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의 일지는 전날 새벽부터 쓰기로 했다.
잠들기 전이니 전날에 붙여서 쓸까 싶었는데, 새벽이면 다른 날이긴 하니까.
4월 4일. 횡단열차
전날,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잠들 수 있었다
굉장히 피곤한 머리와는 달리 몸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하긴 하루종일 핸드폰만 했는데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기가 저녁에 본 그렌라간도 한 몫 했다.
여하튼 피곤한데도 잠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던 상황이었다.
갑자기 차내가 조금씩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또 다른 정류장에 도착해가는 분위기.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1 저녁이 아니라 새벽인데도 분주해지는 몇몇 사람들.
2 여기저기 부스럭거리는 짐소리와 속닥거리는 작은 말소리들.
집어서 설명하기는 애매한데, 그런 분위기가 있다. 설명을 잘 못하겠음.
여하튼 나는 취침시간에 잠 못들고 불침번이 준비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사실 처음, 같은 칸의 가족들 이후로는 누가 내리든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소리가 옆칸 꼬맹이들도 내리는 듯 했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같잖은 꼴값이었다.
그간 얘기한 게 있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
근데 여기서도 무시당하면.. 진짜 쪽팔릴 듯.
아
결국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게 중학생한테 집적대는거냐 싶었음..
거기다 난 외국인이기도 하고.
다행히 생각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웠다.
하지만 결국 내릴 때 인사했음.
사실 자다가 돌아눕는 척하며 슬쩍 봤는데 들켰다.
그래서 그냥 손 흔들었음.
꼬맹이들하고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일어난 아침, 4월 4일.
그건 하루만 더 지나면 모스크바라는 뜻.
도착 예정시간은 새벽. 숙소 없음, 아는 곳 없음.
나는 고독하다.
황야를 떠도는 풀더미처럼 뿌리없이 방랑한다.
하지만 난 사람이다. 숙소도 식량도 필요하다.
그뿐인가.
혹한기에도 침낭에 핫팩 끼고도 벌벌 떨었는데, 패딩 하나로 러시아의 새벽을 버틸 수 있을까?
도착하면 뭐하지
이게 뭐냐
대체 난 뭐하고 있는거냐
현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들.
필수적인 고민들과 시덥잖은 고민들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가장 답답했던 건,
이런 고민조차 진정한 고독이라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고민조차 없어야 고독이라며 싸우는 꼴이었다.
결론적으로, 실제 하는 것 없이 스트레스만 받는 상황.
모르겠다.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숙소는 잡아야지.
방랑이면 숙소도 잡지 말아야지.
숙소조차 이런 식으로 쉽게 결정할수가 없었다.
삼각관계의 순정만화 여주인공마냥..
그러다 두통에 속까지 답답해지고서야 결정을 내렸다.
예약했음.
올릴 사진이 없어서 먹었던 거라도 올림. 저거 롤케잌이 진짜 진짜로 맛있었다.
나중에 귀국하는 길에도 사가지고 갔음. 안뭉개지게 신경쓰느라 힘들었다..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죽거나 다쳤..나 모르겠다.
암튼 조금이라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두 내렸다.
거기다 하루밖에 안 남기도 했고,
괜히 모르는 것 이상으로 어색해지는 것도 싫어서 조용히 있기로 했다.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
사실 횡단열차에서 가장 기대했던 게 혼자만의 시간이었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거기다 종점에 가까워지며 빈자리도 많아져 대부분 내려가 있었음.
앉아서 밖도 보고 동영상도 찍고 그림도 그렸다, 지금껏처럼.
그러다 일기를 쓰기로 했다.
생각없이 밖을 보다보면 벅차오르는 풍경이 있다.
비슷한 듯 계속 이어지는 눈 덮인 평지와 언덕, 영화같은 하얀 나무들..
그림으로는 표현을 못하겠어서 글로나마, 이 순간을 최대한 비슷하게 기록해두고 싶었다.
뭐 일기가 꼭 가계부마냥 일과표만 적으란 법도 없으니까.
또 밤에 몰아적는 것보다는 반반 나누는것도 좋지.
그래서 이것저것 적으려 해봤는데, 내 표현력으로는 무리였다.
그냥 일상이나 적자.
가계부같은 일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직도 반나절쯤 남은 오늘.
이렇게 된 것, 내 고민과 답답함을 적어보기로 했다.
굉장히 막연하기는 해도 일단 쓰여지는 것부터. 차근차근 적었다.
불안함과 초조함. 무기력함. 아마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할 단어들.
지금의 걱정. 당장의 가장 큰 걱정거리를 적어보자.
그건 내가 하고있는 행동이 쓸데없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것.
계속해서 언급했던 만큼,
집에서 하루종일 누워있던 때와 다를 게 뭔데? 라는 생각은 항상 한켠에 남아있었다.
남들은 저만치 뛰고 있는데 기껏 전역하고 한다는 게 계획도 없는 돈낭비
심지어 차라리 집에 있었으면 돈이라도 아꼈을텐데
이렇다하게 한 것도, 할 것도 없는 내 모습.
학교에서의 19살
집 안에서의 20살
군대에서의 21살
지금 이곳. 러시아에서의 22살
나이만 먹었지 달라진 게 없다.
병신같은 짓만 골라서 하며 돈낭비만 줄창 하는 꼴.
앞으로의 계획? 당장 내일 앞날도 모른다.
하물며 할 줄 아는것도 변변찮다.
같이 여행 올 친구도 없어서 혼자 왔는데 뭐..
이미 끝난거다. 나란 인간은 진작에 결말이 나버린 거다.
이런 식으로 부모님 등골이나 꺾으며 병신처럼 늙어 죽는 걸로.
이대로라면 영영 똑같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도, 돈을 벌어도 평생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겠지.
핸드폰으로 도망쳐도 결국은 돌아온다.
바닷가 어딘가의 부표더미처럼 떠다니며 나를 좀먹던 고민들.
조금이라도 불안해지면 숨 막히게 차올랐던 고민들.
그것에 대해서 써 보자.
만약에 내가 결혼해서 손자까지 보게 된다면,
늙어 손주들을 끼고 내 얘기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말할까?
이건, 곧, 어떻게 살아야 좀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란 질문이다.
나도 누군가의 앞에서 기죽지 않고 싶다.
불안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싶다. 행복하고 싶다.
스펙이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는 모습이야 어떻든 계속 불안할 뿐이다.
언제부턴가 느껴지던, 이빨 하나 빠진듯한 허전함.
이, 채워지지 않는 구멍을 채우려다보니 이렇게 불안한 것 아닐까
내가 왜 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생각해보자.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거기에 집중해보자.
왜 멋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알면 어떻게 살고싶은지도, 왜 허전해하는건지도 보이겠지.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
덴마의 지로, 하얀 늑대들의 카셀, 유희왕 GX의 쥬다이, 그렌라간의 시몬.
멋있다.
어째서인지는 생각해본 적 없지만, 생각해보자.
이 이후부터는 일기를 그대로 적었다.
따로 엮기보다 나은 것 같기고 하고 엮을 자신도 없어서.
이날의 일기.
열차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보냈어. 어제는 그렌라간도 봐서 그랬는지 가슴이 불타서 자기가 힘들더라고.
어제는 어제로 끝났어. 오늘은 새로운 하루지.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
그렌라간의 다원우주와 믿음. 이쯤 되서 다시 보니 또 새롭더라고.
한국에 돌아가면 망우리 공동묘지를 가 보려고. 하룻밤을 새고 나면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무서운 건 그때 가서 문제고.
해야 할 게 많지. 그동안 미뤄왔으니까.
다만, 지금은 지금에 더 집중할 때야.
생각대로 행동하자. 가치를 따라서, 중독에 이끌리지 말고. 내가 선택한 모든 순간들이 진실이다.
앞서 간 당신들의 흔적을 쫒아가겠습니다. 제게 행운을 부탁합니다.
그렌라간을 다시 보고 하얀 늑대들을 다시 읽으면서 알렉스가 말한 '의미'가 떠올랐어.
과거 전사들이 부여받던 의미.
(영화나 소설을) 다 보고 나서의 삶이 너무나 평범한 것도 꼭 거대한 모험이 없어서만은 아니야.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쫒는 가치가 있었어. 그들의 모험에 의미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브리다의 첫 시험이 어둠속에 혼자 있는 것이었지.
두려움은 자신이 만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내가 망우리를 가보려 했던 중 "두려움" 에 대해 생각한 것도 이거였어.
두려움은 감정일 뿐이라고. 있다고 해도 두려워 할 것은 없을 거라고.
난 정말 예쁜 길을 보고 있지만 찍지는 않아. 내 마음속에 담아둘 뿐이야.
집착을 없애고, 내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것. 그 뿐.
실패는 항상 내 교만, 오만함에서 시작되었지. "틀" 이라는 것도 실은 "나" 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거겠지.
특별한, 뛰어난 나..
이제 와서 돌아보면 살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몰라.
히치하이킹도, 길을 알려준 것도, 재워준 것도, Umar도, 수많던 이방인들도... 그렇게나 스스로 "아싸" 라고 생각했는데도 말이야.
이렇게나 나약했었지. 이렇게나 허세가 잔뜩 들어가있었어. 나한테는.
항상 생각이 대부분을 망치기 마련이지. 혼자 앞서 나가서.
차근차근 준비하고,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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