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 오셀롯.

  순수했고 유약했던 그 왕자의 이름은,

  요왕의 잔혹한 폭정과 함께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왜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오늘은 그 이야기를 짚어보도록 한다.


  이 비극의 눈물겨움은, 그의 두 형제들이 품은 비극과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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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 이틀을 내리치는 비는 차갑고 요란했다. 로스릭 왕궁의 붉은 벽면을 타고 내리는 빗물은 걸쭉한 핏물처럼 보였다.

  거기서, 헬렌 왕비는 서둘러 왕자를 데리고 왕궁의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위병들이 기다리고 있는 가마로 이끌고 있었다.


  “곧 로리안 형이 검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어요, 엄마.”

  오셀롯 왕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시간이 없단다, 얘야.”

  오늘이라는 시간을 이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미친 왕의 광기에서 서둘러 이 가엾은 아이를 탈출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카림에 계신 네 이모부나 사촌형들에게도 검술은 얼마든 배울 수 있으니 너무 섭섭해 하지 말렴.”


  ‘어서 카림으로 달아나야 이 아이를 오스로에스의 광기에서 구할 수 있어.’

  

  젊고 어질던 오스로에스는 죽었다. 이제는 백룡 신앙이라는 피와 광기에 심취한 미친 요왕(妖王)이 로스릭에서 군림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룡교단의 심층예식이 예정된 오늘을 왕비는 인내를 가지고 고대해왔던 터였다. 오늘까지의 인내를 허사로 만들 수는 없다.


  “아버지에게 가는 건가요?”

  가마 안에서 줄리엣이 깊은 공포로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아버지한테는 가기 싫어요. 아버지는 맨날 제가 성스러운 용의 아들이라면서 때린단 말예요. 로리안 형한테 갈래요. 형한테 보내주세요. 전 용이 되기 싫어요.”

  “아버지에게 가는 게 아니니 걱정 말거라, 오셀롯. 이제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돼. 용이 될 필요도 없단다. 그러니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말거라. 내 마음도 아프구나.”

  “정말요?”

  어린 왕자가 눈을 반짝였다. 순진한 눈동자였다. 헬렌은 오셀롯의 그런 순수한 성격이 사랑스러웠고 또 걱정되었다.

  이곳 로스릭에서, 왕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武)이든 문(文)이든 탁월한 자질을 지녀야 했으며 심적으로 강인해야만 했다.


  ‘로리안이라면 제 아버지의 심장에 칼을 꽂을 용기가 있었을 거야. 로스릭이라면 오스로에스가 벌이는 작태를 이치에 닿게끔 정연하게 지적했겠지. 하지만 이 애는…… 너무 약하고 평범해.’


  “이걸 입거라.”

  헬렌이 오셀롯에게 누런색의 누더기 망토를 건넸다.

  “지금부터는 왕자답게 보이지 않도록 하거라. 위엄 있게 걸으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주의 깊게 행동하고, 절대로 아무 말도 하지 마렴.” 

  “왜요?”

  소년은 화려한 순백의 튜닉 위에 누더기 망토를 순순히 걸치면서 물었다. 후드 달린 그 망토는 성인용이어서 그 아이에게 상당히 컸다.

  “엄마를 믿어주렴, 아가.”

  헬렌이 오셀롯을 포근히 안아주자 오셀롯이 툴툴거렸다.

  “전 아가가 아니에요. 올해 여섯 살이 됐다고요.” 


  망토의 소매 밖으로 팔을 빼는 아이의 여윈 손목에 감긴 붕대와 흉터 들이 헬렌의 눈에 스쳤다.

  그녀를 닮아서, 윤기가 흐르던 오셀롯의 은발머리도 노인의 백발처럼 새어가고 있었고, 얼굴은 하얗다 못해서 창백할 정도였다.


  ‘도대체 이 아이를 얼마나 학대했기에 이런 증상이 보이는 거지?’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오셀롯을 보면 간단히 생각해낼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요왕의 광기에 희생되는 것을 더이상 방치해둘 수 없다.

  ‘이 아이에게는 진정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해줄 거야. 로리안처럼 데몬이 있는 전장으로 내몰겠다며 불을 몸속에 집어넣지도 않을 거고, 로스릭처럼 인간 장작으로 만들지도 않을 거야. 이 아이만큼은 양보 못 해, 오스로에스. 이 나쁜 자식.’


  카림에 도착하면 궁벽한 산골마을에 오두막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왕궁이나 도심지는 아무래도 위험하다. 이미 카림의 티어가드(Tear guard : 눈물의 경비대) 성의 영주인 워커 공의 부인이 되어 있는 동생에게 그러한 도피처를 요청하는 연락을 보내놓은 터였다.


  왕비의 가마는 로스릭 왕궁을 지나 대서고 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을 탈출시켜줄 용기사 아델이 선두에서 가마를 호위하며 선도했는데, 그 청(靑)기사의 청색 망토가 비에 깊이 젖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뒤쪽으로는 로스릭 왕자가 보내준 호위병 20명이 창을 들고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셀롯이 가마의 뒤편을 흘끗 쳐다보았다.

  “엄마, 저 병사들은 왜 휘장에 달린 문양이 달라요?”

  “네 로스릭 형을 따르는 병사들이라서 그렇단다.”

  좀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로스릭 왕자가 백룡 신앙에 맞서서 포교를 장려하고 있는 천사 신앙에 매료된 병사들이었다.

  천사 클램트를 신봉하는 병사들의 전포에 수놓인 문장은, 성검을 양쪽에서 떠받치는 두 마리의 고룡이 아니라, 세 마리의 뱀이 어지러이 엉킨 문장이었던 것이다. 

  

  ‘천사 신앙이 로스릭 왕국을 장악하게 둘 생각은 없습니다.’

  로스릭 왕자, 성년이 되면 장작의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난 아들에게 천사 신앙의 위험성을 경고해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총명한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미쳐버린 아버지를 끌어내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왕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니, 그 왕을 끌어내리려면 신을 이용해야하는 법이지요. 토사구팽이란 말을 아시지요? 사냥개는 미친 용에 대한 사냥이 끝나자마자 제 손으로 처리할 겁니다. 그러니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세요.’


  하지만 더이상 로스릭 왕자의 정변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저번에 있었던 의식에서는 왕이 ‘용의 피’를 신도들에게 나누어주라며 오셀롯의 팔목을 그어서 술잔에 받게 했다고 했다.


  ‘이 이상 기다렸다가는 이 불쌍한 아이가 죽고 말 거야.’


  양악(陽樂; 태양의 노래)산 정상에 세워진 로스릭 성에는 복잡한 지하 통로가 있었다. 터널처럼 산을 깎아서 만든 그 통로는 성내의 이곳저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가마가 멈춘 이 굴다리의 벽면에 뚫린 통로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왕비는 이곳을 통해 왕궁 반대편의 비룡 계류장으로 가서, 아델의 비룡을 타고 카림으로 달아날 계획이었다. 용기사 아델이 그 통로 앞에서 가마 행렬을 멈췄다.


  “열어라.”


  앞쪽에서 아델의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대 아스토라인(人) 특유의 찬란한 금발을 지닌 그 용기사는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듬직했고, 몸가짐에 위엄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명예로운 기사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높고 가는 위병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서 들려왔다.

  “이 지하통로의 문을 절대 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요. 국왕 전하의 명령입죠.”

  “길게 잡담할 시간이 없다.”

  아델이 칼자루를 움켜잡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피의 명령을 따르겠느냐, 왕의 명령에 따르겠느냐?”


  왕비는 이 문제를 아델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저들이 반항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로, 문을 열어주면 나중에 왕에게 처형당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칼부림의 고통과 고함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왕비는 왕자를 데리고 가마에서 내렸다. 그러면서 왕자가 비에 젖지 않도록 망토의 후드를 씌어주었다.

  왕족의 은발머리와 왕비의 화려한 옷을 보자 위병들이 머뭇거리다가 물웅덩이에 무릎을 꿇었다. 조촐한 사슬갑옷을 입은 두 명이었다.


  “와, 와, 왕비마마.”

  좀더 늙어 보이는 병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어찌 이런 곳에…….”

  “왕비가 국왕의 문서를 위조해서 보여줬다고 말하세요.”

  이곳에서 주춤거릴 시간이 없었으므로, 왕비는 즉각 명령했다.

  “왕비가 왕자를 내세워서 국왕의 명령을 사칭했다고 말이에요.”


  침묵.


  두 병사는 냉큼 대답하지 않고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

  그들도 두려운 것이다. 미친 왕의 보복이.

  들리는 것이라고는 굴다리 위를 때리는 빗소리뿐이었다.


  “왕비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 건가?”

  아델 경이 대답을 재촉할 때였다. 뒤쪽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적의를 보이며 창칼을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비님! 왕비님이십니까?”


  그 우렁찬 목소리에 왕비는 차가운 칼날이 등줄기를 잘라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럴 순 없어.’

  오스로에스의 의식에 왕자를 데려가는 척하면서 샛길로 몰래 빠져나온 차였다. 벌써 적발되었을 리가 만무하거늘……

  왕비는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하지만 그 눈에 부정하려는 현실은 잔인하게 들어왔다. 


  사자기사의 서늘하도록 위엄찬 모습이.


  왕비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속으로 밀어넣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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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버트.

  오백 년 전에 세계를 호령했던 포로사 사자기사단의 후손인 사내.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사자처럼 우렁찼고, 상대를 압도했다.

  대대로 계승되는 사자기사단의 갑옷, <기적>으로 벼려진 그 판금갑옷은 오백 년 지난 지금도 녹슬지 않은 채로 단지 거뭇했고 양어깨에 걸쳐진 사자 모피 망토는 그 사자의 피냄새가 아직도 선명한 듯했다.


  다행히, 사자발톱이라고 불리는 흉악한 외날 양손도끼는 가지고 오지 않았다. 무장은 검대에 매인 장검뿐이었다.

 

  ‘어쩌면 아델 경이 그를 쓰러뜨릴지도 몰라.’


  아델은 로스릭에서 가장 걸출한 기사들로만 선발되는 로스릭 용기사단의 다섯 용기사 중 한 명이었다.

  평소에 그가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않았으나 그 상대가 국왕의 친위대장 알버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무기를 가지고 오지 않은 상태라면……? 아델 경은 허리춤에 남부 로드란에서 거인 장인이 벼려낸 보검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을 물려주십시오.”

 

  알버트 경의 목소리는 쓰고 있는 대투구(Greathelem)의 철판에 울려서인지 더욱 깊고 위협적으로 들렸다.  

  천사의 위병들이 알버트 일행을 에워싸자 그를 수행하는 로스릭 적(赤)기사 2명이 쇠장갑 낀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말에서 내려온 아델 경도 그에 맞서서 칼자루를 움켜쥐고 왕비 옆에 와서 섰다.

 

  그때 번갯불이 세계를 새하얗게 밝혔고, 그 덕에 두 적기사의 전포가 또렷이 보였다. 

  그 기사들의 전포에는 성검을 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고룡이 금실로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로스릭 국왕의 상징인 그 문장을 보자 광기에 빠진 미친 왕의 눈동자가 떠올라 구토감이 치솟았다.


  혈전을 앞둔 고요 속에서 천사의 병사들도 물러서지 않고 병장기를 굳게 잡았다.


  하지만, 무기에 손조차 대지 않은 알버트가 그들과 그 기사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어서요. 왕비님, 대체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강요에 가까운 목소리였지만 이곳에서 그에게 사로잡힌다면 오셀롯의 안전도 그녀의 안전도 보장될 수가 없었다. 아마 왕비는 죽을 것이고, 오셀롯은…… 미친 왕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욱 '듬뿍' 사랑을 받을 것이었다.


  “우릴 보내주세요, 알버트 경.”


  알버트는 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헬렌은 그의 감정에 호소해보기로 작정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인정이 훌륭하기로 널리 알려진 기사단장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천둥소리가 우르릉거리며 납빛 하늘의 빗소리를 갈랐다.


  “보내달라뇨? 마마, 대체 어디로 말입니까?”

 알버트가 아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유의 땅으로요.”

  헬렌이 확고하게 말했다.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이에요. 요왕의 손아귀에 이대로 방치해두었다간 이 아이는 곧 죽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그래요, 당신은 맹세했을 텐데요. 왕족을 지키기 위해서 살겠노라고. 그런데 이 왕자가 죽게 내버려둘 생각인가요? 당신의 맹약과 명예는 어디로 간 거죠? 당신은 이 아이의 안전을 외면했어요!”

  그녀는 주춤거리는 그를 좀더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녀의 치마폭에 숨어 있던 가여운 왕자의 양어깨를 잡고 그녀의 앞으로 이끌어 세웠다. 이어서 아이의 소매를 걷고 요왕의 작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주었다. 

  태양과 달께서도 그녀를 도우시는 것인지, 그때 번개가 내리쳐서 세상을 훤하게 밝혔다.


  “당신이 줄곧 외면해온 이 아이의 처참한 모습을 보란 말예요, 친위대장!”


  그녀는 명석하게 그의 지위를 인식시키면서 마지막 비수를 꽂아넣었다. 

  다음 순간 헬렌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천둥의 섬광 덕에 사자기사의 면갑 너머의 눈동자가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연민과 슬픔, 그리고 고통.

  그 늙은 사자 같은 눈동자에서 복잡하도록 아련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커다랗게 메아리치는 천둥의 소리가 사자의 심장을 갈랐다.

    





  단편으로 구상한 거라 다음편에 완결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