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4월 5일, 모스크바
말이 나온김에 먹을거에 대해 써보려 한다.
짐을 챙길 무렵에는 그렇게 중요해보이지 않았다.
그게 뭐 대수냐 싶었음.
그래서 컵라면 몇개와 소금통 하나, 다이어트 가루만을 챙겨 출발했다.
하지만 컵라면은 열차용이어서 제쳐놓고, 소금통은 그닥 쓸 데가 없었다.
다이어트 가루는 이틀만에 질려버렸고.
그래서 시도했던 게
자급자족.
그 시도가 감자와 양파, 딸기였다.
그런데 남은 걸 갖고 다닐수도 없고 도구도 필요함.
거기다 내 요리도 그닥.
현지 식당.
비교적 비싸다. 물도 추가요금이 붙음.
거기에 주문하기도 어려웠고 뭐가 뭔지를 모름.
무엇보다 통수맞을까봐 꺼려졌다.
케밥
가격이나 맛이나 그저 빛.
싸고 어디에나 있고 적당히 배부르다.
그래서 케밥만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순간 확 질려버림.
호밀빵.
빵이 짜다.
????????
사실 숙소를 찾으며 봐둔 식당은 있었다.
하지만 굳이 마트로 갔던 건, 잘 모르는 식당보다는 나아보였음.
푸드코트는 있겠지.
무엇보다 내 느낌에 덜 부담되었기도 했다.
마트로 가는 길.
보이는 건 거대한 창고들 뿐이었다.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보급창고 같았음.
가는 길에 사람도 없어서 이 길이 맞는건가 싶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고민하며 걸었음.
그러다보니 도착했다;
고민 따로 걸음 따로.
나는 따로따로 인간.
매장에 들어가서 먹고싶었던 건 익숙했던 음식.
한식까지는 무리여도 쌀이나 면 정도는 먹고 싶었다.
굳이 외국까지 나와서? 는 나도 안다.
하지만 먹고싶은걸..
둥근 웍을 타고 날뛰는 불길과 다그락거리는 국자.
윤기나는 황금색 쌀들과 곁들이는 야채들.
말이 필요없다.
하지만
식당밖에 없었다,
대형마트 안 푸드코트가 아니라 백화점 내 식당들이었다.
아..
또 혼자 겁먹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를 못하면서 번역기를 쓰지 않는다는, 내 같잖은 자존심.
쭈뼛거리며 들어가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글자를 시킨다.
못 알아듣는 표정이 나오면 당황해서 다시 아무거나 고른다.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는 음식이 나오고 나는 막 먹는다.
먹고나서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후회한다.
왜 후회하는지는 모르지만 후회할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뭐든지 시켜놓고 먹으면 그만일 것을
혼자 생각하고 결론지어 해보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겁 많고 자존심 세고 멍청하다.
3관왕. 축하는 안받음.
이런 생각들로, 결국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차라리 옆에 있는 마트에서 라면이나 사기로 했음.
그런데 이 metro라는 곳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냥 나왔다.
회원제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힘이 쭉 빠져 근처 의자에 걸터앉았다.
새삼스레 중앙에 있던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고 싶었어서 빵은 생각도 안 했었지만, 이렇게 된거 빵이라도 먹자 생각했다.
근데 와 크림빵 하나가 케밥 2개 가격.
평소였다면 그냥 갔겠지만 그냥 사먹기로 했다.
이럴때 비싼 것 좀 먹어보지 뭐.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빵집은 현금결제만 가능하다고 했다.
마침 갖고있던 현금도 떨어져가고 있어 근처 ATM에서 돈을 뽑기로 했다.
총 2대가 있었는데, 이상했던 건 1대에만 줄이 서 있었다.
왼쪽은 아무도 없는데 오른쪽에만 3명정도가 서 있었음.
뭔가 이상할법도 했지만 개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했다.
카드를 넣고 돈을 뽑으려 하는데 오류창이 떴다.
그리고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
카드도 돈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초기화면으로 돌아감.
다시 한번 출금을 누르니 카드를 삽입하라고 나왔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그럴수도 있지. 카드가 좀 늦게 나오는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떄까지는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알수없는 오류창만 뜨며 카드를 먹어버렸다.
내 하나밖에 없는 카드를..
사실 이쯤까지도, 귀찮다는 생각이 든 정도였다.
뭐 기다려도 안나오면 한두대 쳐보지.
진짜 재수없으면 사람 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건가.
이정도였음.
하지만 기다려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서히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뒤통수부터 등줄기를 타고 명치까지 비수가 꽂히기 시작했다.
심장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커져갔다.
아 이건 뭔가 잘못되고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다. 괜히 재수없는 생각이거니 떨쳐냈다.
먼저 ATM에 붙어있는 번호로 전화를 하기로 했다.
전화를 하는데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됐지만 중간에 끊기더니 이후부터 이상한 말만 나올 뿐이었다.
일단은 도움을 받자.
건물 뒷문쪽에 서 계시던 경비아저씨에게 가서 문제가 생겼다고 표현했다.
처음엔 귀찮아하시다 나중엔 직접 봐주셨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저씨의 합류 이후, 근처 청소 아주머니까지 오셔서 3명이 되었다.
나는 뒤에서 있었고, 두 분이 앞에서 보고 계시는 모습.
아주머니가 전화해보라고 하셨다.
전화했지만 알수없는 말이 나와 그대로 들려드렸음.
그랬더니 직접 본인 핸드폰으로 전화해주셨다.
그리고 대신 통화하시다가 중간중간 나한테 상황을 물어봤는데,
말이 안 통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넘겨받음.
영어가 가능한 직원이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카드를 먹었다- 나오지 않는다- 뭘 해야 하나-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ok ok 가 전부였다.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은행으로 가보라는 말이 끝.
너무 당연하게 은행으로 가라는 말에 당황해서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한테 상황설명.
그러자 이번에는 직접 통화하시며 뭔가 말을 하셨다.
하지만 별 소득은 없는 듯, 아저씨와 나를 번갈아보며 끊으셨다.
옆에 있던 유심 가게에도 뭔가 말 하셨지만 , 거기서도 고개만 절래절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ㅈ된듯.
두분 다 일하시다 온거라 곧 돌아가셨다.
신경쓰이는 표정으로 가셨음.
하지만 가기 전에 새 동료를 만들어주셨는데,
내 또래쯤 돼보이는 전동 청소기에 탄 친구였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만이 반복되었다.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나와 이 상황에 화가 났다.
하필이면으로 시작한 푸념들이 꼬리를 물고 억울함을 키워냈다.
빵 하나 사먹는 것조차 안된다는건가.
조금 있다가 표정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내가 ㅅㅅ 친구가 ㅇㅇ
ㅇㅇ : 여기 전화해도 소용없음
ㅅㅅ : ???
ㅇㅇ : 차라리 여기 은행을 가봐
ㅇㅇ : 저 뒤쪽 문으로 가서 쭉 가면 나옴.
ㅅㅅ : 아..... 고마워
그리곤 조금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하지만 어디로 가라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자동으로 튀어나왔음.
ㅇㅇ은 이미 가버렸고, 나는 길을 모르고..
모른다고 했어야지 멍청아.
일단은 움직였다.
못알아들었다면, 다시 물어보는게 가장 좋겠지만
이미 알겠다고 한 상황에서 다시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듯..
하지만 쭈뼛거리고 있는것도 뭔가 이상했다.
지도로 찾아가자.
ATM의 은행은 씨베르뱅크라는 곳. 바로 출발했다.
지도를 따라 커다란 철길을 만나서 꺾고
대형 터미널 근처처럼 음식점들이 모인 골목을 지나
쭉 따라갔는데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요 없습니다.
?
은행이 다른곳으로 옮겼는데, 지도에는 이전 장소로 표시된 모양이었다.
처음엔 또 핸드폰 문제인가 싶었지만 로드뷰나 블로그를 보니 그건 아니었음.
이쯤되니 지치고 배고픈걸 넘어 머리가 멈춘 느낌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짜증이고 뭐고 그냥 웃겼다.
웃으면서 모르겠다 하고 그냥 걸었다.
어딘가에 있겠지 뭐.
걸으면서 lili 에게 연락했다
위기에 빠진 것 같다고.
인터넷마저 끊긴 것도 이 부근으로 기억한다.
사실은 데이터를 다 쓴 것이었는데,
무제한으로 끊은 줄 알았던 난 핸드폰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여하튼 모르는 곳에서, 돈도 한푼 없고 데이터도 안되는 상태.
인터넷마저 문제가 있을거라 생각하기 싫었다.
계속 시도해보다가 그냥 걸었다.
다행히도 걷다보니 나왔다.
과정에 비해서 좀 심심하게 도착한 감은 있는데,
어쨌거나 은행이 조그마한 곳도 아니고 눈에 잘 띄어 찾을 수는 있었다.
이제 끝났다.
귀찮기는 했어도 이제는 꺼낼 수 있겠지.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맙소사.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었다.
ATM에 카드가 걸렸다고 말하니 열쇠를 꺼내며 어떤 기계인지 알려달라고 말했다.
이제 끝났다 싶어서 은행 밖을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ㅇㅇ : 잠깐만 은행 안에 있는 ATM이 아니야??
ㅅㅅ : (사진을 보여주며) ㅇㅇ 저기 메트로 옆에 있는건데
ㅇㅇ : ?? 기다려봐
그리고 들어가서 뭐라고 말하더니 다시 말했다.
ㅇㅇ : 그건 우리가 해줄 수 있는게 아니고, ATM에 붙어있는 번호에 전화해야 해.
ㅅㅅ : 하지만, 전화했더니 은행으로 가라던데?
ㅇㅇ : ;; 잠깐만
ㅇㅇ : 얘기해봤는데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은행 안 기계들밖에 없어.
ㅇㅇ : 은행 밖 기계는 그 번호로 전화해야해. 우리의 관할이 아니야.
토하고 싶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과 비참함이 고립감에 버무려져 메슥거렸다.
그 때, lili 에게서 답장이 왔다.
일단은 진정하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면서..
그래서 상황을 말하니 직접 통화할테니 바꿔달라며 전화를 해왔다.
그럼에도 돌아온 답은 같았다.
그래도 내일이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하루만 기다리라고 했다.
원래 러시아가 좀 그렇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심지어 당장 머물 숙소가 없다면 예약해준다고까지 했음.
덕분에 같잖던 자존심이 살아나 정신을 차렸다.
쪽팔릴수는 없지.
괜찮다고 말하고 다시 ATM으로 돌아가 한번 더 전화해보기로 했다.
ATM에 도착해서는 청소하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ㅇㅇ : 어떻게 됐어?
ㅅㅅ : 안됐음. 여기서 다시 전화하라던데..
ㅇㅇ : 그런데 아까 은행가서 하라고 했잖아?
ㅅㅅ : 나도 모르겠음.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해서 다시 왔어.
ㅇㅇ : (갸우뚱) 그러면 일단 다시 전화해 봐.
ㅅㅅ : 아 근데 나 핸드폰 이거 안되는 것 같은데...
하고 전화걸면 나오는 말을 들려줬다.
그러자 직접 전화해서 얘기하더니 나를 바꿔줌.
처음 말했던 직원이어서 얘기는 빨랐다.
하지만 결론은, 은행에서도 안된다고 하면 자신들도 해줄 수 있는게 없다는 거였음.
아니 어쩌라고
이쯤에서 내 상황을 정리하자면, 카드 없이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근처에 내 집이 있는것도 아니고 호스텔은 오늘까지만 계산했다.
속이 쓰릴정도로 배고픈걸 제외해도 현금조차 없는 상태.
무엇보다 외국에서 전재산을 잃어버렸다는 충격이 엄청났다.
큰 돈도 써본 적 없는데 200만원정도 되는 돈을 통째로..
다리가 풀려서 일단은 근처 의자에 앉았다.
통화가 끝나자 친구가 다시 말했다.
ㅇㅇ : 어떻게 되었어? 꺼내준대?
ㅅㅅ : 또 은행으로 가래..
ㅇㅇ : 아....
잠깐 침묵이 흘렀다.
ㅇㅇ : 잠깐 기다려봐. 옷 좀 갈아입고 올게.
ㅅㅅ : ??
ㅇㅇ: 여기서 기다려.
ㅇㅇ는 잠시 뒤에 옷을 갈아입고 오더니 은행으로 가자고 말했다.
직접 같이 가줄테니 다시 한번 가보자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지만, 체면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고 같이 걸었다.
ㅇㅇ의 이름은 아데.
러시아인은 아니고 키르기스스탄에서 왔다고 했다.
일단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은행으로 향했다.
나이는 17살로, 어린데도 외국에서 일하고 있다는게 정말 대단했다.
나는 22살이나 먹고서, 나름 큰 도전을 한다는게 기껏 돈 쓰면서 돌아다니는 것뿐인데..
거기다 심지어 뭐라도 먹었냐고 물어보더니 커피까지 사줬다.
아데와 얘기하면서 걷는 내내,
행동에서 풍기는 자립심과 어른스러움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데와 도착한 은행.
역시나 다른 건 없었다.
얼마간을 머무르다 다시 나왔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지만 그 이상으로 표현할 여유가 없었다.
그냥 죽은듯이 걸어 다시 마트로 돌아왔다.
가진 돈은 있냐고,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아데에게 너무 미안했다.
앉아있다보니 갑자기 보안요원같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해커마냥 후드티 쓴 사람 1명과 보안요원 2명.
말로는 안된다고 하며 불러준건가? 싶어서 순간 희망이 보였다.
가보니까 쫒아내서 옆에 있지는 못하고 뒤에서만 구경.
한참 보고 있더니 ATM을 뜯기 시작했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끝이었다.
진짜로, 뜯어서 보더니 다시 닫고 갔다.
?
중간에 아데와 내가 가서 카드가 끼었다고 말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 소득없이 열고 닫더니 그냥 갔다.
벌써 시간은 오후 5시 반.
더이상은 움직일 힘도 없었다.
얼마간을 멍때리며 앉아있었다.
아데가 뭐라고 말하려다 그냥 갔는데, 미안했지만 눈도 돌리기 힘들었다.
다시 혼자 마트에 남았다.
앉아있다가 휘적이며 호스텔로 향했다.
핸드폰 배터리도 거의 떨어져갔고 더 할만한 일도 없어보였다.
.
분량조절 실패
3부까지 쪼개 쓰겠습니다..
진짜 엄청 길어지네
전화하면 나오던 말 녹음파일 통화.png로 첨부해놨음.
궁금하면 다운받아서 .amr 로 바꾸면 들을 수 있음.
뭔 녹음파일 하나 첨부가 안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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