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일. 횡단철도



살아가는데 거창한 이유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사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게 필요한 때가 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신의 아들, 거룩한 생명 그런 이유들로라도 포장해줬으면 하는 그런 때가.

목표와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살다보니 왜 살고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디즈니스런 사랑, 가슴뛰는 모험, 숨겨진 보물..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지만, 없었다.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 중 잡힌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공이 될거라 생각했던 20살 이후의 삶도

졸업장 하나 때문에 꾸역꾸역 나가던 고등학교때와 다를 게 없었다.

의미를 찾고 싶었다.

각성하는 주인공처럼 뭔가 계기가 될 것을 겪고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무거운 닻처럼 내려앉는 공허함, 깊숙히 뿌리박힌 불안함을 조금이라도 떨쳐내고 싶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 돌아가고 싶었다.



원래도 글밖에 없었지만, 열차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이렇다하게 찍은 사진도 없이 글만 잔뜩 있는데, 봐줄지 모르겠다..

최대한 줄여서 써보도록 하겠음.



나는 사교성이 없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어색함을 무시하고 친한 척을 할 정도까지는 못 된다.

어제 저녁, 활기찬 시작과 달리 어색했던 마지막 때문에 내려가기 좀 꺼려졌다.

눈치볼 것도 없는데 괜히 주눅듦..

불편한 눈 마주침에 어디로 먹는지도 모르게 아침을 먹고 올라왔다.

크게 한 일은 없었다.

1층의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창 밖을 바라보고, 꼬맹이는 핸드폰을 했다.

내 원래 계획은 일기, 그냥 생각, 멍하니 풍경 보기등이었지만 2층은 불가능했다.

뭔가를 쓰기에는 너무 천장이 낮았고, 창문을 보기에는 침대가 가로막고 있었음.

그러면서도 1층으로 향하기는 불편했다.

저녁무렵의 불그스름한 노을빛을 보거나

부드러운 밤어둠 속에서 내 삶을 되돌아보고 싶었는데

나는 어느것도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노을빛과 어둠은 1층을 내려가지 못하니까, 얘기는 내가 친화력이 없으니까.



2층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일단 낮아서 엎드리거나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워있자니 답답하고 엎드리자니 턱이 아팠음.

또 특별히 할 것도 없었어서 심심하기도 했다.

다른 현지인들은 보통 십자말풀이나 스도쿠, 노트북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현지인하고 얘기하자! 며 몸뚱이만 왔던 난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1층을 가자니 중간에 끼는 듯한 느낌에 불편했고.

결국 제대로 눕거나 옆으로 눕는게, 가끔 엎드리는게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우리 칸의 가족들은 오후에 모두 내렸다.

어색하긴 했어도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을테니까.

사실 심지어 모스크바까지 같이 도착해 안내받는 상상까지 했었다..

병신

그 후로는 별 말 없이 지나갔는데,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기억에 남는 건 굉장히 뚱뚱했던 2명과 얼굴이 빨갛던 사람, 키 크고 말랐던 사람까지 4명.

처음의 뚱뚱한 2명은 음식이 굉장히 많았고 뚱뚱했다.

치킨, 햄. 빵, 피클같은 거에 탄산음료.. 기타 등등.

내릴 때까지 먹다가 그대로 손만 휴지로 닦고 자다가 다시 일어나서 먹다가 내림.

중간에 옆에서 같이 라면먹었는데 내심 나눠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근데 안주고 다 먹더라..

아 가방에서 보드카도 숨겼다가 우유팩에 부어서 대놓고 먹기도 했음.

그렇게 홀짝대다 먹다가 자다 내렸다.


빨갛던 사람.

덩치가 크지 않아서 같이 앉아있기 좋았다. 덕분에 1층 생활 좀 했음.

원래 피부가 빨간 줄 알았는데, 보드카 때문이었다.

갑자기 품 속에서 보드카를 꺼내서 자랑해서 준다는 줄 알았는데, 안 줬다.

내릴 때까지 자고 전화만 하다가 내렸다.


말랐던 사람.

처음부터 내릴때까지 별 말이 없었다.

통화도 대화도 없이 조용히 앉아 창문만 보았다.

쿠키나 잼을 나눠주면서 말을 걸어보려 했는데, 통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릴 때까지 조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릴 때 good luck 이러면서 악수하고 갔음.

조금 감동했다.


그 이후로는 바뀌기도 많이 바뀌었고 분위기도 무거워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대부분 취해있기도 했고.



그래서, 이 쯤부터 옆 칸 꼬맹이들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알리나, 동생은 나스타.

언니는 별 생각없이 고등학생일거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중학생이었음.

뭐랄까 분위기가 한국 중학생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이도 어렸고, 특히 동생이 정말 잘 따라줘서 나름 재미있게 놀았다.

꼬맹이들은 내일 내린다고 했다.



여기서 부끄러운 것을 하나 말하려고 한다.

꼬맹이들하고 놀면서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해 혼자 설레발을 쳤음.

이 가족이 내릴 때쯤, 한번 놀러오라며 번호를 주거나 같이 내리자고 권유한다.

어차피 계획도 없는거, 따라가 게스트 하우스처럼 묵으면서 천천히 돌아다닌다.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낮에 근처도 산책하고.

쪽팔린다.



이 꼬맹이들마저 내일 내린다고 하니 섭섭한 와중에 신기하기도 했다.

나는 외국인이니 관광목적으로 타지만, 현지인에게는 이동수단이구나 싶었음.

그래서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금방금방 타고 내렸다.

아 애들하고 뭐하며 놀았냐면, 별 거 없었다.

언니하고는 그림 그려가면서 얘기하는게 끝이었고

동생은 찰흙놀이, 색칠공부.

사실 나는 언니하고 뭐라도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2층에서 내려오지를 않았다.

동생하고 찰흙이나 만지는게 끝이었음.

나름 얘기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레발이었나 싶기도 하고

이 나이에 뭐하는건가 싶어 부끄러웠다.

그래서 슬쩍 올라가서 나도 핸드폰을 잡았음.

사실 들어도 할 게 없어서 출발 전 담았었던 동영상이나 노래만 계속 돌렸다.

본 것 또 보고, 또 보고..

날이 저물 때쯤, 잠깐 놓았었지만 나중에 다시 집었음.

놓든 잡든 할 게 없는 건 같았지만, 그나마 잡는 게 덜 어색해서..

중간에 왼쪽 침대가 비어서 그림이라도 그려보려 갔었는데,

잘 되지도 않았다.

꺼내놓은 공책도 필통도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뿐인가.

냄새나는 양말도, 무거운 캠코더도, 투박한 군화도, 빡빡 밀어놓은 머리까지 모두.


이날의 일기.

"건전한 정신을 되찾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


누군가에게 바라기 전에 먼저 해주라는 말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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