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a-nummark="1" zoom-number=0 > data-nummark="2" zoom-number=1 > data-nummark="3" zoom-number=2 > data-nummark="4" zoom-number=3 > data-nummark="5" zoom-number=4 > data-nummark="6" zoom-number=5 > data-nummark="7" zoom-number=6 > 모스크바의 산업   모스크바는 일찍이 수공업 도시로 발전하여 18세기 전반부터 섬유류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장제 공업으로 이행한 시대에도 여전히 섬유공업이 중심 업종이 되어,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 뒤 소비에트 정부는 그와 같은 경공업 편중을 탈피하고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꾀하여 공업의 모습을 바꾸었다. 현재 모스크바에는 120만 명 이상의 공업노동자가 있어, 러시아연방에서 가장 큰 공업도시가 되었다. 주요 업종은 기계·화학·섬유·식품·인쇄 등의 부문이다.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 무렵부터 기계제조공업에 주력하여, 리하초프 자동차 공장을 비롯하여 항공기·공작기계·베어링·전기기계·무선기기·시계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공장이 건설되었다. 화학공업으로는 각종 산류(酸類)·플라스틱·고무·타이어·아닐린염료·의약품·향료·석유정제 등의 공장이 있다. 섬유공업은 기계제조공업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공업부문으로, 면직·모직·견직·화학섬유 등 거의 전종목의 섬유류가 생산된다. 그밖에 건설자재공업과 목재가공업의 비중이 높고, 피혁·신발류·봉제 등 경공업과 육류·유제품·제분·제당·양조 등 식품가공업 및 출판인쇄업이 성하다. 모스크바에서 필요로 하는 전력은 현지 발전소 외에, 유럽러시아의 통일전력조직에 통합되어 있는 다른 지방의 발전소로부터도 공급받고 있다. 화력발전과 공장의 연료로는 다량의 석유와 석탄이 반입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값이 싸고 공해의 염려가 없는 천연가스의 사용량이 급증하여, 중앙아시아·북(北)카프카스·우크라이나 등지로부터 송유관으로 공급받고 있다. 모스크바의 주요 공업지구는 시 남동부에 펼쳐지고, 오래된 공업지구는 서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밖에 철도역이 많은 북부에도 공장이 산재한다. data-nummark="8" zoom-number=7 > data-nummark="9" zoom-number=8 > data-nummark="10" zoom-number=9 > data-nummark="11" zoom-number=10 > data-nummark="12" zoom-number=11 > data-nummark="13" zoom-number=12 > data-nummark="14" zoom-number=13 > data-nummark="15" zoom-number=14 > data-nummark="16" zoom-number=15 > 푸슈킨 (Pushkin, Aleksandr Sergeevich) [1799.6.6~1837.2.10]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국적 : 러시아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러시아 모스크바 주요작품 :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유년시대를 백부 바실리와 그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서 자랐고,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시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 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편 《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 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년 1월 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슈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 ‘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data-nummark="17" zoom-number=16 > data-nummark="18" zoom-number=17 > data-nummark="19" zoom-number=18 > data-nummark="20" zoom-number=19 > data-nummark="21" zoom-number=20 > data-nummark="22" zoom-number=21 > data-nummark="23" zoom-number=22 > data-nummark="24" zoom-number=23 > data-nummark="25" zoom-number=24 > data-nummark="26" zoom-number=25 > data-nummark="27" zoom-number=26 > data-nummark="28" zoom-number=27 > data-nummark="29" zoom-number=28 > data-nummark="30" zoom-number=29 > data-nummark="31" zoom-number=30 > data-nummark="32" zoom-number=31 > data-nummark="33" zoom-number=32 > data-nummark="34" zoom-number=33 > data-nummark="35" zoom-number=34 > data-nummark="36" zoom-number=35 > data-nummark="37" zoom-number=36 > data-nummark="38" zoom-number=37 > data-nummark="39" zoom-number=38 > data-nummark="40" zoom-number=39 > data-nummark="41" zoom-number=40 > data-nummark="42" zoom-number=41 > data-nummark="43" zoom-number=42 > data-nummark="44" zoom-number=43 > data-nummark="45" zoom-number=44 > data-nummark="46" zoom-number=45 > data-nummark="47" zoom-number=46 > data-nummark="48" zoom-number=47 > data-nummark="49" zoom-number=48 > 레닌 [1870.4.22~1924.1.21]   러시아의 혁명가·정치가. 본명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국적 : 러시아 활동분야 : 혁명운동, 정치 출생지 : 러시아 심비르스크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data-nummark="50" zoom-number=49 > 크렘린 (Kremlin)   중세 러시아의 성새(城塞)·성벽(城壁). 러시아어(語)로는 크레믈리(kreml\')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크바의 크렘린이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때는 모스크바의 것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公)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한다. 14세기 타타르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떡갈나무로 두껍게 성벽을 건설하였고, 1367년 이것을 하얀 돌로 대체하였다. 이것이 벽돌의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이 되었으며, 15∼16세기에 다시 축조되어 현재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8세기 초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동궁(冬宮)\'이 세워지면서 황거(皇居)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어, 1918년 이후 크렘린은 소련정부의 본거가 되었다. 따라서 \'크렘린\'이란 말은 소비에트연방시대에 소련정부와 당(黨) 또는 당국자(當局者)의 대명사로서도 사용되었다. 현재의 크렘린 궁전은 모스크바강(江)을 따라 1변이 약 700m의 삼각형을 이루고, 높이 9∼20m, 두께 4∼6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식적인 성벽의 첨탑, 피라미드형 탑, 북동의 주문(主門) 레데멜문의 시계탑 등은 17세기에 증축되었다. 성내에는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건축 기간 1475~1479), 성수태고지교회(1484~1489), 대천사교회(대천사미가엘교회:1505~1508)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당과 수도원·궁전·관청·탑 등이 있다. 중앙에는 높이 100m의 대종탑(이반대제종탑)이 서 있는데, 이 종탑이 서 있는 자리는 모스크바의 정중앙에 해당한다고 하며 적이 칩입하면 종탑에 있는 21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건물은 15~16세기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지은 것이다. data-nummark="51" zoom-number=50 > data-nummark="52" zoom-number=51 > data-nummark="53" zoom-number=52 > data-nummark="54" zoom-number=53 > data-nummark="55" zoom-number=54 > data-nummark="56" zoom-number=55 > data-nummark="57" zoom-number=56 > data-nummark="58" zoom-number=57 > 正本큰 사진을 보고 싶다면 ▽click my blog: http://kr.blog.yahoo.com/skyandworld/31485.html caution☞★제가 절대 안찍었음 그냥 해외 사이트에서 가져다 편집만 했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