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존나 더럽게 김 글쓴 비틱새끼 망상이 존나 폭주해서 많이 역겨울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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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색은 흰 색. 흰 색은 눈 색.


"당신, 재의 냄새가 나네."

소녀의 목소리가 버려진 저택을 채웠다.


프리데의 기사를 죽여 저택의 문을 연 재의 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긴 은발을 늘여뜰여놓은 작은 체구의 소녀가 커다란 책상 위에 엎드려 책상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마치 그림이라도 그리는 듯한 모양새다.


"분명, 게일 할아버지가 말했던 사람. 나에게 불을 보여줄 사람..."

게일? 자신을 납치한 이상한 녀석의 이름이 나오자 재의 귀인은 인상을 구겼다.

조금 더 그녀에게서 게일에 대한 것과 회화세계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재의 귀인은 몇 번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하게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스캐치했다.


"괜찮아. 이것만 끝나면 거기로 돌아갈 거야. 당신이 문을 열어주었어."

게일은 어떤 놈이냐는 질문부터 게일은 팬티를 입는지 안 입는지까지 이런저런 질문을 듣던 소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대체. 제 풀에 지친 재의 귀인은 주머니를 뒤젹거리고는 도와달라는 목소리를 내는 신기한 가면을 바닥에 마구 던져댔다.


이 재는 많이 특이하네. 소녀는 생각했다. "괜찮아. 나는 거기서 그림을 그릴 거야. 게일 할아버지랑 약속했으니까."

결국 소녀에게 질려버린 재의 귀인은 바닥에 이 앞에 이상한 놈 있음, 같은 낙서를 끄적이고는 방을 나섰다.






"재의 귀인, 이것은.... 이것은, 눈동자인가요..."

화방녀는 조심스래 귀인이 넘겨준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화방녀는 그것을 들고는 망설였다. 그 사이에 재의 귀인은 옛날에 낙서해 둔 이 앞에 엉덩이 있음, 손가락 유효 같은 낙서를 화방녀 몰래 지워나갔다.

고민하던 화방녀는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는 눈동자를 품 속에 감췄다.


"감사합니다. 재의 귀인. 분명 이것이 화방녀가 잃어버린 것일 테지요..."

그러고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눈가리개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루드레스는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성로를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화방녀는 다시 눈가리개를 찼다.


"재의 귀인, 눈동자는 감사했습니다."

눈가리개를 더 꽉 조이며 화방녀는 말을 이었다.


"허나 화방녀는 눈동자를 가지지 않는 이. 이것은 금기입니다. 저에게 아련한 빛을 보여주고, 끔찍한 배신을 보여준답니다."

화방녀의 목소리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화방녀가 봐야 하는 것은 불꽃이지, 불꽃이 비추는 세계가 아니다.

화방녀가 느껴야 하는 것은 따스함이지, 따스함이 채워나가는 차가움이 아니다.

화방녀가 만져야 하는 것은 장작이지, 재가 아니다.


"불이 꺼진 세계를."

화방녀에게는 불빛이 필요하지 않았다. 빛이 이끄는 그림자는 그녀들이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된다면, 그녀가 그동안 걸어오던 삶과 사명은 송두리째 망가질 것이다.

침을 삼키며 화방녀는 이어서 말했다.

"재의 귀인, 그대는 그것을 원하시는 건가요?"




눈 색은 차가운 색. 차가운 색은 쓸쓸한 색. 쓸쓸하게 버려진 자들을 위한 안식처. 회화세계.

"당신은 재의 사람. 게일 할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었어."

소녀의 목소리가 파리 소굴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던 재의 귀인에게 들렸다.

"그러니까 이야기해두고 싶어. 굉장한 크기지. 나, 여기다 그림을 그리고 있어"

정신없어 보이는 재의 귀인을 한번 쓱 바라보고는 소녀는 캔버스로 눈을 돌렸다.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그러니까 나, 불을 보고 싶어"





화톳불의 따쓰한 열기가 기사의 갑옷을 데워 왔다.

기사는 화톳불을 등지고 화방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세계를 원하시는 건가요. 화방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 또한 불꽃을 원했다. 불나비처럼, 불을 쫓다 불타 장작이 되어도 좋았다. 한 번 불타 재가 되었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점점 눈길을 낮춰가던 남자의 눈에 여자의 손이 보였다. 불에 데인 자국이 가득한 손이었다.

그렇지만 재로써 불에 이끌리기 전에, 인간으로써 그에게는 작은 욕망이 생겨 있었다.

한 발자국 화방녀에게 다가서며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는 그대의 화방녀. 그대가 원하는 바를 따르지요."

그대라는 말은 화방녀에게 없다. 화방녀의 주인은 불꽃이고 그녀가 섬기는 건 열기이다.

화방녀는 장작이 필요하다. 불탈 장작에게 굳이 정을 줄 필요는 없고, 장작이 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는 재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직 불만을 바라보며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 뿐. 나머지는 모두 필요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단단히 감춰두도록 하죠. 누구에게도 알려져선 안 됩니다."

그녀가 화방녀라면 말이다.

"그대는 불을 계승하기 위해 왕들을 찾고, 저는 눈을 갖지 못하는 화방녀."

재는 불꽃을 포기했다. 화방녀는 불꽃을 배신했다.

"언젠가 모든 것을 배신할 그때까지."

원죄와도 같은 사명을 배신했다.





"불의 소리가 들려. 분명, 이제 곧 보일 거야."

소녀는 불꽃을 보고 싶었다. 또다른 재에 의해 깊숙히 감추어져, 썩어가는 세계를 태우지 못하도록 갇힌 불꽃을.

무너져가는 아리안델의 예배소를 돌아다니던 재의 귀인이 그녀를 보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재를 느낀 건지, 소녀는 멍하니 캔버스만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재의 사람. 반드시, 저는 그릴 거에요.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화가인가? 남자는 소녀를 보고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납석을 꺼내더니 다시 한번 바닥에 낙서를 끄적였다.

게일의 목적은 저 여자를 위해 프리데를 죽이는 거였나? 남자는 좀 전에 있었던 싸움을 회상하고는 이상한 놈 있음 글씨를 바닥에 꾹 꾹 새겼다.


"분명 언젠가, 누군가의 있을 곳이 되어줄 만한 그림을."

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제사장이지. 남자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예배당 아래로 내려가 화톳불에 앉았다.

누군가의 피와 잔불이 예배당의 바닥을 뒤덮었다. 잔불은 피와 시신을 장작삼아 불꽃이 되었다. 부패한 회화세계 밑바닥이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세계에 감춰져 있던 따쓰함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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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남자의 등에 발이 꽃혔다. 남자는 절벽 너머로 떨어지고는 자세를 가다듬고 위를 바라봤다.


"어떤 시대에도 인간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구나. 무욕한 나에겐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지만.

남자가 그를 바라봤다. 그는 투구를 벗어 발랑 까진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잠시 허탈하게 웃더니, 아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는 웃음기를 빼고는 이야기했다. 남자는 어쩐지 그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려왔지만, 그가 그답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기에 익숙한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하지 못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겠어. 너에게 어두운 영혼이 있기를."

그는 일어나 남자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떠났다.

부랴부랴 그가 있던 곳으로 향한 남자가 건진 것이라고는 그의 버려진 갑옷 뿐이었다.

술 나눠주는 녀석은 좋은 친구인 줄 알았는데. 그가 떠난 자리를 얼떨떨하게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화르륵, 옥좌 위에 앉혀진 로스릭의 장작에 잔불이 붙어 타올랐다.


재의 귀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로 다섯 개. 불을 배신하고 도망친 왕들의 수급은 이걸로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계승의 의식 뿐.

아래쪽에서 사뿐히 재를 밟으며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를 내려다 본 남자와 화방녀의 눈이 마주쳤다. 화방녀는 화톳불 옆에 다가섰고, 그 의미를 알아챈 남자도 옥좌에서 뛰어내려 화톳불로 향했다.

눈 가리고 다니는 사람이랑 눈이 마주친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남자는 그렇게 느끼며 화방녀를 마주보았다.


"다섯 개의 옥좌에 모든 왕이 돌아왔습니다. 이 모두가 그대의 힘. 이야말로 왕의 자격을 갖춘 이의 증거입니다."

불의 계승의 제사장은 조용했다. 시녀는 늘 그랬듯이 묵묵하게 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루드레스는 재의 귀인과 눈을 마주치고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

"재의 귀인, 왕들의 앞에서 화톳불의 나선의 검에 무릎 꿇으세요. 그들의 잔불. 그 계승의 의식을 거행하지요. 그대를 진정한 불을 계승하는 왕으로 만들기 위해."

카를라와 코르닉스는 제사장 구석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 말 없이 그 둘을 지켜보았다. 패치는 멀찍이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는 울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남자는 장비와 소울을 정비하고는, 뒤를 돌아 화톳불로 향해 무릎꿇었다.

재의 귀인의 결정을 본 화방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왕좌를 바라보았다.





투두둑, 손가락이 톡 닿은 부위를 시작으로 알 껍데기에 균열이 흘러넘치더니 깨졌다.

한때 재의 귀인이라 불려온 남자는 그 충격에 혹시 태양의 딸이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는 다시 꺠어나기에는 너무나 깊게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투두둑, 도시가 깨졌다. 시대가 무너져 내려도 태양의 저력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당당하게 남아있었던 땅이 무너졌다.

태양의 신이 난쟁이들에게 하사한, 마지막까지 불의 시대의 찬란함을 보여주는 도시마저도 최후엔 아주 약한 손짓 한 번에 환영을 잃고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잔불과 소울을 쫓아 헤매는 망자나 다름없어진 어떤 재에 의해서 말이다.

불 꺼진 재는 온기을 쫓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위대한 장작의 왕들이시여."

순례자의 시신과 구석에 방치되어진 스크롤, 모든 기적의 이야기를 보여주고는 방치된 점자성서, 그리고 누군가가 훔쳐온 듯한 잡동사니들이 재 속에 잠겼다.


"바야흐로 불은 사그라들고,"

안드레이는 모루에서 시선을 때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망치질 소리는 그날따라 유난히 작고 구슬픈 금속음을 내었다. 화톳불 타는 소리가 금속의 소음을 삼켰다.


"왕들에겐 옥좌가 없으니,"

이글거리던 화톳불의 불씨가 허공을 떠다니더니 옥좌로 날아갔다. 옥좌의 장작들이 차례차례 타올랐다. 넷은 죽은 채로,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산 채로.


"그대들의 불을 계승자에게 맡겨라."

제사장의 불꽃이 꺼지고는 화방녀에게 불씨가 모였다. 화방녀는 불씨를 모아 잔불을 만들어 재의 귀인에게 넘겨주었다. 잔불을 받은 재가 붉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는 죽이리라. 태초의 불을 계승한 로드란의 오랜 신들을."

불꽃에 몸을 맡기고 재가 타올랐다. 화톳불이 재를 인도해 머나먼 곳으로 그를 보냈다. 모든 열기를 뿌려낸 제사장이 차갑게 식어 갔다.


"안녕히. 재의 귀인. 그대가 몸을 누일 곳이 있기를."

화방녀가 속삭였다. 불꽃 속에서 눈을 뜬 재의 귀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곳에는 오직 차갑게 식어가는 세상 뿐이었다.

불타는 재는 차가움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영혼 색은 검은 색. 검은 색은 그림자의 색.

초라하게 찢긴 붉은 두건과 헤진 갑옷을 걸친 노예같은 꼴의 기사가 난쟁이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재의 귀인이었더 남자는 그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도 여기까지 온 건가.

그 또한 남자의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있었나."

전에 같이 싸웠을 떄의 그는 강했고, 기술 또한 훌륭했다.

그라니 많은 소울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저 거대한 몸집을 보면 특히나 많은 소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가 검을 다잡았다.

"자아, 내게 내놔라. 너의 어두운 영혼을."

그는 손을 남자에게 내밀며 말했다. 녀석도 소울을 노리고 있는 건가.

"아가씨의 그림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소울을 모은다고? 남자는 놀라면서도 전투 준비를 했다. 노예기사가 작게 그르렁거렸다. 시선을 마주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기를 꺼냈다. 롱소드와 대검이 서로에게 겨누어졌다.

둘 모두 주인이 불사자가 되기 전에 기사로써 살았을 때부터 쭉 써온 무기였다. 대검에 꽃혀져 있던 난쟁이의 시체가 튕겨져나오며 허공을 갈랐다. 두 불사자들은 그것을 신호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소울을 뺏기 위한 칼부림. 그러나 두 불사자에게 있어서는 그것만으로도 싸울 이유는 충분했다.

먼지만이 남은 도시의 잔재 속에서 두 기사의 차가운 검이 맞부딪혔다.




뜨덥게 달궈진 강철 장화가 달리며 꽃을 짓뭉겠다. 불타는 기사가 달리며 꽃을 태웠다.

고요하게 식어가는 세계에서 불꽃을 품은 두 기사의 검이 맞부딪혔다.

두 기사가 검을 겨뤘다. 거대한 사명을 품고 싸우는 두 장작이 타올랐다.


태초의 화로를 지켜오던 대검이 모양을 바꾸었다.

그동안 불을 계승해 오던 모든 왕들의 힘을 담아 화신은 수많은 기술을 쓰며 재의 귀인을 몰아붙였다.

태양의 신을 섬기고, 그 끝에 태양의 신을 따라 장작으로 불탄 흑기사들의 방패가 화신의 그을린 곡도를 막아냈다.

간신히 빈틈을 찾은 재의 귀인이 롱소드를 휘둘렀지만, 왕들의 화신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며 그 공격을 피했다.

젠장. 남자는 혀를 찼다. 그리고 에스트를 자기 입과 상처에 아주 빠르게 쏟아부었다.


재는 장작을 이길 수 없다. 태울 찌거기조차 없이 버려진 재. 잔불을 받아 잠시 타오르는 게 전부인 재.

변형된 대검을 막아내면서 그을려진 흑기사의 방패가 결국 그 힘을 못 이기고 튕겨져나갔다.

그리고 화신의 대검이 재의 귀인의 배를 꿰뚫었다.


하지만 장작이 다 타버린 뒤에도 재는 남는다. 장작의 잔불을 훔쳐서라도 마지막까지 불을 피우는 것은 재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생각했다.

다음엔 반드시 이겨 주마.

왕들의 화신이 남자의 목을 내리쳤다.





그림자 색은 빛의 색. 빛의 색은 불꽃 색. 불꽃은 따뜻하다.

푹, 마침내 남자의 롱소드가 게일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리고는 검을 빼냈다.

게일은 몸을 몇 번 휘청거리더니 땅에 쓰러졌다. 뚫린 구멍 사이로 검은 피가 뿜어져나왔다. 게일은 흘러내리는 피를 때와 먼지가 가득 낀 장갑으로 붙잡었다.


"아아, 이것이 피인가. 어두운 영혼의 피인가."

물감이 빛바랜 땅을 적셨다. 피가 재와 먼지로 가득한 회색을 검게 채워나갔다.

어두운 빛이 붉은 망토를 휘감았다. 그의 눈빛에 남아 있던 실낱같던 이성이 사라졌다.

그는 짐승처럼 네 발로 움직이는 것을 멈추더니, 두 발로 일어섰다.

게일은 인간답게 부러진 대검을 고쳐잡았다. 어둠을 품은 영혼이 그의 망토 사이로 새어나왔다.




잔불을 품은 하얀 빛이 검붉은 갑옷 사이로 뿜어져나왔다. 빛은 재의 귀인에게로 향했다. 재의 귀인은 불씨가 섞인 채로 흩날리는 빛을 새까맣게 탄 장갑으로 붙잡았다.

마침내 태초부터 로드란을 비춰 오던 불꽃의 신이 쓰러졌다.

찢기고 베이고 뚫리고 그을리고 지져진 상처를 에스트로 치료하며 남자는 화로 너머로 걸었다.

화신이 지키던 태초의 불꽃을 향해 걸었다. 장작이 될 준비를 마치고 걸어가던 재의 귀인은 꽃밭 끝에 움푹 파인 바닥을 발견했다.

화방녀가 그어놓은 납석 자국이었다.

남자는 기억을 되짚었다. 오래된 약속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불 꺼진 재는 싸움의 기억을 되짚었다.

서로 죽고 죽여가며 싸운 지 한참이 지났다.

두 기사의 몸은 베이고 찢긴 자국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들었고, 몸도 점점 말라비틀어져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노예기사는 이미 이성을 잃고 어두운 영혼의 힘으로 싸우고 있기에 자신이 몸의 한계를 넘고 몇 번 죽은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고,

불 꺼진 재는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수십 번의 죽음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나도 미쳐버릴까.

남자는 자신의 소울을 수습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그가 원하는 것은 소울과 잔불 뿐이다. 짊어진 사명따위는 없다.

차라리 망자가 되 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쐐기석으로 강화된 덕분에 철의 한계를 뛰어넘은 충격을 받고도 버틴 검게 탄 방패가 대검을 튕겨냈다.

빈틈을 찾아내고 날아든 롱소드가 노예기사의 몸을 한번 더 찢었지만, 노예기사는 미동도 하지 않더니 망토를 휘둘러 남자를 후려쳤다.

퍽. 남자는 주춤거렸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부러진 검이 남자의 목을 그었다. 불 꺼진 재는 자신의 소울이 바닥에 흩뿌려지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감았다.




"태초의 불이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암흑이 찾아오겠지요."

재의 귀인이 눈이 감겨 갔다. 자신의 사명은 이걸로 끝을 맺었다.

화방녀는 눈을 되찾고 화방녀에게 감춰져 있던 세상을 보았다. 불의 계승의 폐혜를 본 화방녀는 선택했다.

이 시대를 끝내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암흑 속에 작은 불꽃들이 나타날 겁니다."

오래 전 옛날, 태초의 불이 생겨났다.

차갑게 식어 있던 세상은 그 따스함에 이끌렸고, 자신의 본질을 버리고 불을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불꽃은 꺼지기 마련.

세상은 불의 온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태양의 신이 스스로를 장작으로 삼아 꺼져 가던 불꽃을 다시 크게 타오르게 만들었고, 그것이 장작의 왕의 시작이었다.

결국 꺼질 불을 붙잡기 위한 처절한 발버둥은 시작되었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타 사라졌다.


"왕들이 계승해 온 잔불이..."

그들이 사명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걸로 끝이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제 끝났다. 몸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차갑게 식어 무너져가는 세상에 휩쓸리는 일 뿐.

주변이 암흑에 휩싸였다. 불 꺼진 재의 눈이 감겨 갔다.



천둥 소리가 남자의 귀를 울렸다.

불 꺼진 재는 눈을 뜨고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게일을 마주보았다.

어두운 영혼을 찾아 헤매더니, 기껏 찾아놓고는 망자 따위가 되버린 거냐.

주마등이었는지, 아주 오랜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가 말했던 무언가가 더올랐다. 아가씨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불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기사가 보였다.

네 사명은 고작 그 정도였냐. 너도 소울에 미쳐버린 거냐.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질 수는 없다. 사명도 뭣도 없지만, 살아남아야 한다. 욕망이 남자를 이끌었다.

이미 다 먹어치운 에스트를 또 달라고 아우성치는 피로한 몸에 누군가에게서 받어두었던 술 한 잔을 적셨다.

남자는 롱소드를 다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 속에 남아있던 잔불을 쥐어짜냈다.




"재의 귀인, 아직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불 꺼진 재는 눈을 떴다. 왜 떴는지는 몰랐다. 재의 귀인으로써의 사명은 끝났다. 불타지 않고 조용히 식는 배신으로 끝맺기는 했지만.

그러므로 그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안식을 취하더라도 누구도 뭐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껏 사명을 끝내놓고 이대로 자신의 여정을 끝내긴 싫었다.

헬로.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가면 하나를 바닥에 떨궜다. 어두워지던 시야가 탁 트였다. 어둠에 잠기던 것은 세상이 아닌 자신이었나 보다. 태초의 불이 꺼진 세상은 어두워지고 추워졌지만, 무너지고 흘러내리고 뒤틀리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방녀는 재의 귀인이였던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요?"

화방녀가 물었다. 제사장에서 쓰던 사무적인 말투에서 벗어난, 자유롭게 친근함을 담은 말투였다.

사명에서 벗어나고는 싶었는데, 벗어나고 나서 뭘 할 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게. 진짜 뭘 하지.

다 망해가는 세상에서 잘도 뭘 해볼 수 있겠군. 남자는 탈진한 듯한 자세로 몸을 굽혔다.


화로에 흩뿌려진 재를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예쁘군. 좀 뭉개지거나 타버린 게 많긴 하지만. 그는 화방녀를 보더니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켜 꽃을 향했다.

"아래에 뭔가 있나요?"

자세를 낮추며 일단 그게 뭔지 손으로 만져본 화방녀는 말했다. 꽃이네요. 무슨 꽃인지 아나? 음, 화방녀는 꽃을 한 풀 따고는 냄새를 맡았다. 글쎄요. 플록스인가?

그녀는 조심스래 눈가리개를 벗었다. 남자는 슬쩍 그녀의 맨얼굴을 보았다. 맑고 푸른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붉은 색.... 불꽃 색.... 예뻐요...."

꽃을 어루만지며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 꽃 말고는 구경거가 있을 지 모르겠네. 남자는 절벽 밑에서 흘러내리고 뒤섞이고 질척거리는 땅과 건물들을 보며 대답했다.

화로에 흩뿌려진 재를 양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피어난 꽃들이 보였다. 예쁘군. 좀 뭉개지거나 타버린 게 많긴 하지만. 그는 화방녀를 보더니 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켜 꽃을 향했다.


남자가 갑옷을 벗었다. 검과 방패를 바닥에 떨궜다. 이제 목숨걸고 싸울 일은 또 없으려나.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가 갑옷을 벗은 남자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맨얼굴로 보는 건 처음이네요." 여자는 입을 가리고는 작게 웃었다. 남자도 피식 웃고는 꽃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어두운 하늘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검은 태양이 떠 있었다.

건장한 몸, 보랏빛 피부와 비정상적으로 톡 튀어나온 두상, 좀 많이 크고 심하게 초롱초롱한 남자의 눈동자를 화방녀는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에 맞춰 몸을 눕혔다.

쏴아아, 땅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그렇게 조용히 꽃밭에 누워 있었다. 남자도 고개를 돌려 화방녀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화방녀는 얼굴을 보고 뽑는 건가. 여자가 물었다. 제가 예쁜가요?

어떻게 해야 너 같은 얼굴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해.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저는 재투성이에, 옷도 항상 똑같고, 붙임성도 없고, 얼마 전까진 예쁜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여잔데. 화방녀가 의기소침하게 말을 이었다.

아냐. 너도 내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뻐. 남자가 납작한 코로 숨을 피식 흘리며 웃었다. 그러면 별로라는 거네요. 남자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라 농담으로 꺼낸 말이라고 착각한 그녀는 시무룩해졌다.

"예뻐야 남자를 기쁘게 할 수 있다던데,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여자가 툭 말을 던졌다. 던진 말에 남자의 심장은 특대검 만난 불사대마냥 얻어맞고 날뛰었다.

그거 무슨 뜻이야.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남자가 되물었다. 그렇고 그런 뜻이요. 카를라씨께서 유익하고 체계적인 지식의 보고인 점자성서로 알려줬습니다. 이리나님께도 이곤님께 써보라며 가르쳐주던데요.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역시 저로는 안 되는 건가요?"

화방녀가 푸른 눈동자를 반짝였다. 초조하다는 듯 여자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며 머리에 뭍어 있던 재를 틀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의 자세에 불 꺼진 재는 자신의 몸 안에서 '불씨'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노예기사의 소울과 어두운 영혼의 피가 딱딱한 땅으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그의 흔적으로 다가서서 그것들을 주웠다.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며 바람 소리를 내었다.

이제 어쩐담. 남자는 무너진 도시의 잔해에 주저앉았다.

먼지가 되어 바스라지는 붉은 망토 사이로 작고, 썩어 가고, 썩어 가는 부분의 끄트머리마다 작은 불씨가 박혀 있는 종이 하나가 문뜩 보였다.

아. 남자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어떤 약속이 떠올랐다. 남자는 허겁지겁 그 종이를 향해 뛰어들었다.







"읍....?"


남자가 여자를 밀치고는 올라타 입술을 훔쳤다. 여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남자와 혀를 섞었다.


"으응... 웁.."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점차 격렬해져 갔다. 몇 번이고 서로의 혀와 입술을 핥았다. 한참 뒤 입을 땐 두 사람의 입가엔 침이 흥건했다.


여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소매를 들어 입을 닦았다.


"아.... 고맙습니다, 재의 귀인. 기분 좋으셨나요?"


화방녀는 슬그머니 미소짓고는 조금 부끄러워졌는지 꽃으로 시선을 내리고는 눈을 꿈뻑거렸다.


재의 귀인이였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화방녀를 꾹 껴안고는 꽃밫에 몸을 던졌다.


꽃을 침대삼아 두 사람이 누웠다. 진한 향기가 화로의 바람을 타고 그윽하게 퍼졌다.


달아오른 불 꺼진 재가 여자의 치마를 올렸다. 이미 점자성서를 통해 정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었기에 여자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자와 이런 관계까지 가진다는 것에 부끄러움은 느꼈기에 꽃잎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남자는 화방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재는 잔불을 바라는 법. 온기를 쫓아 재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이건...이러시면....흣...."


여자의 몸이 남자의 손가락에 맞춰 움찔거렸다. 남자는 반대쪽 손으로 화방녀의 옷을 풀어헤쳤다. 여자의 아담한 가슴이 드러났다. 남자는 그것을 붙잡으며 또 한번 여자의 입술을 훔쳤다. 여자는 남자를 꼭 껴안고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응,으응,아,흐읏...!"


남자와 호흡을 맞추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감추어진 축복'을 흘렸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남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의 계승식의 특대검'을 꺼내었다. 남자는 조심스래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는 '불의 계승식의 특대검'을 밀어넣었다.


으읏, 여자가 숨을 삼켰다. 여자의 순결이 찢겨나갔다. 고통을 참기 위해서인지 꽃을 부여잡은 손이 보였다. 남자는 손을 뻗었다. 여자는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이 가득 박힌 손과 화상 자국 투성이인 손끼리 포개어졌다.


"재의 귀인이시여." 손을 꾹 붙잡으며 여자는 남자를 요염하게 바라봤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힘겹게 들어갔던 남자의 특대검이 조금씩 더 깊숙히, 빠르게 움직였다. 남자의 특대검을 받아들인 그녀의 '태초의 화로'가 남자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의 물건을 감쌌다.


살이 맞부딪히고 체액이 섞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찔러넣을 때마다 질척한 물소리가 사방에 튀었고 뽑아낼 때마다 아쉬운 듯 딸려나오는 듯 했다.


인간성이 두 사람을 집어삼켜갔다. 서로를 원하며, '불의 계승식의 특대검'이 '태초의 화로'에 끊임없이 꽂혀 왔다.


그 장단에 맞추어, '태초의 화로'가 그의 특대검에 있는 불씨를, 잔불을 끌어내기 위해 탐욕스럽게 그를 쥐어짰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버린 두 사람은 그저 쾌락을 쫓아 교미했다.


"귀인.... 아...아읏... 좋아해요..."


여자의 다리가 남자의 허리를 감았다. 불타 녹아버리는 이성 사이로, 쾌락에 물들어 꼬인 혀로 여자는 말했다. 남자는 이에 행동으로 보답했다. 그 말에 흥분한 남자의 공격이 마치 직검의 공격으로 스왑된 것마냥 빠르게 꽂혀들어갔다


조금이나마 더 그녀의 몸을 즐기고 싶어하는 그의 검이었지만, '불씨'를 달라고 갈구하는 그녀의 화로가 그의 물건을 끝없이 조이며 압박해왔기에 그럴 수 없었다.


아앗, 더욱 더 격렬해진 교미에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남자와 자기 자신을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큽, 이번엔 남자가 여자에게 맞추어 신음을 냈다. 마침내 전투기술 '잔불'에 도달한 그의 특대검이 그녀의 화로를 불씨들로 뜨겁게 채웠다. 불꽃같은 쾌락이 가득히 그녀의 안을 채웠고, 그와 동시에 화로가 그의 특대검을 불태우며 불 꺼진 재에게 따스한 쾌락을 선사했다.


"아...따듯해요..." 여자가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껴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자의 홍조가 가득한 얼굴과 살짝 눈물을 흘린 초점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 입을 맞춰달라는 듯이 살짝 삐져나온 혀를 바라보았다.


잠시 몸을 가다듬으려고 몸을 일으켜 세우던 여자를 남자가 또 다시 덮쳤다. 여자의 팔을 감싸며 웅크린 듯 자세를 취한 남자가 엎드려진 여자를 찔러들어왔다.


아직 잔불이 식지도 않았는데, 여자는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작은 비명과도 같은 신음소리 뿐이었다. 말로는 뭐라고 타이르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정욕에 불타오르는 남자를 받아들였다.


여자는 자신이 했던 경박핸 행동을 떠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흥분한 건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떠올린 여자는 품 속에 있던 눈가리개를 차며 부끄러움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본 남자는 더욱 잔불을 불사르며 자신의 욕망을 그녀에게 토해냈다. 어차피 이 자세면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탠데. 귀엽군.


그나저나 눈을 가리는 것도 그거대로...괜찮군. 남자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화방녀가 쓰던 눈가리개를 훑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쾌락 속에 잠겼다.


밤도 낮도 없이 모든 시간이 쓰러져 흘러내리는 곳. 망자들로 가득 채워지게 된 세계에서 두 인간은 계속해서 교미했다.

동시에 뜬 해와 달 아래에서 태초의 화로의 불꽃은 꺼졌다. 그러나 체온을 나누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곳이 어떤 곳보다도 제일 따뜻한 장소였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불꽃처럼 꽃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그들에게 시간은 많았다.

그렇게 한참이고 욕망을 타고 흘러넘치는 소울과 인간성이 꽃밭을 축축하게 적셨다.











캔버스 색은 흰 색. 흰 색은 차가운 색. 영혼 색은 검은 색. 검은 색은 따뜻한 색. 따뜻함이 차가움을 감싸는 것.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남자의 갑옷에 잔뜩 묻은 눈이 불꽃의 열기에 녹아 갔다. 녹아서 물이 된 눈이 예배당의 바닥을 축축하게 적셨다.

회화세계의 바닥을 뚫고 나온 불꽃은 어느샌가 썩은 부분을 넘어 회화세계를 모조리 불사르고 있었다. 회화세계의 중심인 예배소도 마찬가지였다.

불길을 뚫고 걷던 그에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불타는 방 속에서 화가는 캔버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자신의 기사가 아닌, 다른 기사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소녀는 의외라는 듯 그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가 품 속에서 영혼 하나를 꺼내었다.

어두운 영혼이 피 속에서 요동쳤다. 소녀는 그것을 건내받았다.

그녀의 기사는 자신을 죽여서, 그녀에게 물감을 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아무튼 간에 그 녀석의 사명 또한 이루어졌고, 그러니 미련은 없겠지. 남자는 생각했다.

소녀는 어두운 영혼의 피를 보았다. 곧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는, 캔버스에 그것을 흘렸다.


"고마워요. 재의 사람. 이걸로 저는, 세계를 그릴 거에요."

소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무언가를 눈치챈 걸까.

소녀는 붓을 들더니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녀의 캔버스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흰 캔버스가 불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남자는 두 번 놀랐다. 처음은 소녀가 먼저 무언가를 물어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그 물어본 것의 내용 때문이었다.

이름?

불사자에게 이름은 없다. 어차피 이름의 주인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잊게 되므로, 그렇기에 불사자에게 이름은 필요하지 않다.

굳이 이름을 먼저 밝히는 자들은 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 뿐.

그들에게 먼저 이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소녀는 그것을 물었다.

열기를 타고 희미한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떠올랐다. 아주 잘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그는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이름이 생생하게 기억나고 있었다.

말해야 하나? 남자는 소녀를 마주보았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자는 모든 불씨를 털어냈다.

어느샌가 옷을 완전히 다 벗어던진 두 사람은 스태미너를 다 써버리고는 꽃밭에 누워 있었다.


"엄청 많이 쌓여있었나 보내요. 참는 건 몸에 안 좋다는데 그동안 어떻게 버티신 건지... 아무튼, 정말...정말로 기분 좋아지는 것이었어요. 재의 귀인..." 여자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흡족한 듯한 표정이었다.


남자는 반쯤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그러게... 화방녀... 아니, 화방녀가 아니지. 그러면 나는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지? 남자가 물었다.

예? 넌 이제 화방녀가 아니잖아. 이제 어떻게 부르면 되지? 이름은?


여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 이름은 원래 없습니다.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잘 모르겠어요." 여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러면 당신도 이제 재의 귀인이 아니군요. 그럼 저는 귀인, 아니,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나요? 그대? 귀공? 영웅? 아니면.... 이름이 있으신가요?"


이름. 이름이라. 그는 불사자가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름을 말했던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먼저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름만은 항상 기억할 수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천천히 속삭였다.




소녀는 그림을 그렸다.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분명 언젠가, 누군가의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그림을.

불을 모르는 자는 세계를 그릴 자격이 없다.

버려지고 쓸쓸한 자들에게는 따뜻함이 필요하다. 불은 따뜻하다. 화가가 그려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안식처다. 그러므로 화가는 불을 알아야 한다.

불에 이끌리는 자는 세계를 그릴 자격이 없다.

그러나 버려지고 쓸쓸한 자들은 차가움에 익숙하다. 불은 따뜻하다. 화가가 그려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안식처다. 그러므로 화가는 불에 이끌리면 안 된다.

소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전해 주었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그려진 것이 흰 색의 회화세계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검은 안료가 캔버스를 덮었다.

이 그림의 주인들은 버려지지도 않았고 쓸쓸하지도 않으니까.

춥고, 어두운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상냥한 안식처 뿐이었다.

소녀는 그림을 그렸다.

특별한 기교도 없고, 장식도 없는 투박한 그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인간다운 그림이었다.

흰 색처럼 자신을 고상하게 빛내지는 않지만, 빛을 받아들이고 열을 품을 수 있는 색이었다.

춥고, 어둡고, 굉장히 상냥한 그림. 분명 언젠가, 누군가의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을만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림이 그려지는 방은 불타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나무들을 만찬으로 삼아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며 춤을 췄다. 불꽃의 군무에 맞추어 작은 불씨들이 일렁였다. 어둠이 빛과 열을 빨아들였다. 빛을 따라서 춤출 파트너를 찾듯 불씨도 검은 그림을 향해 춤추며 날아올랐다.

어두운 그림 사이로 불꽃이 일었다.







용량때문에 짤려버린 짤막한 에필로그 딴데다씀 :에필로그 - 그레이트 룬 갤러리 (dcinsi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