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음이 변한다면 제 목숨을 취해 제 눈동자를 거두어 주세요. 제가 불이 꺼진 세계를 잊을 수 있도록."


"굳이? 왜 죽여야 하지?"


"죽으면 망각할 수 있으니까요. 모든 불사자들이 그렇듯이. 불이 꺼진 세계를 아는 한, 저는 불을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귀인께서 불을 쫓게 된다면 귀인 또한 섬기지 못할 것이고요. 불을 배신하겠다는 마음이 바뀐다면, 그때는 저 또한 죽여주세요. 불을 다시 섬길 수 있도록."


"그게 무슨 소리지. 살아 있어야 기억을 잊든 말든 하지, 죽었으면 언제 어떻게 기억을 잃지? 혹시 고향이 드랭글레이그인가?"


"욕하지 마세요. 죽음은 가장 큰 고통,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 충분합니다. 미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기억 또한 마찬가지지요. 그러니 마음이 변했다면 제 목숨을 취하시면 됩니다."


"기억을 잃는 방법이 죽는 것밖에 안 떠오르나?"


재의 귀인은 양심을 내다버리고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일을 잊은 채 말했다.


"...네."


"좋아. 마음이 변했다. 네가 섬겨야 하는 건 불 따위가 아니다."


"앗...?♡"


그날 밤 불의 계승의 제사장에서 화방녀는 수없이 뿅가죽고 반쯤 미쳐가며 재의 귀인의 물건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재의 귀인은 불 따윈 내다버리고 자신을 섬겨 주는 여인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