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같이 적막함이 서려있던 제사장을 울리는 발소리가 있었다.
그것이 태초의 화로로 향했던 재의 귀인의 것임을 깨달은 화방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을 준비를 하며 입을 열었다.
"재의 귀인이시여...! "
그러나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던 평소의 모습과는 다르게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온 재의 귀인은 대뜸 그녀의 배에 강하게 발을 날렸다.
"...아..."
뭇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정도의 힘이 깃든 발길질에 그녀는 미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자리에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이에 이해할 수 없다는 복잡한 표정으로
재의 귀인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힘겹게 물었다.
"재의 귀인이시여...대체 왜 이러시나요..."
그러자 그제서야 굳게 닫혀있던 재의 귀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알고 있었지...?"
"그...그게 무슨 말씀인지..."
"이 세상은 이미 끝났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그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녀는 심장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넌 내게 왜 그런 시련들을 주었던 것이지?"
"재의 귀인, 제 말을 들어주..."
"네가, 네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이겨내왔다."
담담한 듯 하지만 체념과 온갖 상념이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여정이었다. 제대로 갖춘 것 없이 수없는 시련과 고난을 뛰어넘으며
이겨낼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일들 앞에서 고뇌하고 절망하면서도,
이 썩어문드러져가는 세계에도 끝이 존재하리란 네 말을 믿었다. 그런데..."
순간 깊게 눌러쓴 투구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쩍이며 그녀를 향해 내쏘아졌다.
굳게 걸친 갑주 사이로 이글거리는 붉은 불꽃이 타오르며 제사장 안을 활활 밝혀나갔다.
"네가 말했던 끝이 이것인가? 한번 재는 영원한 재일 뿐이며 작게 옮긴 불씨는 결국
작은 불씨에서 끝난다는 것? 잘 봐. 이 불은 지금 이 안을 밝힐 수준 뿐이지,
이 세계를 구할 힘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마치 넌 모두를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날 속이고 감당하기 힘든 짐들을 짊어지게 했다."
복잡한 감정에서 시작하여 격렬하게 타올랐던 그의 격정은 이제 증오로 치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종극에 이르러선 스산함마저 배어든 절망이 되어 그의 입에서 울렸다.
"너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해."
그 말과 함께 화방녀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철컥이며 갑주의 버클이 풀릴 때 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흠칫하며 몸을 떨던 그녀는 땅을 기어서라도 재의 귀인으로부터 멀어지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채를 잡힌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헐떡이던 그녀의 옷이, 우악스러운 사내의 손길에 찢겨나갔다.
"그간 우스웠을 것이다. 나는 모르고 있는 진실을 너 혼자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에
발버둥치며 밖을 헤매이는 내 모습이 배를 잡고 웃을만큼 멍청해 보였겠지."
알몸이 된 그녀의 흰 나신 위로 다시 한번 우악스런 발길질이 한 번 지나갔다.
"커흑..."
"아픈가? 나는 그간 수십 수백배에 이를법한 고통들을 감내해왔다."
바닥을 기며 쿨럭이던 화방녀는 자신의 두 팔이 엄청난 힘을 가진 그의 팔에 꾹 잡히는 것을 느꼈다.
처음 이곳에 다다랐을 적 다소 메마른 체격이었던 재의 귀인은 어느새 자신이 부여한 축복을 몸에 감고
그 누구라도 우러러볼 강인한 신체와 힘을 가진 채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강대한 힘이 자신위에 올라타있단 공포에 벌벌 떨던 그녀는, 순간
아랫도리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지르려고 했다.
"아...아...으..."
그러나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그녀위에 올라탄 재의 귀인이 한손으로는 그녀의 두 팔을,
한손으로는 목을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지옥은 시작되었다.
역대 장작의 왕들의 힘을 모조리 흡수한 재의 귀인은 결코 지칠줄을 몰랐다.
그의 몸 끝은 힘든기색 없이 심연과도 같은 그녀의 몸 속에 불을 지피며 한없이 내달렸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격정과 분노는 그녀를 결코 자상하게 대하는 법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그녀의 볼 새로 흐른 눈물이 깊은 자욱을 남길때쯤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흘렀던 붉은 피 또한 말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재의 귀인이 깊은 신음을 내며 몸을 비틀었던 그 순간
희디 흰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는 제사장을 내리쬐는 희미한 빛과 같은 백탁액이 흘러내렸다.
그제서야 그의 손에서 풀려난 화방녀는 실신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재의 귀인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자신의 애병을 꺼내들어,
자신의 목을 찔렀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그리고 화톳불에서 부활했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