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인상은 두텁다. 흰 수염은 주름 팬 얼굴 하단에서 길게 자란다. 수염의 물결은 가슴 아래까지 오는 머리카락과 함께 흘러내린다. 필리아놀은 부드러운 입꼬리에 걸린 수염 다발을 작은 손으로 헤맸다. 아직 키가 은기사의 상반신에 못 미치던 때의 이야기였다. 필리아놀은 정원에서 물빛 어린 잎사귀를 매만지고 매끄러운 회색빛 머리칼과 덩굴을 엮었다. 시녀들은 작은 꽃가지를 엮어 화관을 만들었다. 색색의 꽃으로 만든 왕관을 쓴 왕녀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종알거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것은 유아기를 향유 중인 자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둘은 눈을 마주하다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필리아놀은 양손을 겹쳐 입을 살짝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수면 같은 머리카락은 웃으며 흔들리는 몸을 따라 잘게 부서졌다. 아버지의 웃음은 전우의 어깨를 두드릴 때 보이는 호탕한 웃음은 아니다. 조금 더 절제된, 아래로 향하는 웃음. 아버지의 눈은 대장장이들이 무구를 제련할 때 쓰는 무거운 철을 닮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언제나 들려온다. 신앙의 대상으로, 충성의 대상으로, 기원의 대상으로. 사람들은 곳곳에서 아버지의 가호를 부른다. 그 이름 두 음절은 공기와도 같다. 태양 빛은 풀잎에도 스친다. 시녀들은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은 동일한 곳을 투과한다. 구불구불한 회색 머리칼을 가진 막내 왕녀를 스쳐서 가장 위대한 신에게로.
문득 필리아놀은 어머니의 존재를 떠올린다. 자식을 기른 아버지는 있지만 왜 낳은 어머니는 없는지에 관해서. 어머니의 인상은 없다. 누군가 마법으로 빚은 환영을 들쑤신 것 마냥 존재하지 않는다. 환영은 하얀 빛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필리아놀은 아는 것이 없다.
그위네비아가 웃는다. 사람들은 아노르 론도의 따스한 석양빛에서 그위네비아의 미소를 찾곤 했다. 우리의 아버지 그윈. 우리의 누이 그위네비아. 다시, 어머니의 인상은 없다. 그위네비아는 아노르 론도 최고의 춤꾼이기도 했다. 몸은 팽팽해졌다가 이완되기를 반복하며 매끄러운 곡선을 자아냈다. 온몸의 관절은 유연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공중을 달리는 흰 소맷자락 사이로는 그위네비아의 날카로운 얼굴 윤곽이 언뜻언뜻 스쳤다. 자리에 앉아 춤을 지켜보는 필리아놀의 양 뺨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 일련의 동작은 그동안 사람들이 망각해왔던 태양 빛의 온기를 상기시켜주는 지도 모른다. 가끔 사람들은 온후한 빛에 젖어 들어 태양이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를 잊곤 했다. 아노르 론도의 하얀 대리석 기둥이 태양빛에 젖어 갖다 댄 손을 따스하게 감싼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위네비아는 막내 동생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탁자 위에는 얇은 빵 사이사이에 꿀을 층층이 바르고 과일을 올린 간식이 놓여 있었다. 필리아놀은 접시의 무게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달콤한 맛에 젖은 필리아놀은 의자에 조금 늘어졌다. 두 손을 사랑스럽게 모으고 나른하게 말하던 춤사위의 감상. 그때 그위네비아는 얼굴을 조금 찡그렸던가? 태양의 왕녀는 흰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감춘다. 그동안 너를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했구나. 침묵을 성실하게 지켜내는 입가는 자애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위네비아는 반짝이는 하얀 돌로 엮은 팔찌를 필리아놀의 손목에 묶어 주었다. 끈을 매는 손은 민첩하고 우아하다. 시녀들은 막내 왕녀의 손목을 보며 감탄했다. 그위네비아님은 정말로 어머니 같으신 분이세요. 그위네비아는 매듭을 짓고 싶어 한다. 냉소가 스치는 입꼬리를 꽁꽁 묶고 싶어 한다.
어리고 성숙한 필리아놀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떠올리며 답을 찾아낸다. 육중한 검창을 든 전신인 오라버니, 따스한 치유를 거는 자매, 태양의 그림자 속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는 오라버니. 그들의 입술 위에는 그물 같은 침묵이 말라붙어있다. 침묵은 그들 형제자매의 언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필리아놀을 불렀다. 평소처럼 무릎 위가 아니라 홀의 앉은 자리에서. 필리아놀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발을 옮겼다. 걸음은 의자 단 아래에 멈춰 섰다. 여태껏 아버지가 홀에서 그를 부른 적은 없다. 아버지는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막내딸의 안부를 물었다. 팽팽한 입술의 무게는 육중하다. 용 사냥꾼이 나오는 시를 읽었다며 대답하는 필리아놀의 고개는 상석을 향해 빳빳하게 굳었다. 반들반들한 대리석이 깔린 홀은 하얗게 작열하고 그 위에서 필리아놀의 목소리는 수증기처럼 증발한다. 네게 또래의 친구가 필요하겠구나. 종언의 부드러운 은유.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던 유년기의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고했다. 필리아놀은 대왕의 눈이 어떤 곳을 더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지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무지는 다시 침묵의 언어를 낳는다. 자신을 공작의 딸이자 필리아놀의 새로운 시녀로 소개한 시라는 무릎 한쪽을 천천히 굽히고 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백금 같은 머리칼은 정갈하게 땋아 틀어 올렸는데, 만개하기 전의 백합처럼 보드라웠다. 필리아놀의 곁에 달라붙은 시라는 제 이름을 총명하게 발음했다. 두 눈을 충성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빛내면서. 시라의 눈동자는 줄풀의 잎사귀를 닮은 녹색이었다. 목소리가 빚는 문장 맨 끝에서는 고양된 감정이 들려왔다. 시선은 필리아놀을 향해 굳건하게 멈춰 선 채였다. 익숙하면서 동시에 생소한 충성. 그동안 저를 모시던 이들에게 불만을 느꼈던 걸까? 어쩌면 그동안 필리아놀이 읽어왔던 시와 이야기에서 언성을 높여, 혹은 잔잔하게 비난하던 허영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필리아놀은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필리아놀은 또래 시녀를 친히 내려준 대왕께 감사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여태껏 제 위의 모든 형제자매가 대왕의 안배를 수용해왔던 것처럼.
땅에 자라난 풀은 솜씨 좋은 정원사가 관리를 열심히 하더라도 금세 질겨지고 만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던 풀은 필리아놀의 하얀 발이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에서 몸을 뉘었다. 꽃가지는 자주색 빛으로 번뜩였고, 푸른 줄기는 하늘거리며 사랑을 노래했다. 정원에서 나와 함께 춤추던 아이야. 필리아놀은 시라에게 선물을 내렸다. 곡선 문양을 새긴 하얀 도자기에 차분히 담긴 노란색 수선화. 영롱한 꽃잎을 흔들며 애정 어린 말을 귓가에 속삭이던 수선화는 시라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시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화분을 받은 시녀는 깊이 절했다. 다리 위 치맛자락으로 파고드는 모양새로. 필리아놀은 말갛게 웃으며 시라를 일으켜 세웠다. 복종하는 재능을 타고났으니 어쩌면 꽃이 바스러지기 전에 자신이 바스러지길 기도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를 보듬어주던 시녀들은 이제 없다. 시라는 막내 왕녀의 유일한 시녀가 되었다. 이는 대왕의 안배이리라. 공작의 딸은 생기 있었고, 그만큼 어렸다. 어떤 방식으로 충성을 바쳐야 하는 지 알지 못했다. 모시는 분보다 작은 시녀는 내심 불안에 떨어야 했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충성에 허덕였다. 이 또한 대왕의 안배이리라. 금으로 된 수반 가장자리에 양각된 덩굴 무늬가 시라의 가녀린 손가락을 휘감았다. 미숙함에 적의를 품은 무게는 가시처럼 손가락에 찔러들었다. 시라가 인간을 모시는 시녀였다면 불안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비는 시라의 위로 필리아놀이 나무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하녀의 역할이지, 시녀의 역할이 아니란다. 필리아놀은 어깨를 걸치던 망토를 시라에게 둘러 주었다. 곧 저 아이도 대왕의 말 없는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왕이 다시 필리아놀을 부른다. 필리아놀은 대왕의 말을 시라에게 전달한다. 네게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시라가 활시위를 당긴다. 거인 궁수가 시라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필리아놀은 마련된 자리에 앉아 땀을 흘리는 시라를 바라본다. 대왕은 필리아놀에게 당부했다. 어디까지나 시녀는 보좌에 그쳐야 한다고. 필리아놀은 시라를 격려하고 지적하는 고의 어휘를 담아내려 귀를 기울이다 눈을 감는다. 대왕은 자신의 의무를 명확히 규정한 적이 없다. 교육을 수료한 시라는 대왕이 이름을 내린 고룡의 알을 하사받았다.
제가 왕족의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나요? 필리아놀은 아무도 듣지 못할 크기의 목소리로 묻는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문장이 육성으로 빚어져 입 밖으로 나왔다. 가장 첫 번째로 필리아놀의 의문을 들었던 건 첫째 왕자였다. 장남은 고개를 기울이고서 키 차이가 한참 나는 막내 동생을 응시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굳은살이 배긴 손은 두껍고 투박한 인상을 주지만 정작 손길은 부드럽다. 모든 게 갖춰진 손은 아무것도 잃을 것 같지 않았다. 너는 이미 잘 해내고 있어.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다, 의무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말이야. 그는 필리아놀의 불안을 덜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오랜 의문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미소. 아버지의 자식들은 막내를 아낀다. 사랑하는 막내가 사소한 생각에 잡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필리아놀은 첫째 오라버니를 마주 보고 웃었다.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로 웃는다. 그렇다면 웃음은 그의 의무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금 무기력한 일이다.
막내동생을 다정히 위로하던 장남은 어느 날 신들의 고향을 조용히 떠났다. 대왕은 등받이에 고개를 지탱하며 분노를 삼키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가장 충직한 자식을 거느리던 동상 앞으로 다가선다. 한때 오른팔에 거느리던 장남. 빳빳한 머리칼, 움푹 패어 음영 진 뺨, 둥근 눈. 대왕은 한 손에 번개를 든다. 돌로 된 무릎이 번개에 맞고, 하반신이 무너져 내린다. 상반신도 함께 침몰한다. 장남의 흔적은 자잘한 모래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로드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번개를 다루던 전신은 더 이상 대왕의 후계자가 아니다. 필리아놀은 제 팔 길이 만큼 커진 미디르를 쓰다듬으며 첫째 오라버니를 떠올려본다. 침묵해야 할 어휘가 하나씩 늘어 간다.
너는 용을 사냥하던 기사의 후예잖니. 미디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니? 시라는 대답을 고르는 듯 눈꺼풀을 내리 깔았다. 이윽고 단어를 정리하지 못한 시라는 미디르가 조금 측은하다고 말했다. 두 음절은 울리지 않고 목구멍에 막혀버리는 데도 긴 여운을 남긴다.
필리아놀은 제 앞에 놓인 운명을 직시한다. 이제 태양의 딸은 고리의 도시로 간다. 난쟁이와 인간의 심연과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루는 고리는 그의 운명이다. 평화로운 잠은 평화로운 위증이 될 것이다. 대왕은 필리아놀의 손을 잡고 다가오는 시간을 향해 발을 딛는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새벽이 오면 우리는 이긴단다.
도시의 중앙에 건축될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은 필리아놀의 몫이다. 많은 시종들은 교회로 이동하는 필리아놀의 뒤를 따른다. 제일 높고 깊은 곳은 필리아놀의 자리다. 필리아놀을 위한 교회를 지어준 것은 그윈돌린이었다. 우라실의 그윈돌린이, 친애하는 막내 동생을 위해 헌정하노라. 도시의 중앙에 교회의 부지를 마련하고 감독을 담당했다고 들었다. 곳곳에 놓인 비품과 동상에서 그의 세밀한 안목이 보였다. 아노르 론도와 같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환하면서 동시에 어둡다.
대왕은 왕자에게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그윈돌린이 아노르 론도의 대성당을 건설을 책임졌으니 유사한 일을 맡았다는 추측이 돌았다. 우라실의 전령은 하얀 망토를 걸치지 않았느냐는 필리아놀의 물음에 그윈돌린은 그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교회에 반영하겠노라 답했다. 제 키를 아득히 상회하는 교회의 문과 벽에는 패인 홈에는 그윈돌린 상이 놓여 있다. 교회 헌정은 그윈돌린이 필리아놀에게 표할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이다. 필리아놀은 지팡이창을 쥐고 있는 그윈돌린의 모습을 훑어내렸다. 얼굴은 구불거리는 베일에 가려져 입술 윤곽이 불투명하게 보였다. 너를 위한 선물을 마련해두었다. 그윈돌린의 속삭임이 스친다. 지평선 너머 흐릿하게 빛나는 아노르 론도의 그림자.
필리아놀은 사람들을 물리고 침소에 오직 시라만 데려갔다. 필리아놀이 잠들어 있는 동안 침소는 시라의 충정과 비애가 묻힐 무덤이 될 것이다. 시녀는 침대 주위를 감쌀 긴 커튼을 정갈하게 핀다. 시라의 손가락은 침대 덮개를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부드러운 잠자리는 필리아놀이 다듬어 낸 시라의 충정이다. 필리아놀은 그 순간 만큼은 유아적인 충정을 꾸짖지 않았다. 그는 유년의 희미한 경계를 바라본다. 유년과 성년이 꼬리를 문다. 대왕은 도시에 고리의 이름을 붙이고, 아버지는 자신에게 이름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곳은 자신을 위한 자리가 맞다. 침소를 다 둘러본 시녀가 머뭇거리자, 필리아놀은 작은 덩굴을 엮어 손목에 걸어주었다. 여린 줄기가 촘촘히 매듭지어진다.
교회 앞에는 꽃을 놓아 주렴. 작별의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꽃을. 필리아놀이 알 껍데기를 감싸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는 아노르 론도의 정원을 떠올린다. 가장 큰 나뭇가지가 드리우는 그림자에서 몸을 누이면 좋은 꿈 꾸라며,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던 분홍색 꽃. 시라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목소리에는 동요가 묻어 나왔다. 필리아놀은 시라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기 전에 눈꺼풀을 잠근다. 눈동자 위로 깊은 어둠이 틈을 메꾸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모른다 왤케 훈훈하게 나옴
이대로 묻힐거같은데 좀 아깝다 밤이나 새벽에 다시올려라
이런게 문학이지
훈훈추
왜묻혓대
짹짹이 도용글
지랄하네 도둑놈새끼 1년도 더 된 남의 글ㅋㅋㄱㅋㅋㅋ
https://jeudepaume.postype.com/post/4893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