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우리 집.



후기의 후기.

본편처럼 이 후기 또한 손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거기다 처음 썼던 것마저 날려먹어서 시간이 2배로 걸렸다.

내용이라고 할 것도 없겠지만, 출발할 즈음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단순한 기록에서 시작했지만..

22살부터 24살까지의 일까지 담기다보니 단순히 본편으로만 끝내기는 아쉬웠다.

이건 일종의 연장선이다.

처음 세웠던, 20대의 날들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겠다던 목표의 연장선.

이미 지나버려 다큐로 남기는 것은 실패했지만 아직 글로는 남길 수 있다.

별 것 아닐지도 모르지만 전후 이야기도 덧붙혀놓자.

언제라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이정표를 세워놓는거다.

비루하건 어떻건간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 20대.

그 기록들을 남기는거다.

이유라고 하기엔 별 것 없지만 그런 마음이다.

어떻게든 써야만 내 마음이 좀 편해질 것만 같다.

그러면, 시작.



쓰고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솔직하게, 잘 기억나지도 않는 본편은 접어두고 후기만 쓰고 싶기도 했다.

여러가지 상황과 스스로의 수준미달로 인한 회의감.

거기다가 잘 써야 한다고 계속 부담을 갖다보니 정말 때려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던 건 이 후기 덕분.

쳐다보기도 싫어져 몇 번을 놓아버렸음에도 후기만은 꼭 쓰고싶어 다시 붙잡곤 했다.

그렇다면 뭘 그렇게 쓰고 싶었었나?

지금의 내 이야기.

여전히 한심하게 살고있지만, 지금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다.

정말로, 그냥 어떻게든 써야만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기선 잠깐 군대 얘기를 풀어보는게 나을 것 같다.

막 후반기 교육까지 끝나고 처음 자대배치를 받았던 날이었다.

대대 지휘통제실에서 주임원사를 만나고 중대로 올라가 더블백을 풀고 있었더란다.

이것저것 관물대 정리법을 배우고 두 손 주먹쥐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있었다.

동기생활관이었지만 숨 쉬는 것까지 긴장되던 그 때, 다음날이면 전역한다는 병장 이야기를 들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난 이제 전입와서 갓 이등병인데.. 병장에다가 전역이라고?

무슨 미국 대통령이 내 면회를 온 것 같은, 당최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날 밤, 그 현실감 없던 이야기가 얼마나 머릿속을 맴돌던지..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전역이라...

나는 전역할 때 무슨 말을 할까?

어이없지만 그때부터 전역때 할 말을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지루한 불침번 근무에, 잠 안오는 휴가 전날에, 할 것 없는 개인정비 시간에, 남들 전역하는 날에,

시간이 남아돌 때 혼자 해보는 상상. 전역.

정말 전역한다면 즐거울까 어떨까?

솔직히 남들은 다 싱숭생숭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난 기뻐서 어쩔 줄 모를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전역이란 일종의 보상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어떠한, 극적일 것 하나 없는 현실적인 일이었지만 당시는 그렇게만 느껴졌다.

와! 전역! 제발..

웃긴건, 그러다 막상 전역날엔 생각나는대로 말했지만 ㅋㅋ

그래도 그 순간들만큼은 꽤 진지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본편을 쓰던 때도 비슷했다.

아직 끝내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후기에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라면서 고민했다.

정말, 무슨 말부터 써야 할까?

일단은 괴상한 제목의 뜻부터 천천히 풀어보려고 한다.



소금싸막.

러시아, 소금싸막. 그리고 그냥 소금싸막.

간단하게 말하면 전자는 20일의 후기, 후자는 수필이라고 보는게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왜 굳이 소금싸막이라는 단어를 쓴 건가.

그건 소금싸막이란 단어가 일종의 ' 꿈 ' 같은 단어였기 때문이다.

나의 꿈.

이뤘건 못 이뤘건간에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은 내 군대에서의 꿈이었다.

현실성없게 느껴지긴 했어도 이따금 상상해보는 전역을 더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그런 꿈.

뭐, 실제로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소금사막은 내게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현역때는 자잘한 돈들을 아낄 이유였었고,

전역 후에는 바뀔만한 계기가 될거라는 나름의 이상향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다.

러시아 후기에 붙힌 것도, 감정을 적은 글덩이에 붙힌 것도 그런 의미.

비록 러시아로 가긴 했지만 소금사막에 가려던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다...

대충 이런 느낌?

마지막으로 소금 사 막이 아닌 소금 싸 막이라고 쓴 이유.

첫째로 소금사막이 러시아에 있는 건 아니라 그대로 붙히기 좀 그랬고..

둘째로는 사막보다는 싸막이라는 어감이 더 좋아서였다.

사막은 밋밋한 은색같지만 싸막은 불그죽죽한 노을빛?

여하튼 그런 느낌이었다.



처음 쓰게 된, 혹은 가게 된 계기.

이건 앞서 말한대로 17년도의 무전여행기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꼭 이것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던 건 분명하다.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정말 식겁했던 경험.

자랑한다고 쓰긴 했는데, 생각만큼의 관심도 없고 어떻게 써야 할지도 점점 모르겠고...

글을 쓴다는게 그렇게 어려운건지 몰랐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는 훨씬 더 그랬다.

그래서 쓰다 끊어버렸다.

그리고 몇 일 뒤였나, 심심해서 다시 접속해본 디씨.

오른쪽 아래 댓글 알림이 폭주하고 있었다.

힛갤에 올라가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엄청난 욕을 먹었다.

왜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엄청난 욕과 관심을 제대로 받았다.

그런데 듣다보니 너무 억울했다.

물론 갔다왔는데도 의심했던 것도 그렇지만, 나를 도와주셨던 분들까지 욕을 먹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 부랴부랴 나머지도 쓰기 시작했다.

입대까지 남은 건 약 1주일.

바로 전날까지 써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짓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내용도 부실했고 난잡했다.

무엇보다도 쓰고 싶엇던 말은 많았지만, 차근차근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결과물이라기엔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도 뭐 군대는 가야지.

아쉬움이 대부분이었던, 후련섭섭한 마음으로 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소에선 항상 노트를 들고 다녔던 것 같다.

건빵 주머니에 넣고 이것저것 생각나는대로 쓰고 또 썼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방 동기한테 들켰는데, 쪽팔릴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잘 썼다고 말해줬다.

감동했다고 하는 말에 내가 더 감동했다.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

글이라는 것이, 그 전까지는 단순한 낙서나 끄적임에 불과했다면

그 순간을 기점으로는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나도 예술을 하고 싶다.

할 수 있을까..?

그러며 달리고 걷고 하다보니 어느새 수료식이 다가왔다.

우와아아아 함성을 지르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사진을 찍었다.

1퍼센트 충전되었다, 5퍼센트 충전되었다 하던 때가 무색하게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뚜벅이던 군홧소리와 부모님들의 말소리를 뒤로 하고 외출을 했다.

드디어, 외출.

가장 먼저 핸드폰으로 댓글들을 확인했다.

마무리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어느정도는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마무리는 짓고 들어갔다는 사실 + 재밌었다는 몇 개의 댓글이 생각났다.

하지만 사는데 생각대로 되는게 얼마나 있던가?

대부분은 질타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인제공을 한 건 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싫었으면 쓰지를 말았어야지.

감사한 댓글들 역시 많았다.

여러 익명과 고닉들의, 울컥하게 만들 정도로 정성어렸던 댓글들.

정말 정말 고마웠다.

댓글도 읽고 으아악 오글거리기도 하고 당시 생각에 젖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사왔던 음식도 까먹고 하다보니 복귀할 시간.

시간이 뭐 그렇게 빠르던지..

행군하고 뜀뛰기하고 불침번 설 때는 먹고싶은게 정말 많았는데 막상 별로 먹지도 못함;;

여하튼 아쉬움과 허무함으로 부풀어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복귀하러 출발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것저것 가슴에 담아놓으니 복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들뜬 기분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아직은 뭐라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더 좋은 글을 쓰고 싶고 더 멋진 여행을 해보고 싶다.

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는 후반기 교육을 갔다.

햇빛이 깔리기 시작할 쯤 일어나 연병장에서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체조를 하고

끝나고 담배를 피울 사람들은 모여서 담배 핀 후 건빵 주머니에 꽁초를 넣었다.

주머니에 숟가락 젓가락을 넣고 다녔고

교육장까지 육군모에 생활복 티, 군복 바지에 군화를 신고 걸었다.

장마가 오면 오르막길에서 콸콸 흐르는 물에 발이 다 젖었고

저녁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풀벌레 소리와 서늘한 바람소리, 코고는 소리와 불침번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

달빛이 정말 예뻤다.

선명하고 커다랗고 맨들맨들한 달이 산 위에 턱 걸쳐있던 게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때로는 저녁 청소를 끝내고 덩치가 컸던 동기 한 명과 함께 달을 보며 얘기도 많이 했다.

앞으로 살 얘기, 지금껏 살아온 얘기, 지금의 얘기.

고전영화에서 나오는 ' 마법 ' 처럼 20살의 군대, 달빛은 그렇게 힘이 셌다.

그리고 편지를 정말 많이 썼다.

지금까지 미안한 사람들에게,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하지만 쓰면 쓸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살았나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좀 더 패기있게 달려들지 못한 일들이 후회스러웠다.

당시엔 최선이라고 믿었음에도 더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한게 아쉬웠다.

더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 기준으로만 판단했던게 속쓰렸다.

휴가를 나가게 되면 사과하자. 그리고 고맙다고 말하자.

언제까지고 담아두기만 할 수는 없다.

전역하면, 아니 휴가를 나간다면, 아니 최소한 지금 이 편지로라도..

그렇게 편지를 쭉 쓰고 또 썼더랬다.

마지막엔 꼭 자대까지 가고 싶었던 훈련소 동기와도 헤어지게 되었다.

얼마나 섭섭했는지.. 또 혼자라는게 얼마나 무섭던지...

아쉬운 건 후반기에선 일기를 쓰지 못했다.

훈련소에선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썼었는데...



떠날 때가 되어오자 다시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기 시작했다.

전입. 가장 오랜 시간을 지낼 곳으로의 배치.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었다.

물론 편했던 것도 있었지만.. 기껏 정이 든 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변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 이후로 언제였나, 다같이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고등학교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다른 무거움이 묻어있었다.

가끔 인터넷에서 봤던 빛바랜 군인 사진들이 생각났다.

그건 다 멋있었는데 난 너무 약골인 듯..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 같았다;;

아 맞다.

깜빡할 뻔 했던 것.

훈련소에서처럼 내 글을 봐주었던 형이 있었다.

별 것도 아니지만 꼼꼼히 읽으면서 괜찮다고, 나중에는 편지까지 남겨줬던 형.

비록 밤에 잘 때는 탱크처럼 시끄러웠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따듯했다.

하지만 일말쯤 연락이 끊기더라. 내가 친하고 싶다고 모두 친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전입이라는 막연했던 구름이 서서히 내려왔다.

훈련소의 수료식처럼,

분명 머리 위 높히 떠 있었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안개처럼 낮게 깔려있었다.

전입을 가게 되면 이젠 더 이상의 더블백 난민생활은 없을 것이다.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긴장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특이하다는 말만 들어왔었는데.

그래도 잘 하자. 뭐든지 최선만 다한다면 중간은 갈 수 있을거다...

했었는데 보충대를 갔다.



보충대 생활은 1주일.

천장은 물이 새고 바닥엔 모래가 까끌거리고, 관물대는 잔뜩 녹슬어있던 컨테이너.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보충대를 나왔던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나는 정말 좋았다.

물론 생활도 별 것 없기는 했다.

주변 잡초뽑기나 돌멩이 정리나 설렁설렁 하다보면 점심.

밥을 먹고나서 낮잠을 자고 어딘가로 가거나 다시 주변정리.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중간중간 특이한 버섯과 벌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PX도 한 번 갔었는데 살 게 없었음.

보충대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잉여인력인 상태여서 한가했다.

일과도 훈련도 따로 없어서 요양원에 사는 건강한 노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저녁엔 바람소리와 풀벌레소리가 울리고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섞여 귓가를 맴돌던 그 곳.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당시에 썼던 글이 기억에 남는다.

인정받으려 하지 마라.

무작정 쫒다보면 네 것을 흘리게 된다.

아쉽게도 그 컨테이너는 내 기수를 마지막으로 폐기되었다고 들었다.



진짜 부대 전입은 굉장히 어색했던 동기와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 기준에서나 어색했던 것 같음.

애당초 그 동기는 나한테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대대 지휘통제실에 도착해서,
짧은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야구공으로 혼자 캐치볼을 하던 주임원사와 얘기했다.

얘기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다.

야 긴장하지 마라.. 특급전사? 그거 다 할 수 있어.. 야 너네들도 할 수 있어..

야 ㅇㅇ야 잠깐 이리 와 봐라!

얘 보이지? 얘도 맨 처음에는 너네만큼 비실거렸는데.. 지금은, 야! 봐라 여기 가슴에 이거 보이냐?

특 급 전 사 보이지? 이거 얘도 처음엔 비실거렸는데 너네도 다~ 할 수 있어. 알았냐?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특급전사라는게 굉장히 큰 산처럼 느껴졌다.

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급전사였던 걸까 싶었다.

뭔지는 몰라도 나같은 약골은 절대 안될 듯;; 3km 완주도 겨우 하는데..

그러면서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모르긴 몰라도 하다보면 될 것만 같았다.

무릎에 손 올리고 각 잡고 허리핀, 갓 이등병이 뭘 알겠냐마는.

주임원사는 그렇게 얘기하다 갔다.

조금 자세를 풀 무렵, 각 중대별로 인솔자가 왔다.

그 동기와는,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만 그렇게 헤어졌다.

훈련소에서의, 후반기에서의, 보충대에서의 동기들.

뿔뿔이 흩어졌구나.

한편으로는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긴장이 되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결과만 먼저 말하자면 잘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내 문제와 약간의 꼬여버린 상황들에 공공연한 폐급이 되었다.

같이 전입왔던 동기는 이미 적응해서 선임들과도 친해져있는데.. 나는 동기와도 얘기하기 힘들었다.

힘들었다.

오히려 타 중대 아저씨들과 더 잘 지냈을 정도로 중대원들과 섞이지 못했다.

한번은 금요일, 수도통합병원으로 외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타 대대 아저씨들이 연등때 볼 tv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부럽던지..

난 당장 돌아가서 하루하루 버틸 날들이 너무 막막했는데 행복해보이는 모습에 비참함을 느꼈다.

물론 대부분의 내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몇 번이나 탈영과 자살을 곱씹었지만 그것조차도 무서웠다.

결정적인 순간에 혹시 모른다고, 내가 잘 하면 혹시 모른다고 되뇌이며 꾸역꾸역 살았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나름 잘 한다고 해봐도 선입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겪어던 것들 정말 많지만, 그 중 제일이었던 건 후임에게까지 무시당하던 것.

어느 순간부터는 들불처럼 번져버려 도저히 내 힘으로 바꿀 수 없어보였다.

대놓고 중대원들 앞에서 병신이라며 꼽주는 동기들도, 뭘 해도 비꼬며 무시하던 후임도 꽤 아팠다.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출이나 그린캠프, 관심병사같은 건 너무 큰 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혼자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간부도 선임도 후임도 동기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당시로써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으로 늘어놓아봤자 동정 구걸밖에 안 될테고,

그냥 이렇게만 남겨놓는게 나을 것 같다.

여하튼 그런 생각에 책을 많이 읽으려 했다.

많이 읽고 많이 쓰며 글솜씨를 다듬고 싶었고 좀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반쯤은 욕심, 반쯤은 복수심이었다.

지금은 무시당한대도 전역할 때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남겨가겠다던 마음.

그리고 솔직해져서 하고싶은 말 전부 토해내겠다던 마음.

하지만 그것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글솜씨를 다듬겠다던 건 중간중간의 회의감을 견디지 못했고,

솔직하게 하고싶던 말을 하겠다던 건 결국 혼자라는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병신같은 인간.

갈수록 허세와 거짓말만 섞여가는 글은 점점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어려운 말만 골라 써대며 난 유식하다고 뽐내는 글이 되어갔다.

추해져가는,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꼴이었다.

견딜수가 없었다.

내 열정은 그 즈음. 상병 3호봉쯤에서 그렇게 흐지부지되어버렸다.

이후로는 별 진지한 고민없이 스스로 자위하며 시간을 보냈다.

진지한 고민 없이 철학자 누가 어쨌다더라.. 불교의 교리 중 어떤게 있다더라.. 라며 난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 속 무겁게 내리누르는 불안감은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건가..

어땠던 걸까. 아직도 가끔은 생각해본다.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동기들처럼 어떤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운동을 하거나,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었다면 어땠었을까.

쓰다보니 너무 질질 늘어지는 듯..



이후로는 짧게 줄이려고 한다.

군생활 혼자 다녔다고 해서 크게 다를것도 없고, 나머지는 거의 비슷하니까.

고마웠던 사람들.

그렇게 병신짓만 골라 하고 다녔음에도 몇 명, 가끔이나마 마음을 터놓던 사람들이 있었다.

상담병이었기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쪽팔리게 말하다 울컥해서 질질 짜기도 했었다.

잘 살고 있을련지 모르겠네.

아 그리고.. 사지방에서 댓글들 다시 읽어가며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정말, 힘들때마다 몇 번이고 곱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그땐 그랬었다.

그나마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어떻게든 챙긴 것도 있긴 하다.

휴가.

당시에 혼자 휴가일수 = 폐급감별기 라는 기준을 세워놓았던터라 휴가만큼은 끈질기게 붙었다.

덕분에 상장도 몇 개 타고 특급전사까지 되기는 했다.

대부분 가라지만.. 그래도 뿌듯하긴 하더라.

앞서 말했던, 비행기 예매를 도와줬던 형 (umar 아님) 신세도 많이 졌다.

정말 많이 도와줬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행이었던 건 그나마 말년으로 접어들며 조금씩 녹아들 수 있었던 것.

물론 그렇대도 간부들과는 어색했고, 츨타는 혼자 나갔다.

그래도 하루 중 말 몇마디라도 나눌 수 있는 것. 그게 어디냐.



말년은 꽤 낙엽을 많이 맞았다.

분대장도 끝났겠다, 고민하다가 전문하사도 지원했는데 징계를 2번이나 먹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전문하사까지 지원해놓고 2번의 징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동기에게도, 후임에게도, 간부들에게도.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솔직하게 전문하사를 지원하기는 했었지만 패기였을 뿐 자신은 없었다.

내가 간부들과도 병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무책임한 생각이긴 하지만 정말 그랬었다.

바뀌어보겠다고 지원해놓고는 괜찮은걸까? 라며 고민했었기에..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시간만 보냈다.

말년에 다시 제대로 살아보겠다며 세웠던 1년 계획의 어그러짐 + 전역을 앞둔 싱숭생숭함.

차라리 그냥 전역이나 빨리 하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빨리 떠나고만 싶었다.

마음만은 이미 민간인인데 몸은 아직 묶여있는 기분.

그래도 마지막 훈련만큼은 안 빼고 열심히 뛰었다.

꼴에 마지막은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폐급의 마지막.

좀 후회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후임들 중 특히나 나를 무시했던, 동갑에 1달 차이나는 후임.

생활하며 가장 많이 꼽을 주고 받았던, 또 그래서 가끔은 마음을 터놓기도 했던 후임.

그 친구하고 전역을 2주쯤 남기고 틀어졌다.

어째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소했었지만 내가 속이 좁아서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친구하고 한 번 틀어지고나니 다시 고립되기 시작했다.

전역까지 다시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뭐 어차피 이젠 곧 전역이다. 익숙했던 거다 싶었다.

그래서 전역 전날밤에도 다른 후임이 말을 걸었는데도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는, 전역.

생각했던 말은 정말 많았다만 막상 떠듬떠듬 다른 말을 하고 믿기지 않는 부유감을 느꼈다.

원래부터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지만 이젠 정말로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어울리지 못해도 매일을 같이 다녀야 했던 것과

사이가 어땠건간에 더이상 어울릴 수 없는 것. 정말 묘한 차이였다.

친근한, 그러면서도 후련한.

붕 뜬 것처럼 이미 마음은 떼어졌는데도 아직 더 머무르고픈.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신기한 건, 조미료는 많았다만 당시에는 꽤 싱거웠다.

싱겁다. 그래.

싱거운 마무리였다.

길기만 했던, 이따금은 희망에 달콤하기도 했던 고통과 희망이 뒤섞인 곳.

실감은 그다지 나지 않았다.

누구들처럼 환영받는 마지막이 아니었기에 전역식도 별 것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그 흔한 전역모 하나 없이 돌아오던 길.

휴가인건가 전역인건가 이건 모두 꿈이었던건가

모르겠다.

이유모를 허무함에 젖은 것을 제외한다면 말출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이후.

별 볼일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처음 몇 일 뭔가 해보겠다며 잠깐 끄적이던 것을 빼면 한심함 그 자체였다.

아침에 자고 해 질때쯤 일어나 pc방.

그리고 다음날 새벽까지, 머리가 멍해져 아무 생각도 못 할때까지 손만 놀리다가 집.

처음엔 전역한 기분 좀 낸다고 했던 게 나중에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어떤 것도 너무나도 거대하게 느껴졌다.

군대에서처럼 규칙적인, 반 강제적인 생활조차 없으니 어떤 것도 규율이 잡히지 않았다.

글쓰기도 그림도 공부도 일도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pc방.. 집.. pc방.. 집..

때로는 핑계를 대기도 했다.

실감나지 않았던 전역 때문인가? 막판에 어그러진 계획 때문인가?

사실 답은 알고있었으면서도 찾기가 무서웠다.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지게 게임만 했다.

끝나지 않는 휴가같기도 했고, 미필이었던 20살같기도 했다.

휴가처럼 복귀날이 다가오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훈련이고 뭐고 전부 겪은 적 없는 일 같았다.



답답했다.

여행은 미뤄놓더라도 최소한 일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군필이 되면 저절로 쳇바퀴같은 직장인의 삶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입대 전, 그리고 전역 전 했던 예상들 모두 웃기게만 느껴졌다.

실제로 한 게 뭐가 있나..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이든 게임이든 잠이든 뭐라도 항상 하고있어야 했다.

잠깐이라도 멈춘다면 희망찼던 계획들과 내 모습이 생각나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간단한 것 하나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차라리 현역이었으면 좋겠다.

이 지긋지긋한 휴가를 끝내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현역이었다면 지금 뭐라도 하고 있었겠지. 이딴 것들로 시간을 버리고 있진 않겠지.

뭐라도 해보겠다고 끄적였던 글과 챙겨온 물건들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보기만해도 전역을 그려보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딴 식으로 살 거였나며 한심한 눈으로 흘겨보며 다그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살기 싫었다. 차라리 마음 편한 동물이나 식물이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군필, 23살, 우리 집, 한심함, 고졸, 열등감으로부터.

이따금은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이 다시 꿈으로 나타났다.

ㅄ같은 새끼 하나 때문에 고생한다고 후임들 앞에서 쪽 주던 동기도 나왔고

유난히 나한테만 어색하게 대했던 간부들도 나왔다.

주말 집합에 얘기해 줄 사람이 없어 모르고 있다가 욕 먹었던 때도 생각나고

전역하면 다 괜찮아질거라고 혼자 되뇌이던 때도 생각났다.

좋았던 것, 나빴던 것, 짜증나고 비참했던 기억들까지 떠오르고 사라지며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점점 고갈되어가는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