 호밀빵에 잼을 발라 메인으로 먹고

양파랑 감자를 볶아서 소금 후추 간해서 사이드로.

비록 감자볶음 뿐이었지만, 내가 해먹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엄마가 해준 감자볶음.

길게 썬 청양고추와 들기름이 잘 어울리는 감자볶음.

훈련소처럼 엄마가 생각났다.

우리 엄마.

좋은 모습도 못 보여주고 항상 기죽은 것만 보여줬는데.

공부하기 싫다며 게임만 하고

대학교도 안 가고 집에만 틀어박혀있을 때 얼마나 걱정했을까

떠나올 때는 도망치듯 왔지만 돌아갈 땐 당당하게 갈거다.

다시.

매일 다시 돌아간다면 달라질거라고 생각만 해왔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내가 늙어죽을 때까지 없을 거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뿐. 앞옆뒤 같은건 다 상관없다.

이미 뒤져버린 내 시체들이 뒤따라오지지 못하도록,

달려야 한다.

내게는 그럴 가치가 없어도, 나를 믿어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래야만 한다.

엄마 보고싶다.



다시 돌아와서

구경하고 돌아다니다보니 생각보다 많이 사게 되었다.

감자 양파에다 딸기와 오디잼, 쿠키까지.

쿠키는 특히 진지하게 고민했다. 식감과 가격, 먹고 난 뒤의 끝맛까지.

결론은 초코칩으로 샀음.

바가지는 다행히 없었다. 만약 썼어도 만족했을 정도 싸게 샀다.

사실 흥정이랄 것도 없었음.

그냥 똥씹은 표정으로 가격 물어본 뒤 들고 놓고가 끝.

잼을 그렇게 500원 깎았다. 나머지는 실패..

감자 양파는 1킬로씩 샀는데, 각 500원 600원 꼴이었다.

딸기는 사치 좀 부리고 싶어서 샀음.

하나씩 둘러보며 기분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 생활을 책임진다는 느낌이 꽤 만족스러웠음.

이후로는 나름 가볍게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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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400원



호밀빵은 토스트기가 없어 편으로 잘라 전자렌지에 돌렸다.

그리고 살짝 녹인 치즈를 올려 잼을 발라 먹음.

감자는 반은 볶고 반은 삶았다.

볶은건 저녁으로, 삶은건 열차에서 먹으려고 비닐로 포장.

양파도 반으로 나눴다.

반은 소금간해서 윤기나게 볶고 나머지는 통으로 잘라서 구웠음.

후라이팬이 없어서 그냥 도자기냄비에 볶았는데 탄자국 남아서 닦느라 혼났다..

아 양파는 정말 매웠고 감자가 정말 달았다.

뭐 양파야 덜익혔으니까 그랬다 쳐도 감자는 색깔도 노란게 꼭 밤고구마 같았음.

양파는 갖고 다니기도 애매해서 전부 썼는데.. 1키로의 거대함을 깨달았다.

꾸역꾸역 양파로 배채움..

그리고 후식으로 크고 우람한 딸기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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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때는 크다고 좋아했는데,

막상 먹으려고 보니까 방사능 맞은 거 아닌가 싶었다.

달지 않고 셨다.

사실 전체적으로 다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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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



잠에 들기 전,

이 숙소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뜸을 들였다.

일기도 쓰고 티비도 보고, 방 안쪽에서 떠드는 소리도 듣고.

어느것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잔잔한 음악처럼 차분히 흐르게 두었다.

이틀 전 밤 군화신고 카운터에서 번역기로 말하던 것부터

오늘의 저녁까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모든 게 좀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이날의 일기.

오늘은 사로잡힌 하루였어. 감정에, 생각에, 관념에, 불만에.. 혼자이고 싶은 생각과 그러지 못하는 행동의 불협화음.

핸드폰으로 노래를 듣고 연락하는 것 모두가 진짜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지.

계속 짜장면, 삼겹살, 된장찌개를 생각하고 있었어. 마파두부를 봐서 그런가..


내일부터는 드디어 횡단열차야. 오전에 천천히.. 여유롭게 준비하고 출발하자. 충분히 먹을것도 있고, 먹고 정리하고.

러시아는 딸기 대박 큼.. 좀 무서울 정도로ㅋㅋㅋ. Lili 랑은 어떻게 될까? 글쎄, 잘 모르겠어.


돈도 사람도 물건도 집착하지 말자.

시절인연이 다했을 뿐이라고. 집을 떠나니 여러모로 많이 되돌아보게 되네.. 할 게 없어서, 불편해서 그런가 봐.

오늘은 괜시리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고 불평, 불만을 품기도 했으며 생각 행동 말이 전부 따로 놀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