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게 물든 땅 위로 제비가 울었다.
겨울을 끝낼 봄을 찾듯이 제비는 울었다.
하얗게 몸을 숨기고 있던 올빼미가 소리없이 제비를 낚아챘다.
눈에 덮인 땅은 다시 고요히 안식을 취했다.
뒤늦게 제비의 부름에 답하듯 새벽이 밝아왔다.
동녘에 걸친 해가 오래 떠 있을 구실을 찾듯 제비를 찾아 땅을 샅샅이 훝었다. 눈은 매서운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려 속을 보였다.
눈이 부드럽게 품어 주던 썩다 만 병사의 시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없이 영면을 깬 햇빛이 눈과 함께 시신을 녹였다.
떠돌던 들개 한 마리가 썩는 냄새를 맡고는 달려들었다.
고독과 고통과 무리를 지어 홀로 떠도는 들개. 들개는 앙상한 뼈를 발라 썩어문드러진 고기를 뜯어먹었다.
지나가던 소년이 그것을 보았다. 들개도 소년을 보았다. 둘은 눈을 마주쳤다.
반들반들한 핏자국이 개의 이빨 사이로 번졌다.
긴장한 소년의 입이 바싹 타들어갔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더니 먹다 남은 떡을 던져줬다.
들개는 잠시 고민하더니 던져진 떡을 받아먹었다.
살점과 피가 엉긴 이빨에 단 맛이 퍼졌다.
잊을 수 없는 단 맛이었다.
들개는 이빨을 거두고 소년에게 복종했다.
들개의 이빨이 소년을 지켜 준다면 소년은 들개에게 떡을 줄 것이다.
암묵적인 약속을 맺고는 단 맛에 취한 들개가 소년을 따라나섰다.
쇠 냄새가 진했다.
고철을 너무 오래 꺼내둬서 그런가, 보급을 점검하던 야마우치 텐젠은 생각했다.
더욱 심해지는 쇠 비린내를 참다 못해 고철을 정리하러 가던 그의 투구를 도자기 파편이 때렸다.
사무라이 대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담벼락 주변에서 인기척이 조금 느껴질 뿐.
부하들은 다 어디로 놀러간건지. 꼬맹이들이랑 짜고치고 나를 놀려먹으려는 건가. 그는 추측했다.
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없었다. 닌자와 같이 은밀하고 신속한 쏙독새를 흉내낼 수 없었고, 천수각의 무사들처럼 강인하고 치명적인 검술을 흉내낼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아시나 변방의 경비에 자원했다.
특별히 능력없는 자신이 아시나에 도움이 될 방법은 누구보다 먼저 죽어 시간을 버는 정도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영광스럽게도,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오는 적들과 원없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제설 작업이라고 불리는 겨울과의 무자비한 전투에서 자신의 온 능력을 다해 살아남은 그는 차츰 칼부림보다도 이 생활이 좋게 느껴졌다. 부하들과도 그럭저럭 친해질 수 있었고 공기도 맑고 경치도 좋았다. 주민들도 친절했다. 최전선답지 않게 그곳은 평화로웠다.
거의 유일한 위험 사항인 내부군은 골골거리는 늙은이 하나가 무서워서 시답잖은 도발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수 있는 평화를 즐길 수 있었다.
사소한 단점이라면 항상 보던 주민들과 부하들 말고는 제대로 된 사람과 만날 수 없다는 점이다.
내부군의 닌자 정도면 양반이다. 이상한 붉은 눈의 도깨비라던가, 목 없는 귀신이라던가, 계곡 밑을 기웃거리는 신령 한 마리라던가,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그는 아시나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최전방을 사수하는 정예 사무라이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소소한 꿈이 짓밟히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사무라이 대장의 위엄을 보여 정중하게 외지인을 반기고, 기품있는 갑옷을 뽐내고, 이 계곡은 신령님이 사는 위험한 계곡이니 빙 돌아가는게 좋다고 아는체를 해 보고 싶었다. 외지인이 정중하기만 하다면.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되다 만 머저리들을 관리해야 하는 처지로군. 오늘 새벽부터 벌어진 하늘과의 전투에서 탈영한 것도 모자라 상관에게 장난을 치다니.
사무라이 대장으로서 기강 교육을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담벼락으로 다가가는 찰나에 그의 목이 쇠에 베였다.
그도 황급히 쇠를 꺼내들어 자신을 공격한 쇠와 맞섰다.
쇠 울리는 소리가 스무 합 가량 들렸다. 이내 조용해졌다.
피묻는 쇠를 든 자가 주변을 살피더니 고철을 줍고 떠났다.
쇠 냄새는 여전히 진했다.
사세 진스케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시나류의 투쟁법, 그리고 그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그림이었다.
무명잡배부터 번개를 쏘는 악녀들까지 각양각색의 적들을 분쇄하는 아시나류의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의 아무것도 모르는 그였다면 무슨 무협지를 그려놨냐고 비웃었을 만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아시나 잇신을 아는 그는 그림의 내용을 그저 경외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방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진스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납도한 도를 단단히 붙잡고 적을 살폈다.
너무 조용한 아래층과 피로 얼룩진 적의 옷과 검을 보아하니 밑 층의 무사들은 모두 당했나.
가벼운 옷차림에 단독 잠입... 잠입이라기엔 너무 시끄럽지만. 상대는 닌자였다. 노리는 것은 잇신의 목이거나 겐이치로의 목이겠지. 어쩌면 쿠로 황자일수도 있고.
겐이치로나 쿠로가 당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변약에 미친, 이단의 검술을 쓰는 애송이와 그 애송이가 데려온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잇신이 당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 사람이 당할 리가 없기에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닌자를 막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무사들이 모두 당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시나류로도 닌자 하나를 이기지 못하다니. 그것도 정면으로 부딪혀오는 닌자를.
온 일생을 아시나류에 바쳐 살아온 진스케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수치처럼 느껴졌다.
도전과도 같이 느껴졌다. 굳이 상대할 필요 없을 아시나류의 무사들을 몰살시켰다는 사실이.
적 닌자가 아시나를 멸망시켜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혼란한 시대에 있었다가 사라진 별볼일없던 나라 중 하나로 기억될 테니까.
하지만 아시나류는 아니었다. 자신이 일평생 바친 검술이었다. 잇신의 검술이었다. 잠시 있었다가 사라진 별볼일없는 검술로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그를 직접 꺾어 아시나류를 증명해내야만 한다.
그는 발도했다.
아시나십문자. 오직 베는 것만을 생각한 아시나류의 오의.
수라조차도 베어낸다는 두 번의 참격이 적의 몸을 찢었다. 찢었을 터였다.
적은 두 참격을 튕겨냈다. 이미 알고 있는 기술이라는 양.
아무리 잇신의 그것과는 수준이 다르다고는 해도, 끊임없이 수련해 온 기술이 막혔다.
진스케는 당황해 몸을 황급히 뒤로 빼고는 하단을 휩쓸었다.
닌자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뛰어올라 진스케의 머리를 걷어찼다.
자세가 무너지면 죽는다, 간신히 평정심을 찾은 진스케는 다시 방어를 올렸다.
그리고 되찾은 평점심을 잃었다.
공중에 떠 있는 닌자가 취한 자세는 아시나류의 자세였다.
왜 저 녀석이, 당혹감으로 몸이 굳어있는 사이 거칠게 정면에서 때려 베는 참격이 부딪쳐왔다.
아시나일문자. 도대체 어떻게 저 녀석이. 진스케의 반응이 느려졌다. 느려진 빈틈 사이로 두 번째 참격이 내리꽂혔다.
일문자는 이연으로 완전해진다. 진스케의 머릿속에 잇신의 말이 맴돌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닌자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아시나류의 투쟁법, 그리고 그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그림이었다.
무명잡배부터 번개를 쏘는 악녀들까지 각양각색의 적들을 분쇄하는 아시나류의 그림이었다.
거칠게 공기를 찢으며 철이 허공을 갈랐다. 목표에 닿지 못하고는 땅바닥을 거칠게 내리찍었다. 굉음이 울렸다.
느리면 죽는다. 그가 살아오면서 항상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었다.
대검과 도가 서로의 느린 쪽을 향해 빠르게 공격을 주고받았다.
싸움에서나 일상에서나 느린 자는 도태되고 죽어나간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도 마찬가지다. 변약의 은혜를 위한 도를 느리게 모은다면 아들은 죽을 것이다.
그러니 빠르게 죽이고 뺏을 수밖에.
그의 상대는 가벼운 옷차림과 신기한 팔을 가진 검사였고, 판금갑옷을 뚫기에는 너무나도 느리게 검을 휘둘렀다.
그래서야 죽는다. 그는 대검을 휘둘렀다. 상대는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반격했다. 느렸다.
검이 통하지 않는 걸 알고서도 맞서다니, 그는 의아해했다.
자존심 높은 사무라이일지라도 그와 갑옷의 차이를 느끼고는 좌절하고 도망가기 마련이었다.
도망가기 편한 옷과 손을 가지고서도 끝까지 그와 맞서는 상대는 드물었다.
물러날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말이지. 그는 그의 적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니, 단순히 절로 가는 것이라면 자신을 지나쳐서 갈 수 있을탠데.
갑옷을 때리는 검을 느끼며 그는 점점 의혹에 빠졌다.
절로 가는 게 목적이라면 적당히 산을 타고 돌아갈 수 있다.
제거를 의뢰받았을 리는 없다. 절과의 계약 때문에 세간의 신고는 닿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라면 이렇게 문답무용으로 싸울 리는 없다. 일본은 그런 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왜 자신과 싸워주는 건가. 그는 알 수 없었다. 의혹이 서서히 공포로 바뀌어 퍼져나갔다.
몸이 기우뚱 휘였다. 아, 그는 정신을 차렸다. 생각이 느려지자 몸이 느려졌다. 충분히 빨라진 검이 느린 갑옷을 무너뜨렸다. 하늘이 뒤집혔다.
느리면 죽는다. "로버트-" 그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빨라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세상 그 무엇보다도 빨랐다.
거칠게 공기를 찢으며 철이 허공을 갈랐다. 목표로 한 것에 닿지 못하고는 땅바닥을 거칠게 내리찍었다. 굉음이 울렸다.
독은 곧 약이다. 고영 도당에 몸을 담은 닌자는 뼛속까지 세겨지도록 '부모'에게 들은 말이었다.
맞는 말이다. 사내는 자신의 독수를 만졌다. 적을 헤치는 독이 곧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약이다.
약사들이 하는 말과는 의미가 다르면서도 같았다. 그의 손 또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약이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가족'들이 따지기는 했지만 원래 약이 과하면 독인 게 아닌가. 적어도 아무 약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독은 곧 약이다. 그러니 몸 구석구석에 완전히 스며들도록 깊숙하게 심어야 한다. '부모'의 가르침이었다.
맞는 말이다. 약을 끓이는 약사들이나 끓인 물에 독을 타는 자객들이나 모두 공감할 말이었다.
아시나 본성에 먼저 잠입한 것도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이미 죽었습니다.
아우가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독을 먹일 자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먼저 천수각으로 향한 올빼미의 솜씨는 아니다. 뒤를 찌른 흔적이 없다.
애초에 깊게 파인 상처는 닌자나 자객의 것이라기보다는 방에 그림으로 그려진 사무라이의 기술에 가까웠다.
아시나 무사들끼리 내분이 일어났을 리는 없다. 이곳에 제일 먼저 도달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동생'이니 다른 형제들이 먼저 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대체 누가 아시나의 정예 무사들을 모조리 죽인 건가.
그는 찜찜함을 느끼고 방을 둘러보았다. 아우는 무사의 시체를 적당히 숨긴 뒤에 그에게 물었다.
다음은? 그는 대답했다. 대기한다.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전면전에 들어간 것이겠지. 그는 생각했다. 어쩐지 느낌이 안 좋다. 천수각을 사수한다 치고 이곳을 지키고, 전투가 본성에 닿을 정도로 격렬해지면 적당히 빠져나가자. 그가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동생의 목에서 꿀렁, 피가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흘러넘친 피가 누군가의 칼날을 적셔주고 있었다.
언제 문이 열렸던 거지, 그는 독수를 풀었다. 또 다른 닌자가 있었다. 쏙독새도, 고영 도당도 아닌 다른 누군가.
독은 곧 약이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담아 뻗어진 독을 한가득 품은 팔이 적의 검을 녹여나갔다. 사방으로 독이 펼쳐지며 적의 몸과 자세를 무너뜨렸다.
아슬아슬하게 체술을 튕겨낸 그 역시 팔을 뻗었다. 자신의 팔과 같이 그의 팔 한 쪽도 이상했다. 뼈였다. 의수같은 뼈였다. 오니가 떠오르는 괴악한 모양새다.
고철이 심어진 뼈가 뒤틀리며 불꽃이 튀겼다. 이글거리는 증오와도 같이 불꽃이 튀겼다. 뼈에 새겨진 송곳니들이 펼쳐졌다.
그의 손은 약도, 독도 아니다. 이빨이다. 다양한 용도의 뼈들을 모은 집합체. 그러나 그저 씹어내는 것만이 목적인 물건. 단지 그것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또한 씹혔다. 흐려진 눈 사이로 그림 한 장이 보였다. 여인 무사의 그림. 뼈들 사이로 희미한 독 냄새가 났다.
독수라는 이명으로 불리던 고영 도당의 사내는 직감했다. 적은 더 이상 독을 쓸 일이 없을 것이다.
뼈가 약병을 집어 주인의 몸에 독을 부었다.
독으로 몸을 고친 그는 더욱 깊숙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다친 닌자가 있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어린 약사는 물었다.
그는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그녀는 스승을 바라보았다.
도겐은 말했다.
숨겨진 병도 찾아내 고칠 수 있어야 약사라고 할 수 있다.
첫 진단 실습에 감정에 고통마저 숨기는 닌자를 데려오면 저더러 어쩌라는 겁니까.
그녀는 마음속으로 푸념했다.
...베인 상처입니까, 찔린 상처입니까, 상처가 썩어서 문제입니까, 아니면 고통이 심해서 찾아오신 겁니까, 저는 당신의 약점을 찾는 적이 아니라 당신의 약사입니다. 당신을 도우려고 이러는 거니 부디 말을 해주십시오...
닌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얼굴은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조금 삭은 것 같았지만 키와 몸집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 자신과 또래인 듯한 닌자였다.
참다못해 딱 봐도 붕대가 감겨진 부분을 두드려 보았다.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 구별이 안 가는 굳은 얼굴만이 보였다. 그쯤 되니 닌자의 인내심에 경외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나중에 힘든 일이 생기면 이 닌자에게 부탁하면 좋겠다, 소녀는 작게 결심했다.
자신이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그러는건지, 싶어 다시 도겐을 바라보았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잇신은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런 닌자가 손님이라면 나라도 답이 없겠군. 도겐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빼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이러는가? 물었다. 네. 대답했다.
숨기고 있으면 억지로 꺼내게 해야지. 올빼미는 허허 웃더니 붕대로 감긴 부분이 아닌 옷으로 꽁꽁 감춰진 부분을 힘껏 걷어찼다.
거기가 아픈가? 올빼미가 뻔뻔스럽게 물었다. 닌자는 결국 굴복했다. 예.
그렇게 그녀의 첫 진단은 끝이 났었다.
아시나는 병들었다.
독과 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용운에 홀린 자들이 퍼뜨린 병이었다.
에마는 병을 고치고 싶었다. 잇신도 동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남자를 끌어들였다.
그 결과는 최악이었다.
자신 또한 독과 약을 구분해내지 못했고, 잘못된 처방의 댓가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였다.
이번에도 그는 병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샌가부터 주객이 전도된 채로 벌어지는 칼부림.
주군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닌, 싸우기 위해 주군을 따른다.
다르게 말하자면, 싸울 수만 있다면 섬기는 자가 누구여도 상관없다.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이었지만, 그의 배신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진찰도, 처방도 모두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저는 예전에도 수라를 본 적이 있어요. 당신 안에도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책임을 질 때였다. 눈을 흘기며 에마는 부드럽게 검을 발도해 자세를 잡았다.
"저는 그것을 베어야만 합니다."
남자는 아무 말도, 움직임도 없이 싸울 자세만을 잡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건가. 싸움을. 그녀가 알던 그의 눈빛이 아니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갑니다."
수라와의 싸움. 어리석었다. 승산이 없는 싸움임은 에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을 베어내고 승리하더라도 과정이야 어떻든 결국 패배하고 쓰러지는 것은 자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작은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약사로서도, 잇신과 아시나를 섬기는 사람으로서도, 소년의 굳센 마음을 동경했던 소녀로서도.
무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표정 사이에 숨은 상냥함, 무사한 쿠로를 확인하며 안도하던 그의 상냥함을 믿고 싶었다.
그러니 그를 베어내야만 했다.
수많은 감정이 오고가는 천수각에 울려퍼지는 것은 철이 맞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침묵이 가득 채운 두 사람 사이로 철은 대화했다.
에마의 검은 부드러웠다. 유검(柔剣)의 경지. 환자를 대하듯 상냥하게, 병을 고치듯 거칠게, 아시나류를 실은 그녀의 검이 휘날렸다.
남자의 검은 거칠었다. 수라의 검. 사냥감을 속이듯 조심스럽게, 사냥감을 쫓듯 맹렬적으로, 수많은 살인의 기술을 담아낸 그의 검이 휘날렸다.
입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검에 실려 나누어졌다.
대화는 엇갈렸다. 힘에 밀려 빗겨져나온 그녀의 말을 비집고 남자는 에마의 말을 억지로 끊었다.
대화를 끝낸 남자는 그녀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듯이 풀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수라, 피로 꽉 막힌 목 사이로 그녀는 간신히 소리를 내뱉었다.
결국 다친 닌자조차 치료해내지 못한 건가. 만족스럽게 자신의 베인 자국을 훑는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서녘에 걸린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유검이 떨어졌다.
황혼에 젖은 천수각이 붉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늑대였다.
짐승이 웃는 이유는 송곳니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잇신은 종종 들어왔던 숙어가 문뜩 떠올랐다.
그랬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짐승이었다. 피에 미친 짐승.
"세키로여."
그가 알던 늑대는 짐승이 아니었다.
저렇게 마음이 무디어서야 들개나 다름없다. 올빼미는 그렇게 평했었다. 정말로 그랬다.
"붙임성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기이하게도 미워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지."
맹수와도 같이 죽이고 빼았고 훔치고 속이고 숨기고 다니는 전형적인 닌자들과는 달랐다. 개와도 같이, 지키는 것에만 열중하는 어중이떠중이.
그렇기에 잇신은 그가 마음에 들었었다.
"자아, 수라로 전락하기 전에 죽여주마."
주인을 지켜내고 아시나를 지켜내게 만들고자 그를 도왔었다.
주인을 찾아내도록 하기 위해 내준 약은 사람을 쫓는 동력이 되었다. 주인을 쫓도록 하기 위해 내준 팔은 사람을 찢는 발톱이 되었다. 주인을 지켜내기 위해 알려준 재주는 사람을 무는 기술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빨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또 볼 생각에 신난 것처럼 보였다.
"다시 수라를,"
원숭이도 난폭해지면 사람을 맨손으로도 찢어죽이는 짐승이 되는 법. 베어서 없애야 마땅하다.
"베는 날이 올 줄이야아!"
그리고 그곳에 있던 것은 늑대였다.
"세키로여... 베어주지 못한 건가..."
아시나가 저물었다. 서쪽으로 빨려들어가는 태양처럼 동쪽에서부터 밀려오는 불꽃의 군대에 짓밟혔다.
불꽃에 잠긴 천수각에서 이미 사냥당한 사냥감을 멍하니 늑대는 지켜봤다.
올빼미가 늑대를 향해 날았다.
이쪽도 일이 잘 풀렸다, 그는 중얼거렸다. 늑대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역시 내 아들이다, 이제 모두 내 수중에 들어왔다, 아시나도, 내부 놈들도, 이 나라 전체를 먹어주겠다!
"나, 우스이 우콘사...!!"
푹. 성공에 방심한 올빼미를 굶주린 늑대가 물었다.
"어째서..."
이리도 싱겁다니, 늑대는 생각했다. 느린 걸 넘어 반응조차 하지 못하다니.
"수라...!"
당황한 표정의 사냥감이 뭐라 중얼거렸다. 늑대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실력이 조금은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이리 싱겁다니, 늑대는 시시하다는 듯 시체를 바닥에 내쳤다.
주인을 잃은 쇠 냄새와 피비린내가 불길에 날아오르는 바람을 타고 진하게 풍겨 왔다.
시끄럽게 타오르는 화염과 함께 약속은 끝났다.
소년의 떡 없이도 늑대는 피로 허기를 채웠다.
살점과 피가 엉긴 이빨에 단 맛이 퍼졌다.
잊을 수 없는 단 맛이었다.
소년이 그런 늑대를 보았다. 늑대도 소년을 보았다. 둘은 눈을 마주쳤다.
아니다, 소년은 늑대를 향해 울부짖듯이 명령했다.
그는 들개가 아니다. 늑대는 주인을 섬기지 않는 법이다.
피와 원망과 무리지어 홀로 떠도는 늑대. 늑대는 자신을 만족시킬 사냥감을 찾을 뿐이었다.
소년에게 흥미가 없다는 듯 늑대는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살점과 피로 엉긴 이빨은 아직도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대는 수라가 아니다, 소년은 울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소년이 울었다.
...병사와 백성을 합쳐 사망자는 수천에 이르렀으며 생존자는 거의 없었다.
아시나는 전국시대에서 가장 비참한 살육의 장으로 기억되었고,
그 땅에는 먼 훗날까지 오니가 살았다고 한다.
3줄 요약 ㅇㄷ
댓글추
각 인물마다 써준거 재밌고 좋노
오
와 이게 글이구나 배워간다 존나 잘 쓰네 씨발..
읽진않았는데 개추
야스씬이 없는데?
와 씨 필력 미쳤네
독은 곧 약이다 인게임 툴팁 어디에 나오는 말임? - dc App
창작인레후
에마 뷰지 ㅇㄷ?
진지하게 읽다 로버트에서 터짐
ㄹㅇㅋㅋㅋㅋㅋㅋㅋㅋ
글 존나 잘 쓴다
와 쩌네 잘읽었음
d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