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앞, 근첩 있다.

이 앞, 구멍 있다. 그러나 손가락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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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파랗게 검은 하늘에 오롯이 뜬 초승달이 창처럼 빛나는 혜성에 꿰뚫렸다. 바람이 새되게 속삭이는 날이건만, 새도 듣지 못하는 스산한 소문이 두렵지도 않은지 암월의 신은 창에 팔을 기대며 앉았다. 태양을 그린 투구 아래로는 묘한 기대가 묻어났다. 혹여 밤손님이 날아들려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림자 진 반월의 변덕일까. 어느 쪽이든 오늘은 무언가 일어나리라. 귀에 나긋하게 다그치는 작은 폭풍이 그리 말했다.


 숨이 그치기 전에 바람이 그쳤다. 아스라한 날갯짓 소리가 들기도 전에 거구의 형체가 시야를 앗아갔다. 첫째 태양의 추방된 맏아들과 그 친우, 폭풍을 일으키는 비룡이 정적 속에 드러났다. 바람이 전해준 풍문은 틀리지 않았다. 기다리던 것이 왔으니까. 그윈돌린은 으레 그랬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고는 창에서 몸을 밀었다. 무명왕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거대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날쌘 동작으로 방안에 자리했다. 투구를 벗기도 전에 의문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암월의 신은 한참 동안 형을 바라보다가 작은 원탁 앞에 앉으며 말했다.


“드시지요. 형님을 위해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이름 잃은 신은 예의상 투구는 벗었지만 동생과 합석하지도 않았다. 평소 단 거라면 질색하던 형을 위해 동생이 준비한 게 고작 다과라니. 무명왕은 투구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비룡에게 손짓했다. 깃털이 날리는가 싶더니 몸체가 저 위로 솟구쳤다. 근처가 환영에 덮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윈돌린이 자신의 힘으로 이 일대의 감시를 모조리 가렸다. 하지만 어째서?


“동생아. 늦게 와서 미안하다만, 난 여기 오래 있을 수 없는...”

“형님. 잠시만 앉으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말도 끊느냐. 못 본 새에 많이 자랐구나.”

“형님만큼은 아닙니다. 용과 친우를 맺다니, 놀랍기 그지 없는 일이지요.”

“그런가. 그래서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별 것 아닙니다. 그저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가시기 전에, 라기엔 이미 추방된 몸이지만 그렇다고 동생의 편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무명왕은 품에 고이 접어둔 편지를 더듬고는 별 수 없이 그윈돌린과 마주 앉았다. 그의 몫으로 놓인 것은 암월의 문장이 새겨진 쿠키, 빵, 그리고 차 한 잔. 그는 동생의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다과와 차를 들었다. 달지 않았다. 분명 그의 입맛에 맞춘 음식이었다. 역시 기쁨이라 부를 만한 것이 몰려왔다. 그러나 불안도, 예측도, 한 번에 다가왔다. 식기 달각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꽤 불편한 정적이었다. 그윈돌린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였다.


“다과는 입에 맞으십니까? 성의 요리사에게 특별히 설탕을 덜 넣어달라고 청했습니다.”

“네가 직접? 고작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이냐?”

“아니요. 형님을 기다리다 보니 저도 심심한 음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참 야속하지요.”

“그 점은 미안하구나. 하지만... 고맙다. 꽤 맛있구나.”

“다행입니다. 입에 맞으셔서...”


 저 미소. 반달처럼 옅게 휜 미소가 어딘가 불안했다. 설령 이 다과에 수면제를 탄 게 아닐지. 그는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동생이기에, 오히려 형을 잡아두기 위해 어떤 짓이든지 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동생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가섰다.


“형님은 언제나 암월보다 밝은 벼락이자 저의 태양이셨지요. 이리 가신다니 섭섭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남아달라는 것이냐? 동생아. 솔직하게 말해다오.”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이곳, 아노르 론도에 남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약속을 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친우와 함께 신도 닿지 못하는 곳으로 가기로.”

“분명 하늘 너머겠군요. 이 반쪽짜리 감옥에서도 보지 못하는 곳이라면.”

“그렇다. 네 환영이 장막을 드리웠다만 벌써 밤이 반절은 지났겠지.”

“아니요. 아직 사양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있어 주십시오.”

“네가 원한다면. 다만 밤이 다하기 전에 내게 알려다오.”

“그러겠습니다. 역시 새는 잡아둘 수 없겠지요.”


 한탄이 가득 담긴 목소리. 갑자기 무기력하게 늘어지는 팔다리. 무명왕은 동생을 안쓰럽게 보았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위로를 건네기엔 너무 멀리 온 삶이었다. 그리고 한 신이 위로 따위에 만족할 리도 없었다. 그는 결국 의자에 앉은 채 동생이 소리 없이 훌쩍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울음은 금세 멈췄다. 그러나 표상엔 슬픔이 만연했다. 단지 형제애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연인을 떠나보내는 듯한 애상이었다.


“...동생아. 힘듦은 잘 알지만 그만 가야 한단다. 친우가 날 부르고 있어.”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다만... 형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다면 뭐든지 들어주마. 부탁이 무엇이냐?”

“별거 아닙니다. 그저 한 번만 따스하게 안아주십시오. 어릴 적에 그랬듯이.”

“...그러마.”


 분명 별거 아닌 부탁이었다. 그러나 그윈돌린은 투구를 벗고는 의자에서 몸을 내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명왕은 곁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동생이 자신을 안기를 기다렸다. 어릴 적에 항상 이렇게 앉아 전쟁의 얘기와 세상의 신화를 들려주었고, 그 끝에는 졸음에 취한 서로가 동침했으니까. 서순이 반대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대로였다. 그러나 한 가지가 추방된 이의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별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형제니까.


 그러나, 당혹이 그를 안았다. 숨이 느껴졌다. 암월의 복수처럼 뜨겁고 태양처럼 서늘한 숨이. 친우의 등에 탄 마냥 부드러웠다. 뜨겁게 달아오른 검이 볼을 베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쟁의 한복판과도 같았다. 동생과 이불을 덮고 한 침대에 누워 밤을 불살랐을 때의 열기와 비슷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동생을 안았다. 입맞춤은 짧았다. 시간은 길었다. 그는 동생을 한참 바라보다가 투구를 썼다. 어느새 창가로 내려온 비룡이 등을 내주었다. 활공은 순식간이었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성이 희미한 덩어리로 변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잊지 못했다. 동생이 마지막 순간 남긴, 유언처럼 들린 한마디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리고 버렸다. 이미 신족을 떠난 몸이다. 동생과의 연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영원히 날아야만 했다.


 사랑하였습니다, 라고, 초승달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