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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의 경제
그루지야의 서부 따뜻한 지대에는 차·잎담배·포도 등이 재배되고 양잠이 성하다. 또한 옥수수·벼·차·감귤류·사과·복숭아 등이 산출된다. 소련 시대에 소련의 차 생산량의 90%가 그루지야에서 생산되었다. 근래에는 유전이 개발되어 석유가 산출된다. 경치가 아름답고 기후가 온난하여 관광업 및 휴양산업도 발달하였다. 카프카스산맥을 넘는 도로와 카스피해(海) 연안을 따르는 철도에 의하여 러시아 및 유럽과 연결된다. 트빌리시·수후미 등 주요도시는 항공로에 의해 모스크바와 연결된다.
바투미와 포티는 각각 석유제품과 망간의 적출항이고, 수후미·보르조미는 휴양지로 유명하다. 석탄, 철광석, 망간, 구리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광업이 발달되었다. 압하스와 남오세티아 분쟁의 영향으로 경제가 위기상황에 직면했으나 내전이 진정되면서 1995년부터 성장세로 회복되었다. 1994년 수천%에 달했던 인플레이션도 18%로 억제되었고 재정적자도 1996년 6.2%, 1997년 3.6%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1995년 독자통화인 라리화(貨)를 도입하였고 소규모의 기업들은 사유화되었고 중·대기업들도 사유화가 진행중이다. 1998년 중반에 러시아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아 경제상황이 위축되었으나 1999년 이후 점차 회복하고 있다.
2000년 경제성장률은 1.9%, 물가상승률은 4.6%이고 수출은 3억 3000만 달러, 수입은 7억 30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비금속, 가공식품, 광물제품, 수입품은 광물제품, 기계설비, 가축·축산물, 식물제품 등이고 주요 수출국은 러시아, 터키, 아제르바이잔, 수입국은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터키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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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의 문화
그루지야 제국의 황금시대인 12~13세기 초까지 다양한 예술형태가 크게 발전되었지만 그후 몇 세기 동안은 계속 퇴보하였다. 그러나 민속음악과 민속무용은 그루지야 문화의 명맥을 이어왔고 20세기 후반에 연극과 영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학에서 쇼타 루스타벨리의 장편시 《표범가죽 안의 기사》는 그루지아인의 국민적 서사시로 불리어진다. 세 영웅 기사의 모험을 묘사한 이 시는 풍부한 철학적 명상을 나타내고 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그루지야 수도의 대로는 루스타벨리라 불렸다. 건축물은 16세기의 종교적 구조물이 발전한 것이다. 교회의 둥근 지붕구조는 BC 3000년경에 존재했던 원형거주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은 로마와 그리스, 시리아의 건축물에도 영향을 주었다. 페르시아 점령기 때인 19세기의 러시아 지배 때 혼성 건축물이 탄생되었다. 20세기 중반에는 소위 스탈린식(式) 건축물들이 도시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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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의 역사
그루지야는 일찍이 고대사에 이름이 등장하였으나, 역사의 초기부터 독립을 잃고 여러 주변 세력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것은 그루지야가 동서 및 남북의 교통·무역의 요충지에 입지하여 주변세력의 각축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흑해 연안에 있던 콜히다(Kolkhida)는 콜키스(Colchis)라는 이름으로 일찍이 그리스인에게 알려져서, BC 6세기에 그리스 식민지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BC 4세기에 최초의 그루지야국이 형성되었으나, BC 1세기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AD 4세기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왔다.
6세기 이후 그루지야국은 일시적으로 독립을 유지하였고, 12세기 다비드 2세 때 독립하여 영토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1220년 몽골[蒙古]의 침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초 티무르의 침입을 받자 국토는 여러 봉건제후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다수의 공국으로 분열된 그루지야는 투르크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카르틀리아(Kartlia) 공국과 카케티아(Kakhetia) 공국은 1801년 러시아 제국으로 병합되었고,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다른 공국들도 19세기 동안에 러시아 제국으로 병합되었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붕괴에 따라 1918년 5월 26일 그루지야 독립국이 형성되었다.
그루지야 독립국은 멘셰비키 사회주의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이것이 1920년 5월 조약에 의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그러나 1921년 초 볼셰비키 군대는 그루지야에 침공하여 같은 해 2월 25일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을 선언하였다. 1922년 12월 그루지야 SSR는 초(超)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ranscaucasian 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TSFSR)에 흡수되었고, TSFSR는 같은 해 12월 22일 소련(USSR)이 창설되면서 그 구성원이 되었다. 1936년 TSFSR가 해체될 때, 그루지야 SSR는 소련을 구성하는 하나의 공화국이 되었다.
1930년대의 스탈린 시대에 특히 그루지야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원래 그루지야인이었던 그는 소련의 최고 실력자로 집권한 이후, 과거에 그가 그루지야의 혁명 지도자였을 때 그를 반대한 사람들을 먼저 숙청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나자, 스탈린 시대의 인물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1973년 그루지야 공산당(CPG) 제1서기가 된 E.셰바르드나제는 부패한 관료에 대한 또 한 차례의 숙청을 감행하였다. 셰바르드나제는 1985년 7월 소련 정부의 외무부 장관이 될 때까지 CPG 제1서기였다.
1985년 M.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로 선출된 이후에 표현의 자유가 점점 많이 주어지자, 그루지야에 비공식적 집단들이 형성되는 것이 용인되었다. 이러한 비공식적 집단들은 언어 문제, 환경 문제, 민족 문제 등을 거론하였다. 아브하즈인들은 아브하즈 자치공화국의 분리독립 운동(1970년대에 시작되었음)을 다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서 그루지야인들은 수도 트빌리시에서 아브하즈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1989년 4월 8일과 9일 밤에 트빌리시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소비에트 보안군에 의하여 2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CPG와 국가 관료들이 물러났지만, 공화국 내에서 소비에트에 반대하는 정서와 민족 간의 갈등 의식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에 1989년 11월 그루지야 공산당원들이 지배하고 있던 그루지야 최고 소비에트는 소련의 법률보다 그루지야 법률이 상위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런 과정에서도 CPG 세력과 야당 세력 사이에 권력 투쟁은 지속되었다.
1990년 2월에는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규정하는 헌법 조항을 폐지하였고, 같은 해 8월에 다당제를 허용하는 법률이 채택되었다. 야당 세력이 CPG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소수 정당들이 난립됨으로써 야당이 정권을 획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90년 초에 다수의 야당들이 라운드 테이블-자유 그루지야(the Round Table-Free Georgia:RTFG) 연합을 결성하였다. RTFG와 주요 야당들은 선거에 참여하여 그루지야 최고 소비에트와 같은 기구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보다 급진적인 정당들은 소비에트 기구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선거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급진 정당들은 G.찬투리아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 포럼을 결성하여 최고 소비에트 선거를 보이콧하고, 그 대신 새로운 국회를 건립하려 하였다. 국민 포럼은 10월 28일 예정된 소비에트 선거에 앞서서, 새로운 국회를 건립하기 위한 선거를 1990년 9월 30일 치르기로 발표하였다. 국회 선거가 9월 30일 실시되었는데, 유권자의 51%만이 선거에 참석하였다. 10월 28일과 11월 11일에 치른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는 RTFG 블록이 총의석 250석 중에서 155석을 확보함으로써 승리하였다. CPG는 64석만을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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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잘어울리고 느무느무 좋소!!!
덕분에 여행 잘했습니다. 우리나라 60년대를 보는듯 아리한 향수에 빠집니다.
발칸반도 만큼 다인종 다종교간의 갈등이 심했던 곳이 카프카스지역이라고 하죠. 체첸의 은신처가 되는 나라.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자원과 천연가스의 송유관이 통과하여 서방의 경제적 영향과 러시아의 군사적, 문화적 지배가 혼합되는 곳이라죠. 곧 그루지야에도 크리스마스의 이브의 밤이 오겠군요. 사진 잘 봤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노래제목이 무엇입니까?
오옹님>답변: Sens - like wind 입니다.
트빌리시에도 지하철이있다니..;;;
여행 잘했습니다. 음악도 너무 좋구요. 열심히 살아야 겠지요. 그리구 풍요롭게 여행도 하구... 메일 보냈습니다. 음악 안내 관련 해서
이 그루지아 출신이요 당서시가 되고나서 그루지아를 방문했을때 어머니를 초대하고는 처음 묻는 말이 어머니 아직도 창녓요 라고 했다고 하요....
그루지아에 한국분이 회장으로계시는 상공회의소가 있읍니다
그루지아에 한국분이 회장으로계시는 상공회의소가 있읍니다 그루지아에 오시는 한국분들을 많이 도와주시죠 그리고 상공회의소에 다른분이 한분계시고 사업하시는 부부도계십니다
곧 그루지아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혹시 그루지아에 오셔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899-64-5115 핸드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