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보기: 1편 2편


술 먹어서 늦은데스


viewimage.php?id=2bafdf2bf6dd3eb279bec4b0&no=24b0d769e1d32ca73fec82fa11d028313f7ca0229f7ff0a914a04ad5fe5d9e1802610477a5898a385f9845e90dc24ade7bf31045c5efea3f5d58b0d0452a477c602aeaedf61644


풀 숲 사이로 작게 난 발자국을 따라간다. 아무래도 에마는 성성이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평소보다 멀리 나간 듯 했다. 한참을 따라가다 다른 이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에마의 발자국보다 더 큰 발자국. 흔적을 보건데, 에마는 이 발자국의 주인을 만나는 순간 도망친 모양이다. 다른 발자국... 아마도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그녀를 쫒아간 것 같다. 

아직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다. 성성이는 고개를 들어 에마가 도망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렴풋하게, 피냄새가 풍겨오는 것을 눈치챘다. 그제서야 성성이는 숲에 감돌던 불길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아챘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자 창병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에마가 도망친 방향이다.

다음 순간 성성이의 발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늦으면 안 된다. 반드시, 반드시 구해내리라.


한참을 달리던 성성이가 별안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뜨겁다.

전장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고작 뜀박질 좀 했다고 몸 상태가 이렇게 될 리 없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원망이 늪처럼 그의 다리에 달라붙는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한 맺힌 비명이 화살이 되어 심장에 박힌다.


"헉, 흐억..."


달군 쇠구슬을 삼킨 것처럼 가슴깨가 뜨겁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이, 가슴 부분부터 점점 검게 그슬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성성이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 앞으로의 한 발자국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멈춰세웠다.


"젠장, 에마..."


바스락-

그때, 전장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풀숲이 흔들리며 작은 체구의 사람이 튀어나왔다. 엉망으로 풀어헤친 머리지만 익숙한 갈색. 에마다.

소녀는 급하게 풀숲을 뛰쳐나와 성성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 커다란 눈이 놀라움과 반가움, 당혹감에 왕방울처럼 커진다.


"성성...!"


그때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나타났다. 불쑥 나타난 남자에게 에마의 시선이 돌아간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씌인다.

퍽!

남자의 거친 손이 그 조그만 머리를 강타한다. 가녀린 몸이 곧장 땅에 처박힌다. 움직이지 않는다.

저 남자, 어디선가 봤다 싶더니 기억에 있다. 처음 에마를 만난 날, 도망치게 두었던 그 남자다.


물총새가 죽던 그날의 기억이 겹쳐보인다. 자신의 방심이, 자신의 나약함이 한탄스럽다. 결국 자신은 사자원숭이에게서도, 저 남자에게서도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밉다. 자신도, 사자원숭이도, 저 남자도, 이 세상도, 전부 불살라버리고 싶다. 모두 한 줌 잿더미가 될 때까지.


우드드득.

왼손이 나무 기둥을 파고든다. 인간의 근력을 뛰어넘은 힘에 손톱이 뭉개지고 뼈가 뒤틀린다. 이미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가 순식간에 불타오르며 불기둥으로 변한다. 그제서야 남자는 성성이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흠칫 놀라며 칼을 꺼내들었다.


"뭐야, 너. 설마 저번에 그..."


남자 또한 성성이를 기억하는 모양인지, 몹시 당황한 모양이다. 하지만 가쁜 숨을 내쉬는 성성이의 모습을 보고는, 곧 상태가 안 좋다는 걸 파악했다. 남자는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다가왔다.


"잘 걸렸다, 이 새끼. 죽여주...!"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남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숯검댕이가 된 남자의 머리는 땅에 닿자마자 형체를 잃고 무너져 잿무더기가 되어버렸다. 성성이의 왼팔이 마치 용수철처럼 늘어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이다. 성성이의 온 몸에서 회색과 검붉은 털이 수북히 자라나기 시작한다. 손톱이 길어지고 날카로워져 짐승의 손발톱과 같이 변한다. 그 모습은 이제 그토록 증오하던 사자원숭이와도 비슷해보인다. 성성이, 아니 이제 오니가 되어버린 사내는 흉측하게 불타는 팔을 끌고 숲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 곳에 더 많은 원망이 있다. 원망이, 원혼이 더 필요하다.


----------


전장.

피와 철과 불꽃 사이에서 남자는 화려하게 춤춘다. 아니, 춤이 아니다. 단순하고 절도있는 검술. 그러나 남자의 동작은 지극히 세련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모습은 잘 연마된 한 자루 검을 보는 것과도 같다. 젊은 검귀, 아시나 잇신은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는 것조차 즐기고 있었다. 한 합에 한 명씩. 그의 검을 막을 자 없었으며, 그 증거로 잇신이 선두로 선 그의 중앙군은 적의 진영 깊숙히 쐐기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순전히 겁쟁이 뿐인 적의 장군들은 병사들의 뒤꽁무니에 숨은 듯 하다. 그러나 이 기세로 계속 들어간다면 곧 적의 대장과 생사결을 벌일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베고, 또 베어낸다.

그러다 문득, 전장의 분위기가 급변하는 걸 느낀다. 아무래도, 적들이 점점 물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인 전술인가? 아니면 후퇴?'


적을 베어내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장군된 자의 업이므로. 정확한 상황을 알기 전까지 함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은 아무리 잇신이라 할지라도 위험했다. 그는 추격을 멈추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때, 어디선가 쏙독새가 나타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쏙독새 도당은 잇신 휘하의 닌자로, 전장에서의 전령 역할과 요인 암살, 납치, 척후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쏙독새는 급히 외쳤다.


"잇신님, 서쪽 방향 숲으로부터 불을 뿜는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서군은 괴멸!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괴물이라니?"


이제서야 적군이 물러나는 이유가 납득된다. 전장에서의 싸움이 아닌, 괴물과의 싸움에서 병졸들을 잃는 건 아무 소득도 없는 일이기에. 잇신도 빠르게 명령을 내려서 병사들을 주둔지로 물리도록 했다. 명을 받은 쏙독새들이 사방으로 뛰어나갔다. 곧 그의 병사들은 주둔지에서 오늘의 피로를 풀기 시작할 것이다.


"잇신님."

"마사타카! 아직 살아있군."


잇신의 옆에서 말을 타고 거구의 사내가 다가왔다. 동쪽에서 기마대를 이끌고 있던 오니와 마사타카다. 아마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서 잇신을 보러 온 모양이지만...


"이봐, 마사타카. 잠깐 창 좀 주겠나?"

"창을... 말입니까...?"


장수의 무기는 곧 그의 생명. 자기 생명을 넘겨달라는 말에 마사타카는 떨떠름해하며 창을 건네주었다. 창을 받자마자 잇신은 왼손으로 그것을 들어 어깨에 척 걸쳤다. 무게중심도 훌륭하고, 날카롭게 연마된 창날은 예술품과도 같은 명창이다. '일본각'이라고 하였던가.


"잠깐 다녀오겠네."

"잇신님, 그게 대체 무슨...?"

"서군이 위험하고 하지 않나! 장군으로써 안 갈 수야 없지."


그 말을 끝으로 바람같이 서쪽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뒤로 마사타카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그냥 싸우고 싶으신게 아닙니까 잇신니이이이임-"


이제 전장의 뒷수습은 그의 몫이었다. 사실, 그게 귀찮다는 이유도 없잖아 있었다.


----------


오니는 눈에 보이는 것 모두를 닥치는대로 불태우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쏘아진 화살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공중에서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고, 몸에서 내뿜는 열기 탓에 가까이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병사를 본 오니는 왼팔을 쭉 뻗어 그를 잡아챘다.


"끄아아악!"


초고열과 갑옷 째로 우그러뜨리는 괴력에 병사는 피거품과 함께 비명을 지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초 단위로 생을 앗아가는 모습에 전열은 완전히 붕괴되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흩어진 병사들을 해치우는 것이야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도 쉽다. 하나, 둘, 생명의 불꽃이 꺼질 때마다 원망의 불꽃은 번져간다. 그의 피부는 돌처럼 단단해지고, 화염은 원혼을 먹어치우며 더욱 격렬하게 불타오른다. 주변 일대를 쓸어버린 오니는 더 많은 생명이 있는 곳을 본능처럼 찾아 눈을 돌렸다. 멀리서, 생명들이 모여있는게 느껴진다. 아시나 잇신의 주둔지. 잔뜩, 잔뜩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재밌을 것이다. 오니는 단숨에 뛰어가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때,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머리가, 머리가 아프다.

눈을 돌려 머리를 아프게 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본다. 체구가 작은 인간. 겁에 질리고 공포에 떠는 입술로 그것은 열심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총새가 불었던, 성성이가 불어준 휘파람이다.


에마를 본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그것을 보며 으르렁거린다. 안 돼.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마.

안간힘을 쓰며 놈의 발을 막는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향해 팔을 뻗는다. 쇠도 녹일 만큼 뜨거운 불길이 그것을 향한다.

비명을 지른다. 도망쳐!


죽음의 공포에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떨면서도 에마는 휘파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 앞에 오니의 발톱이 드리운다.

제발 원래의 성성이로 돌아와달라는 기원과 힘께 눈을 감는다.


...생각했던 만큼의 고통은 없었다.


대신 돌풍과 섬광, 그리고 당당한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는 패기가 담긴 중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아시나 잇신! 이름은 있는가, 괴물이여!"


검귀(劍鬼), 야차(夜叉), 수라 등 온갖 흉흉한 별명을 달고 다니는 사내, 잇신이 지금 막 도착한 것이다. 오니는 자신을 방해한 남자를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거친 포효와 함께 온 몸에서 불꽃이 사방으로 뿜어진다.


"쏙독새, 소녀를 후방으로."

"존명."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디선가 쏙독새 하나가 나타나 소녀를 안고 뛰기 시작했다. 눈 앞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뺐기자 오니는 왼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팔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이, 마치 화염탄처럼 쏙독새를 향해 날아간다.

탕!

그러나 닿기 직전, 총소리와 함께 요격당한다. 이번에도 잇신이 훼방을 놓은 것이다. 회색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단총을 들고서 잇신은 가볍게 농을 던졌다.


"아직 이름을 들은 바가 없구나."

"크아아아아아!!!"


포효로 대답을 대신한다. 무시무시한 불길이 오니의 입에서 뿜어져 나와 잇신의 옷자락을 태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잇신은 미소 지으면서 생각했다.


'저 놈은 베면 어떤 느낌이 날까?'


어떻게 벨지, 어떻게 베었는지 고민하는 나날이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적을 발견하니 기쁘기 그지 없었다. 아무래도 영물이나 신령이라는 놈들은 만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잇신은 품 안에 총을 집어넣고 검집에서 칼을 빼들었다. 이런 아까운 놈에게 총 같은 것을 쓸 수야 없지. 하지만 혹시 몰라서 가져온 창은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놈의 기다랗고 거대한 저 왼팔과 싸울 때 좋으리라. 잇신은 자세를 잡았다.

검을 잡은 오른팔은 길게 늘어뜨리고, 이에 대조되게 왼손으로 잡은 창은 어깨에 걸쳐놓는다. 가슴이 훤히 열린 당당하고 빈틈 많아 보이는 자세. 하지만 오니는 그에게서 한 톨 빈틈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오니가 달려들지 않자, 먼저 움직인 것은 잇신이었다.


"흐아아압!"


왼쪽에 걸쳐놨던 창으로 철퇴처럼 후려친다. 이때 처음으로, 오니가 몸을 숙여 피했다. 이전까지 병사들의 공격과는 그 '질'이 달랐다. 저것을 정면으로 맞았다간 오니의 몸으로도 멀쩡하진 못하리라. 그리고 오니 속에 잠든 성성이의 전투 경험이, 오니를 이끌기 시작한다.

본능처럼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든다. 초고열의 환경에 있으면서도 도끼자루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도끼를 휘두른다.

캉!

불꽃이 튀며 검과 도끼가 충돌한다. 잇신의 검이 따라붙으며 맹렬한 연격을 날린다. 날카로운 참격이 길다랗게 자란 오니의 털을 잘라낸다. 하지만 아직 몸에는 닿지 않는다.

계속 몸을 피하던 오니의 왼팔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위에서 내려찍는 강렬한 동작. 화염이 폭발하며 그 자리를 산산조각 낸다. 잇신은 뒤로 몸을 날려 충격을 피해냈다.

한 차례 탐색전을 끝낸 잇신의 눈이 장난감을 본 아이마냥 밝게 빛났다. 저 움직임. 잇신이 느끼기로는, 분명히 무(武)에 속하는 것이다. 한낱 짐승 따위의 몸놀림이 아니다. 아무래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잇신의 심장이, 마치 오니의 그것처럼 뜨겁게 두근거렸다.


"피가 끓어오르는구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살처럼 일본각의 찌르기가 쏘아진다. 그러나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궤적. 오니는 몸을 틀어 가볍게 흘려보낸다. 잇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크륵?!"


별안간 오니의 몸이 잇신 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일본각'의 옆에는 갈고리가 있어서, 활용하기 따라서는 적의 갑옷을 벗겨낼 수도 있다. 잇신은 이를 응용해서 오니의 몸에 갈고리를 걸어 통째로 끌어온 것이다. 끌려들어가는 오니의 눈에, 하늘 높이 들어올려진 검이 보인다.

캉-!!

벼락처럼 내리쳐진 검격에 양 팔로 잡은 흑철 도끼가 부서질듯 진동한다.

일문자(一文字). 거칠게 정면에서 때려 벤다. 곧은 궤도를 따라 떨어져내리는 검격은 무시무시한 충격을 동반한다. 간신히 버텨낸 오니가 반격을 하려던 찰나, 다시 한 번 하늘을 가를 기세로 검격이 떨어진다.


"...후우..."


잇신은 참았던 숨을 뱉어냈다.

일문자-이연. 일문자에 이어지는 연격. 반격해 오는 적을 다시 한 번 때려 벤다. 놈이 급히 몸을 피하지 않았더라면, 몸통을 반으로 쪼개놨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게 아니다.

잇신은 검을 높이 들었다. 다음 순간 섬광 같은 종아리치기가 쏘아진다. 검격을 피해 뛰어오른 오니를 창으로 올려치며 같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공중에서 창으로 강하게 찔러뚫는다. 총알처럼 쏘아진 창은 돌풍을 일으키며 오니의 명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명치는 급소. 혹여 피하더라도, 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상이다. 자, 어떻게 대응할테냐.


"...!"


창날이 허공을 가르고 땅에 박혔다. 놀랍게도, 오니는 창의 끝을 발로 짓눌러 힘의 방향을 완전히 뒤틀어버린 것이다. 죽음의 선을 넘나드는 묘기.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 있는 자가 아니면 섣불리 보이지 않는 기술이었다. 균형이 무너진 잇신을 향해 흑철 도끼가 떨어져내린다. 아니, 목표는 잇신이 아니다.

콰직-!

창대가 부러지며 창날이 하늘로 튀었다. 놈은 잇신의 무기를 먼저 파괴해버린 것이다. 잇신은 뒤로 물러나서 부러진 창을 바라보았다.


'큰 일이군.'


마사타카한테 뭐라고 사과해야 하나. 분명 선조대로부터 내려오는 가문의 보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잘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소중하게 안고 있던 물건이다. 그러나 부러졌으면 별 수 없다. 잇신은 시원하게 부러진 창대를 던져버렸다. 더 좋은 창을 구해다 주면 되지 않을까.


'역시 믿는 건 검 한 자루면 충분하지.'


잇신은 검을 양손으로 고쳐 잡고 오니를 바라보았다. 일문자-이연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는지, 몸통에 사선으로 깊게 상처가 나있다. 이제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건 오니였다.

오니 또한 이대로라면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눈 앞의 저것이 쌓은 무(武)는 이 몸에 비해서도 까마득한 경지였다. 단기결전. 한 방에 모든 것을 건다.

오니의 왼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열과 빛을 더했다. 그러면서 점점 길이가 짧아지더니, 핏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거센 화염에 흑철 도끼의 손잡이도 마침내 불살라져 바닥에 떨어진다.

오니는 오른손은 정면으로 곧게 뻗고 왼팔은 머리 옆에 두어 특이한 자세를 취했다.


"저건 금강역사인가...?"


저것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랐으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자신과의 승부를 원하는 것이리라. 그 증거로 저것에게서 뿜어져나오는 투기와 불꽃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잇신은 승부에선 물러남을 모르는 사내였다. 정면승부. 잇신은 그리 마음 먹었다.

잇신은 납도하고는 자세를 가볍게 낮췄다. 손잡이도 가볍게 잡는다. 숨결을 내뱉어 쓸데없는 힘을 덜어낸다. 힘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몸을 가벼워만 진다. 그는 아시나에 흐르는 물처럼, 탈력 상태에 접어들었다.


한계에 다다른 오니의 주먹이 먼저 불을 뿜었다. 극한으로 압축된 화염 덩어리가 마치 대포알처럼 날아갔다.

굉음과 섬광. 사방에서 터지며 날아오르는 먼지에 오니의 시야가 가린다. 그리고 깨닫고야 만다.


왼팔이, 사라졌다.


오니의 앞에는, 잇신이 그의 검을 한 손으로 잡은 채, 태산처럼 서있었다. 그을음 한 톨 묻어있지 않은 얼굴로 그는 말했다.


"훌륭하다, 이름없는 괴물이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니가 쓰러졌다.

십문자(十文字). 잇신이 정립한 아시나류 검술의 오의였다. 납도 자세에서 나오는 초고속의 이연격. 첫 일격으로 오니의 일격을 양단하고, 연격으로 놈의 왼팔을 쳐낸 것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잘라냈기에 아마 놈은 자신의 팔이 없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탈력에서 오는, 극한의 쾌(快)의 검술이었다.


잇신은 오니에게 다가가 검을 거꾸로 쥐어들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승부였으나, 서군을 괴멸시킨 피해는 목숨으로 받아낼 생각이었다. 이대로 목을 쳐내 수급을 취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오니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자라났던 붉은 털들은 회색으로 새어버렸고, 잔뜩 부풀었던 덩치는 잇신과 비슷한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몸 전체에 붙어있던 불도 자츰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드러난 형체는, 분명히 인간이었다.

잇신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뭔가에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이놈이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둔갑을 한 것인가.

뭐가 되었던 이대로 죽여버릴 순 없었다. 잇신은 숨어있는 쏙독새들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