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 탔다.

가방이 빵빵해 움직이기 불편했다.

다행히 빈 자리가 있어 앉아갈 수 있었다.

한국의 밤 버스를 구경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든게 좀 길었던 산책같았던,

또 그러면서도 어딘가 낯선 그런 기분이었다.

치즈냄새가 나지 않는, 한국어가 나오는, 한글이 적혀진 버스.

나는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다.

실감은 잘 안났다.

그냥 고등학교때 좀 늦게까지 야자하고 돌아가는 길 같았

멀리까지 산책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내가 이 버스에 맞지 않는다는 느낌.

엉뚱하게 바다 한가운데에서 떨어진 얼룩말이 된 기분이 들었다.

붕 뜬 듯한 그런 기분.

얼떨떨한 와중에 집 근처 정류장에 다다랐다.



붕 떠있던 현실감각은 내리자마자 쑥 떨어졌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이 순간부터는 이제 모든 것들이 다 끝난 이야기가 된 것이다.

나는, 어찌되었건 러시아에서 돌아왔고 한국에 도착했다.

15분만 걸으면 이제 집이 나온다.

너무도 익숙한, 너무도 당연한 길이 19일간 러시아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부모님의 환영을 받으며 반가운, 한편으론 허탈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먹게 된 집밥.

이것저것 물으시는 부모님의 말에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몰라 버벅이며 내 얘기를 했다.

먹으려고 샀지만 못 먹은 훈제육 덩어리와 캔 치즈, 쌀 등을 자랑스레 꺼내며 잠깐의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씻고 잠자리를 준비하며, 더 이상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꿈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 집이라는 사실 혹은 러시아에 갔었다는 사실.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는 눈을 뜨면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냈다.

몇 안되는 찍었던 사진들을 휙휙 넘겨보며 여기도 갔었나 하며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내 몸은 이젠 우리 집 침대에 누워있다.



괜찮았다고 느껴지는 이 사진들은 사실 꽤 고생했던 것들.

지금이야 조금이나마 기억하겠지만 언젠가는 흐릿해지겠지.

흙탕물처럼 어지럽던 감정은 가라앉고 걸러지는 것 하나 없는 사진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위에 포스트잇을 하나 착 붙히는 것이다.

나는 이때 행복했노라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크게 행복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매일을 목적지도 없어 고민했고 쓸모없는 동선들에 지쳐 헤멨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언젠가는 잊혀지는 것이다.



내가 처음 가장 경멸했던 건 사진.

당시를 잘 기억하지도 못하며 남겨온 사진만을 보며

아 나는 행복했었다

혹은 여기도 다녀왔었다

라고 하면서 추억하게 될 꼴이 싫었다.

차라리 고생하더라도 선명하게 남을만한 기억을 갖고 싶었다.

아 이때는 이래서 이렇게...

이때는 또 이것 때문에 저렇게...

하지만 막상 러시아를 떠나오니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고생했던 기억으로 으스대고 있었다.

그 순간의 몇 안되는 사진으로 행복했었다고 퉁치고 있었다.

한심하고 답답했다.

답답했지만 이 답답함마저 인정해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남는게 없을 것 같았다.

밤 늦게까지 핸드폰을 보며 나는 행복했었다고 되뇌었다.

맨정신으로는 잠들 수 없어 잠에 삼켜질때까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만났던 사람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르꾸츠크에서, 또 모스크바에서.

비행기에서, 트램에서, 열차에서, 다시 비행기에서.

괴로움에 찌들어있을 때 먼저 다가와 나를 도와주셨던 분들.

그 분들이 생각났다.

열차표 하나 제대로 예매도 못 하면서 왜 여기까지 온거냐고 자책할 때 도와준 umar.

한때는 귀찮다고 생각했음에도 아무 조건없이 위로해주고 도와주신 아저씨.

같잖은 자존심 하나로 경로도 모르면서 무작정 탄 트램에서 요금도 받지 않고 내려주셨던 징수원.

카드도 현금도 먹을것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 도와주겠다고, 괜찮다고 해주던 lili.

실제로 같이 돌아다니며 커피도 사 주고 은행도 가 주었던 아데.

끝자락에 만나 노보시비리스크도 알려주고 집에 갈 수 있게 1000원도 건네줬던 ㅇㅇ.

계좌이체조차 받지 않고 선뜻 5000이나 꺼내주신 형..

부끄럽지만,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전부 기억할 수 조차 힘들 정도이다.

사소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크게 다가왔던 도움.

그 도움들이 나를 계속 일으켜줬다.

나라면, 과연 나라면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었을까?

무시했을 것이다.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어차피 지나치면 안 볼 사람이니까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거액의 돈이 필요해서, 혹은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사소한 도움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위기를 헤쳐올 수 있었다.

그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로 20일이나 머무를 수 있던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배려를 할 수 있을까?

그건 이제부터 내가 정할 일이겠지.



굉장히 쓰고싶던 말도 많았고 많을 것 같던 마지막.

생각처럼 매끄럽게 쓰여지지는 않은 것 같다.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만 늘어놓은 건 아닌지.. 혹은 대충 포장해서 꾸며쓴 글이 아닌지.

어쩔 수 없이 남을 의식해 고치고 싶었던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쓴다면, 그 곳부터는 후기가 아닌 소설이 될 것 같았다.

솔직하게만 쓰는 것.

이미 다녀온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지는 상황에서의 솔직함?

그게 의미가 있나

지금에서야 쓴대도 그 순간의 감정, 그 순간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아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본 기록도 많다.

과연 그것들을 솔직하게 썼다고 할 수 있을까?

애시당초 후기를 1년이 넘어서까지 쓰고 있다는게.....

모르겠다.

그것은 돌아다녔을 당시에도, 쓰고 있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써야 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서 어딘가 구석으로 밀어놓아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명치 어딘가에 얹힌 듯 나를 짓눌러 떨쳐낼수가 없었다.

정말 모르겠다.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또 어떤게 정답이었는지..

어떻게 해서든 써야 했기 때문에 쓴 것이다.

그 이상의 가치판단은 이제 그만두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더 이상 수정도 그만하고 이쯤에서 매듭을 지어놓는게 나을 것 같다.

남은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는 확실하다.

이것으로 이제 난 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아..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까지 봐준 분들께,

댓글도 달아주고 방명록까지 남겨준 분들께,

3년 전 조건없는 응원을 남겨준 분들께,

나를 도와준 한 분 한 분들에게..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끝내도 되는건지는 모르겠다.

마무리가 이상한 것 같지만...

끝.


이날의 일기.

굉장히 피곤하고 또 피곤해. 더 피곤할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전에 잠시 ㅇㅇ씨랑 노보시비리스크 주위를 돌았어. 대화하며 내내 느꼈던 사실.

난 " 형 " " 모험 " 이라는 2가지로 권위를 얻고싶어한다.

음. 어쩄든 네가 받고싶은대로 베풀라는 말처럼 스스로도 의구심이 들 정도로 존댓말을 썼어.


피곤해서? 라고 하기엔 굉장히, 분노가 많이 일어난 날이었어. 새치기도, 그 아저씨도..

확실한 건 내게 있지 않은 것은 나를 자극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분노라는 감정은 특히 독이라는 것. 어쨌거나 바보같은 짓이었다는 것.


정말 번호를 물어보고 싶었던 분이 있었어.

내 모습에 자존감이 없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런거 다 필요없고,

누가 보던 젊을 때 누구나 겪어봤을 일이라 생각하니까, 꼭 해봐야지 했어.

일행이 있는 것 같아, 연인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너무 못나, 사람들이 볼까봐,

뒷자리의 부탁 때문에, 외국인이기 때문에, ㅇㅇ씨가 있기 때문에.. 안될 이유는 찾을수록 나오니까.

망설일 이유 하나 없다는 걸 알기까지는 조금 걸렸어.

그런데도 결국 만나지 못했어.

안내해주기로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그냥 내가 포기했어. 내 선택으로.

결국에 지금 무엇이 남았나 싶어 허전했어. 돌아오면서.

그런데 생각해보니 카드가 없더라고, 현금도.


ㅇㅇ씨에게 1000원을 받았지만, 부족할걸 알았지만 자존심에 그냥 ok하고 헤메다 5000을 받았어.

괜찮다고 하셨지만 롤케잌이라도 드렸지.

누굴 줄까 하고 고민했는데 이렇게 될 거였구나 해서 뿌듯했어.

어떡하지? 보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하고 바로 어버버대지 않고 말했어. 스스로 놀랄 정도로.


오랜만에 한국 버스를 타는데 러시아같던 기분.

막상 구청에 도착하니까 pc방 생각밖에 안 났어.


오자마자 너무도 익숙한 무기력함이.. 핸드폰으로.

그리고 밥 먹고 그냥은 못 자겠더라고, 도저히.

의미없는 핸드폰 하다가 잠들었어.


viewimage.php?id=2bb2c223ecd536&no=24b0d769e1d32ca73fec83fa11d02831682d835f2980fd236d5e1d9c2a19dab81f5788d502c582a2ba523479010cc0aadb3110a099ca075ff198f8f9d98cb9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