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었던 사진들을 올려보려고 한다.
부드러운 흙빛의 붉은색과 대조되는 페인트빛의 빨간색.
성벽을 쌓은 이유가 주위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었을텐데 그 주위에 슬레이트판을 두른 게 소소하게 재밌었다.
걸으면서 저녁으로 치즈도 한번 먹어볼까 생각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잔디마저 색깔이 확 살아난다.
싱그럽다는 말로도 부족할만큼의 생명력이 느껴짐.
신호등 초록불을 파란불이라고 하는 부르는 것은 몰라도,
이런 날씨의 잔디밭은 초록빛이라고 퉁치기엔 너무 심심하다. 푸른빛 잔디밭.
사실 푸른빛도 초록빛도 담을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지만.. 그나마 비슷한게 푸른빛이라고 봄.
이쯤부터 부담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남겨야 한다는, 이 벅참과 느낌을 담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가슴을 꽉 메웠다.
근처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체스를 했다.
너무 큰 압박감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려도, 글을 써도, 사진을 찍어도,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도 도저히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차라리 전부 안하느니만 못해보였다.
오히려 좋은 날씨가 더 답답하게 만든 꼴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이, 지나가면 다시는 못 올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 생각들에 얽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가장 답답한 풍경으로 변했다.
멍청하다.
그렇게 시작한 체스였다.
하지만 거기서조차 연패를 했다.
왜케 잘하냐...
계속 지다보니 승질나서 노래도 들었다.
불현듯 집 근처 공원에 산책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 생각없이 있다보니 순간적으로 너무나도 익숙한,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위에는 그나마 가장 잘 나온거라 생각하는 사진 5번.
연락했던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몇 명 없지만,
그 중에 전역하기 전 소대장님이 계셨다.
3월 30일, 4-1에서 연락했다고 했던 분.
소대장님은 특수부대 출신이셨다.
처음부터 같이 생활했던 건 아니고 상말쯤 새로 오셨음.
소속 사단이 재편성되며 여러가지 많이 바뀌게 되었었다.
원래 계셨던 분과는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뭔가 계속 맞지 않아 말년이 가까워질때까지 불편한 그대로 남았었다.
당연히 새로 온 소대장님하고도 그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새로 온 분이셔서 그런지,
아무런 편견이 없던 상태여서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일단 먼저 솔선수범하시는, 몇 안되는 간부이시기도 했고..
남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던 나도 똑같이 대해주셨다.
그 분한테 연락해서 모스크바까지 왔다고 했다.
그러자 웃으시면서 대단하다고, 다음에는 북극에도 가 보라고 하셨다.
북극?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풀렸다.
그래.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나로썬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북극도 꼭 가보자. 가볼거다.
체스를 끄고 일어났다.
이러저러 얼추 일어난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다.
돌아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이렇게 된거 근처 아르바트 거리도 한 번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이유는 2가지였는데, 첫번째는 다시 보고 싶었어서.
그렇다고 어떻게든 꼭 봐야겠다! 까지는 아니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들르지 뭐 정도였다.
두번째는 칼 때문이었다.
처음 리리와 갔던 숙소 근처엔 큰 잡화점이 하나 있었음.
규모도 상당히 컸고 가는 길도 대충은 알고 있으니 겸사겸사 가면 좋을 듯.
왠지 그곳이라면 괜찮은 가격의 칼도 살 수 있을 듯 했다.
걷던 도중 앉아서 그림도 한 장 그렸다.
느낌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리는데 러시아 10대들이 키득거리는 것 같았다.
아마 BTS 덕분에 한국 이미지가 좋은 듯. 아님 말고.
다 그린 이후로 먼저 향한 곳은 arbatskaya역이었다.
리리와 헤어진 날 바래다줬던 곳.
그 옆이 아르바트 거리이고, 그 옆에 잡화점이 있었다.
여담으로 지금껏 아르바트 거리가 청천동 쌍문동 이런 지명 이름인 줄 알았는데,
로데오거리처럼 번화가를 부르는 이름인 듯. 블라디보스톡에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중간에 낯설어서 지도도 한 번 켰다.
그런데 느낌상 맞는 것 같은 길과 같은 방향이었음.
길눈이 조금 생긴 듯. 흡족했다.
순조롭게 역을 지나 다시 도착한 아르바트 초입부.
흔들리니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함.
길 자체는 리리를 바래다준 날과 거의 같았다.
요플레를 사먹었던 마트를 지나며 그날처럼 하나 사 먹을까 고민했다.
어차피 숟가락도 하나 필요하긴 한데..
먹을까 말까 하다가 지나치기로 했다.
숟가락이 필요하긴 하지만 요플레가 땡기는 건 아니었다.
귀찮기도 했고.
사실 귀찮아서가 가장 큰 이유이다.
나머지야 구실 맞추기에 불과한 변명들.
날씨가 날씨인지라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버스킹도 지하철과는 달리 전문적으로 하고 있었다.
음향기기, 밴드 인원은 물론이고 수금하는 사람까지 따로 있던 버스킹도 있었음.
그리고는 중간중간 책을 쌓아놓고 팔던 것과 각종 호객행위,
식당 홍보 그리고 노숙자들도 기억난다.
이쯤부터 조금씩 땀이 나 외투를 벗고 다녔다.
이윽고 잡화점에 도착.
꽤나 기대했었지만 마음에 꼭 드는 칼은 없었다.
가격은 괜찮은데 너무 작다.. 과일 칼 같았음.
물론 커터칼보다야 크겠지만 명색이 식칼인데 좀 큼직한 것을 사고 싶었다.
실망해서 나왔다.
나오는데 문 앞에서 유리창 와이퍼로 칼춤을 추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쳐다보건말건 엄청나게 집중해서 추고 있었다.
멋있었다.
온 김에 근처 환전소에서 환전도 했음.
그 후로는 슬슬 피곤해져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는길에 장이나 보고 들어가자.
러시아 지하철.
소리가 생각보다 클 수 있음. 소리 주의.
숙소로 향하는 길, 문제가 생겼다.
착각해서 내려야 할 곳이 아닌 다른 역에 내려버린 것.
역 안에 붙은 노선도를 보고 다녔는데 너무 대충 살펴서 잘못 내려버렸다.
어쩐지 출구에서부터 주변이 낯설었다.
분명 몇 번 왔던 곳인데도 분위기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만해도 출구를 잘못 나와서라고만 생각했다.
오히려 덕분에 못 보던 호수까지 발견했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근처 몇 번을 둘러봐도 익숙한 곳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상황을 눈치챈 건 조금 이후, 근처 표지판을 보고 나서였다.
아 1정거장 빨리 내렸구나.
여기서 고민했다.
겨우 1정거장인데, 다시 지하철을 탈거냐 걸어갈거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완전히 낯선 곳에 떨어져 순간 당황했었지만 오기가 생겼다.
오기라고 해야 할지, 한번 내 힘으로 찾아가보고 싶었다.
1정거장이면 길어봤자 15분인데 설마 뭔 일이야 있겠어?
표지판을 보고 지하철 선로를 따라 이동하자.
사실 돈이 아깝기도 했다.
그런데 한가지 몰랐던 사실.
표지판에는 지하철 선로가 따로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쉽사리 방향을 결정할 수 없었다.
왔다갔다 몇 번 움직이다 그냥 지도를 사용하기로 했다.
위치를 가늠할 수 없으니 제대로 가고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거기다 슬슬 해도 저물어가기 시작...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급해졌다.
이르꾸츠크와는 다르다.
그 때는 트램에서 다 봤던 길이어서 걸어도 크게 상관 없었지만, 여기는 아예 모르는 길.
거기다가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없다.
일단 핸드폰으로 마트를 찍어 버스를 타자.
그리고 그 후에 장까지 보고 숙소로 가서 쉬는거다.
숙소까지 지하철로 간 뒤, 그곳에서 마트로 가는 것도 있긴 했다.
그런데 그닥 끌리지가 않았음.
돈도 아깝고 피곤한데 언제 왔다갔다 또 하고있냐. 그냥 버스타고 훅 가면 되지.
그렇게 지도를 켰다.
근데 어제 간 마트... 이름이 뭐였지?
당연히 길을 찾으려면 주소를 알아야 한다. 모르면 지도에서 찾기라도 하면 된다.
하지만 찾지도 못했고 이름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숙소로 가서 쉬기로 결정했다.
숙소로 가기로 결정한 뒤, 지도를 써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이제 버스만 타면 가서 편히 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또 한번 병신같은 짓을 한다.
다음 지하철역까지 걸어가 보겠다고 해 놓고 실패한 것을 만회하고 싶었다.
버스를 찍어타기로 했다.
정류장에 도착한 후, 타야 할 버스 번호가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찍어 탔다.
물론 나름의 계산은 있었다.
헷갈리는 버스는 2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버스 모두 종착역이 같았다.
그러니 잘못 타더라도 종착역에 내려서 다시 타면 된다.
별 이유도 없었다. 그냥 내 운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또 다시 보기좋게 실패해 잘못 탔다.
심지어 종점도 아닌 곳에서 내려버렸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리기에 종점인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나한테 화가 났다.
괜히 돈 아낀다고, 동선 줄인다고 깝치다가 더 날려먹은 새끼.
너무나도 화가 났다.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젠 확실해진, 숙소행 버스 번호.
하지만 여기서도 다시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지도를 쓰지 않고 숙소를 찾아가보겠다.
억지를 부리는 꼬맹이처럼 어떻게든 내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2가지.
숙소행 버스를 A, 잘못 탄 버스를 B라고 해 설명해보면,
이 곳에서 다음 버스(B) 를 기다렸다 탄 뒤 종착역까지 가 A로 갈아타거나
건너편 정류장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B를 타고 돌아가 A를 타거나
일단은 좀 앉거나 기대거나 한 뒤 생각해보자.
그런데 앉을만한 자리가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몸도 무겁다.. 다시 뻘짓이나 하고있는 내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본 그곳에서 대형마트 광고를 발견했다.
? 마트 ?
순간적으로 머리가 파바박 돌아갔다.
여기서 장을 보고 숙소까지 돌아간다면,
굳이 숙소에서 다시 환승할 필요도 없이 장까지 본 게 된다.
거기다가 대형마트급면 물건도 훨씬 많을텐데??
이건, 어쩌면, 더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떻게 이게 이렇게 풀리지?
순식간에 기분이 누그러졌다. 그걸 넘어서 내가 조금 자랑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것은 못 되었다.
왜인고하니,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
확실히 크기는 했지만 막상 찾고있던 펜 하나도 없었고 가격마저 상당했다.
한 시간 반 정도 마트를 돌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나왔다.
이쯤에선 그냥 다 놓아버린 상태였다.
몸도 너무 무거웠고 피로와 실망으로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역시 당연히 꺼졌을거라 생각했다.
이제 집에 어떻게 가지?
ㅋㅋㅋㅋ
모르겠다.
춥다. 배고프고 한심하고.. 날려버린 돈도 아깝다.
이젠 뭐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추위에 덜덜 떨면서 발 닿는대로 걸었다.
그러다 무심코 핸드폰을 켰는데, 켜져 있었다.
놀랍게도 배터리가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크렘린 궁에서 체스 하느라 다 날려먹어 얼마 없는 상태.
남아있는, 8%정도 되는 배터리로 조심스레 지도를 켰다.
그리곤 서둘러 숙소행 버스를 하나 알아낸 뒤 다시 껐다.
바람불면 배터리가 날아갈까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너무 안와서 다른 버스 타고 갔다.
버스를 탑승했을 때는 대략 8시쯤.
엄청난 만원버스여서 꽈득꽈득 끼어 탔다.
막상 버스까지 타니 마음이 편해져 마트도 들러볼까 싶었다.
아냐 도착하면 9시쯤 될 텐데 문을 열었겠냐.
그냥 좀 쉬자....
밖을 보니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밤이 되니 알고 있던 길이었는데도 낯설었다.
완전히 다른 곳에 온 듯한 느낌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밖을 보고 내리려고 했지만, 길이 너무 낯설어 지도만 연신 확인했다.
그리고 하차.
하차해서 둘러보니 알고 있던 풍경이 아니었다.
지도를 보고 내리긴 했지만 잘못 내린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조심스레 걸었다.
이미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핸드폰은 이미 꺼졌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잘못 내렸어도 숙소에서 크게 떨어져있지는 않을거다.
그런 생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조금 걸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곧 숙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근처 마트도 들렀다.
산 것들은 오렌지 마늘 한 망씩과 물 5L.
물은 특이하게 담금주병같은 통에 들어있었다. 손잡이 달린 담금주병.
가는 길에 숙소 바로 옆 케밥집에서 치킨 반 마리도 사 들어갔음.
그런데 치킨까지 산 김에 다시 마트로 가 맥주도 1캔 사왔다.
치킨은 옛날통닭 비슷했는데 특이한게 난? 같은 밀가루 반죽으로 싸 주었다.
호텔 정문 앞 주차장에서.
뻥 뚫린 시야와 가로등 없는 어둠이 정말 부드럽다.
늦은 식사.
소금간만 한 것 같던데 치킨이 정말 맛있었다.
살면서 오렌지에 씨 들어있는거 처음 봄.
오늘의 일기. (밀려씀)
계속해서 되뇌였던 생각. '미생' 의 만용과 용기는 한 끗 차이.
무엇이 묘수이고 무엇이 악수인가?
근처에서 오래 머물거면 버스, 정류장, 노선같은 정보를 잘 수집해두자.
알렉산드리시브를 갔는데 아르바츠카야더라구. 그래서 온 김에 크렘린을 보자 했는데 화요일은 폐쇄.
반장님이 북극도 찍으라는데, 북극도 정말 가 볼거야.
앉아서 체스 두는데 난 정말 못해. 계속 짐..
그래서 노래 좀 듣는데 그냥 집 앞 공원 같더라고. 순간.
계속해서 들던 생각. 헤멨던 길도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
한 번 헤메면 나중에 그냥 아는 길이 되거든. 어떻게든 내게 다시 걷게 해 주더라.
너무 대충 찾아서 잘못 내린거야. 그냥 구글맵 켜면 되는데 난 안 켰고.
또 메트로로 돈 쓰긴 싫고.
마트 이름을 몰라 길찾기를 못해서 숙소까지 갔다가 환승하자니 것도 돈 아깝고.. 무엇보다 피곤하고 굉장히 지쳤고..
그러다가 그냥 숙소를 가자 싶어 버스를 찾았는데 또 자존심이 발동해 대충 종착역이 같은 131번을 타고
종착역이 아닌데도 잘못 내렸어. 나한테 너무 화가 났어.
괜히 돈 아낀다고 하다가 더 쓰게 생겼다고.. 그러다 뒤 쇼핑몰 광고 보고 갔는데 여긴 훨 비싸고...
춥고 지치고 배고프고 한심하고 아깝고 짜증나고 답답한 상태에서 꺼졌을 줄 안 폰이 살아있더라고.
덕분에 1개 기다리다 안와서 다시 켜 다른 버스 타고 왔어. 만원 버스....
밤에는 길도 잘 안보이고 낯설어져. 그래서 긴장해.
2021.01.30 00:39:02 수정 후 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