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4월 5일. 모스크바



숙소에 도착했더니 카운터를 보는 사람이 바뀌어있었다.

오전에는 동양인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영국인같았음.

거기다 영어가 모국어인 듯 영어로 얘기도 가능했다.

나를 보자마자 헤이, 와썹 하면서 표정이 왜그러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만큼 설명했다.

웃긴건 카드가 먹혔다고 하자마자 알아들었음.

말하자면 카드의 무덤같은 곳이라고 했다.

자고로 덧붙이자면 은행도 전화도 소용없다고.

알아듣길래 순간 해결방법이 있는줄 알았는데 방법은 없단다.



망연자실해서 앉았다.

그런데 때맞춰서 피자가 배달되었다.

호스텔 형이 일단은 피자라도 먹으라며 한 조각을 줘서 먹었다.

나도 모르게 사양했는데, 배고파서 눈치보다 주워먹었음.

그리고 지금 돈이 없는 것, 호스텔도 1일치만 결제한 것까지도 말했다.

호스텔 와이파이로 부모님한테도 말하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뭔가 해결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듣고있던 형이 그렇게 심각할 게 없다며 말을 시작했다.



WU를 쓰면 간단히 돈을 송금받을 수 있다고 했다.

간단하게 써보자면,

웨스턴 유니온 (WU) 이라는 회사가 있음.

이곳은 인증만 된다면 세계 어디든 근처 제휴은행으로 현금을 보낼 수 있는 곳.

몇 단계 인증만 거치면 은행으로 바로 현금팩스 해주는 회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말해서 WU로 현금을 빌리라고 했다.

거기다가 WU를 쓸거면 택시비도 빌려주겠다고 했음.



이 말은 카드는 뺄 수 없으니까 현금을 송금받아 사용하라는 말.

솔직히 미련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부모님에게 보이스톡으로 전화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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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전화도 데이터도 안되었음.


하지만 모스크바 / 서울 시차는 6시간.

한국은 11시 가까이 된 시간이어서 은행으로 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영어라서 부모님이 잘 모르시기도 했고.

다행히 부모님도 방법을 찾아봤는데, 그건 대사관 긴급송금.

해외에서 긴급상황에, 한국에서 영사관으로 직접 현금을 송금할 수 있는 제도였다.

하지만 수수료가 좀 있었음.

좀 고민하다가 긴급송금을 받기로 했다.

WU는 부모님이 하기 너무 어려웠음.



마음을 정하고 호스텔 형한테 얘기를 했다.

하지만 형은 사기당할수도 있다고, WU를 쓰라고 말했음.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긴급송금을 받겠다고 두번정도 더 말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택시 좀 불러줄 수 있냐고도..

결국 긴급송금을 한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불러는 주겠지만 사기당해도 책임 못진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대사관으로 결정하고 피자를 먹으며 택시를 기다렸다.

진짜 벅차도록 맛있었다.



택시는 우버로 불렀다.

피자 한판 다 먹을때쯤 도착해 든든하게 대사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택시요금도 넉넉히 빌렸음.

그런데 중간부터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비가 쏟아졌음.

그래도 내릴 때쯤엔 뜸해져서 크게 젖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대사관까지 도착.

살면서 대사관까지 다 가보네.



도착해서 전화로 부모님과 통화하고 절차를 밟았다.

별 건 없었고, 여권으로 인증했던 것 같음.

5만원이었나 7만원이었나, 수수료를 떼고 300달러를 받았다.

루블이 아니라서 달러임.

중간중간 환전소에서 재환전을 해야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매듭은 지었다.

조금 여유가 생겨 돌아가는 길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한숨 돌렸으니 천천히 걸어가자.

택시만 타고 돌아다니기는 싫었다.

대사관에 부탁해 호스텔까지의 경로를 인쇄해 출발했다.



일단 부모님한테도, 친구한테도, 또 누나한테도 괜찮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걸어가는데 생각할수록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셀카도 찍어봄.

사진은 비밀.



이제 카드없이 가진 돈은 전부 현금.

혹시 모르니 양말, 바지, 외투 등에 나눴다.



큰 강을 건너 걷다보니 곧 지하철역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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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자주 건너다녔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대사관에서 뽑은 경로는

kievskaya역에서 탑승하고

arbatskaya에서 환승한 뒤 dmitrovskaya에서 호스텔까지 걸어가면 끝.

대충 지하철 2번 환승해서 가는 경로라고 생각하면 됨.

타고 내리는 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환승할 때 오고가는 길이 구분되어 있는것과 가끔 환승역끼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같은 역임에도 이름이 여러개인 곳이 있음.

이 정도가 달랐던 것 같다.

전자는 환승하는 지하도가 차도처럼 일방통행이라는 소리이고,

후자는 가끔 환승역이 이어져있지 않아서,

노선이 다를 경우 지상으로 올라갔다가 같은 이름의 다른 노선인 역을 찾아야 했다는 소리이다.

음 서울역이 1호선, 4호선, 공항철도가 겹쳐있는 곳인데

1호선 출입구, 4호선 출입구, 공항철도 출입구가 각각 다른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머지는 더 쓰면서 생각나는대로 추가하겠음.



그리고 지하철에 도착해 카드를 구매했다.

카드는 2종류로, 한국처럼 신용카드로도 찍히는지는 잘 모르겠음.

암튼 매표소와 발급기가 있었음.

발급기는 설명이 빈약해 매표소에서 번역기와 손짓을 섞어가며 뽑았다.

설명해보자면 1회용하고 충전용 2종류인데, 대충 계산하니 10번부터는 충전용이 이득인듯 했다.

쉽게 말하면 1회용은 한국이랑 똑같고 충전용은 티머니 비슷한거.

그런데 1회용은 환승이 안될수도 있을 것 같아서 충전용으로 구매.

충전하고 개찰구를 지나 지하철에 들어갔다.

웅장했다.

칸막이 없는 탑승구와 거대한 공간에 키 큰 사람들이 우루루.

한대씩 지날 때마다 바람도 분다.

지하철이 아니라 지하 방공호같았음.

굉장히 깊고 넓고 높다.

하지만, 막상 제대로 더듬어보면 다르겠지만

당시에는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지하철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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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


그런데 이것도 역마다 다 다름.



환승을 거쳐 호스텔 근처 역까지 도착하니 밤이었다.

낮에 돌아다니며 봐둔 식료품점에서 장을 봤다.

다음날 아침까지 먹을 컵라면과 빵, 요플레 그리고 와플까지.

그리고 근처 빵집에서 호스텔 형에게 줄 고기빵도 몇 샀다.

화덕 안에 붙혀서 굽는 빵이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사가길래.

분명히 밝았었는데 어느새 밤이 되버린 거리.

몸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나름 해결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뭐.



호스텔에 도착.

오전, 오후에 봤던 형들이 다 있었다.

빌린 돈과 빵을 건네며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쉴 준비.

짐을 풀고 간단히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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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맛있어보였음. 근데 후레이크도 없었다.


곧 먹으면서 비행기표와 내일 호텔을 알아봤다.

아무래도 현금만으로 오래 머물기는 불안해서..

위험한 것도 돈이 정해져있는 것도 전부 압박이었다

4월 9일. 가장 저렴했지만 좀 더 머무르고 싶었다.

그레서 14일로 결정.

결제는 전역하기 전 소대 간부였던 형에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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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예약해준다고 고생했는데.. 진짜 신세 많이 진 형.


그리고 씻었음.

샤워실이 학교 마포빠는 칸처럼 좁은게 신기했다.

간단히 양말하고 팬티까지 빨아 침대맡에 걸고 일기를 썼다.

적을 건 산더미였지만 막상 적은 건 티끌만큼인게 아쉽네.



이날의 일기.


난 정말 나약하다. 자기연민이 아니라 낯설고 새로운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

계속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

익숙해진 사람들이 떠나는 것,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걱정,불안, 혼자만의 공포.

내가 그렇게 '고생' 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돌아갈 핑계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푹 쉬면서 일정 정리 먼저 하자.

한 30 ~ 1시간 잡고. 고려할 것은 가격과 공항 근처인 것.


하루라도 실수하지 않은 날이 없군.

처음 내려서 버거킹이 문 닫은 것, 치킨이 무조건 take-out 이던 것,

막상 도착했다는 싱숭생숭함, 너무 이른 시간, 막연히 무섭던 지하철,

피곤함, 배고픔, 전철역 헷갈림, metro(마트) 출입불가, 거기에 ATM 기기..

전화도 안되고 와이파이는 안 잡히고 데이터도 도심에서 2G, 안잡히고 은행은 어딘지도 모르겠고

말도 모르겠고 여기도 저기도 다 안된다고만 하고 지쳐가고..

분해했는데도 못 꺼내고 계속해서 핸드폰은 안 잡히고 배터리는 무섭게 빨리 달고..

영사관까지 택시에 비싼 수수료, 우울한 날씨에 공항 착각.

뭐, 찾자면 끝도 없지. 아까워해도 끝이 없고.

감사한 건.... 너무나도 감사한 건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거? ㅋㅋ 진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이런거 아닐까?

근처 관광지는 몰라도 VVO(블라디 보스톡), IRK(이르꾸츠크), MOC(모스크바) 동네구경은 시켜줄 수 있겠어ㅜ ㅋㅋㅋ. 진짜

그럼에도 계속해서 맞아 떨어진 우연들..

기적과 Hygee hostel, 키르기 친구 그리고 씨베르 은행에 대사관 분들까지.

누구보다 우리 부모님.. lili까지

정말 말도 안되는 기적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지.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는건 안되지만 그래도 필요하긴 하더라...

감정에 휩싸이면 아무것도 못 해. 해결방안을 생각해야지.

이렇게 또 성장해나감에 감사해. 왠만해선 안 놀랄 것 같아. 이제 한국에선..

5~7만원정도 수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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