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쓰러뜨린 영웅의 무덤에서 남편을 추모중인 아름다운 미망인 여기사를 보고 문득 뭔가를 떠올린 선불

눈앞에서 남편 시체(소울)을 흔들면서 모욕하면 분명 자기한테 덤벼들 것이고,

그걸 빌미삼아 역으로 제압한 후에 이런저런 요구를 할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것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앞쪽에 있는 시가지 화톳불을 찍자마자 뒤로돌아 달려온 선불

생각했던 모든 모욕적인 행동들을 어설프게나마 시도했지만

품위있고 인내할줄 아는 기사 키아란은 그 모든 것을 참아넘김


그럼그렇지 내팔자에 여자는 무슨 하고 어설픈 뻐꾸기질을 멈추고 돌아서려던 선불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키아란 허리에 매여있던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듯한 쌍검 두자루

음침한 독기를 풀풀 날려대는 검은색 단-검은 그렇다 치더라도, 황금빛으로 빛나며 날카롭게 휘어진 곡-검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졌을 것이 뻔한 이 두 자루의 무기들을 보자 선불은 그만 눈이 돌아가버린 거임


아, 운명도 참 얄궂도다


성욕은 이겨냈으되 물욕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인간의 길을 저버리게 된 선불자


* 사실 그 전에도 꼬리달린 신족 공주나 홀로 왕성을 지키던 쇼타가 선불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했긴 함 


여튼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선불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허리춤에서 방금 대영웅을 때려죽인 따끈따끈한 그레이트클럽(+15강, 피 묻음)을 조용히 꺼내듬

상대의 등뒤까지 다가선 상황에 무기를 먼저 손에 쥐고도 안심이 되지않아 말벌반지로 스왑하고 탈리스만을 꺼내 3미터짜리 나무뿌리에 인챈까지 발랐음


이런 긴박한 상황에 (여)기사 키아란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소라면 왕국 최고의 암살자답게 등 뒤에서 부리는 어설픈 야료쯤이야 순식간에 알아채고 상대의 목을 따버렸겠지만

불행하게도 슬픔에 잠긴 여기사는 자기 주변의 위험을 살필 만큼의 정신적 여유조차 남아있질 못했음


방금 남편의 유품(소울)을 넘겨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희롱질을 당하여 분노까지 차있었음

'광화(狂化)해버린 남편에게 안식을 내려주었기에 분별있는 영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늘, 역시 인간이란...!'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얗고 고운 가면 안쪽의 이마를 일그러뜨려 가며 화를 참고 있는 키아란의 가느다란 등허리 뒤에, 갑자기 엄청난 격통이 밀어닥침

거대한 대수의 가지를 통째로 깎아만들었다는 무식한 치토스가 총 두 번, 1격에 가엾은 미망인의 정신을 반쯤 날려버렸고 2격으로 척추를 부숴놓았음


대체 무슨일인가 하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까 자신을 유혹하던 경우없는 인간의 얼굴이 보임

상황을 알아차리고 허리에서 무기를 뽑아들었지만 선빵을 거하게 먹은 탓에 이미 전신에 힘이 들어가질 않음

승산이 없음을 직감하였으나 남편이 죽은 날, 그것도 남편의 무덤 앞에서 피를 뿌릴 수는 없노라하는 자존심 하나로 턱을 치켜듬


하얀 사기가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운 목소리의 욕설로 매도당하며 문득 선불자는 또다른 자아가 강대해져 가는 것을 느낌

천하의 불한당이니, 대왕의 유지를 받든 자로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는 둥 키아란이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예의없는 언사를

어설프게나마 쏟아내고 있을 때, 선불자의 내면이 드디어 단순한 도적놈에서 마누스로 타락해버렸음. 아아, 모른'다'여!!


이어진 전투 결과는 예상대로였음

무기와 키아란의 가녀린 육체를 더이상 상하게 만들기 싫었던 선불의 나름 자비로운 손속에 의해

불과 몇합 만에, 암은의 단검과 황금의 곡도들이 싱겁게도 튕겨나가 버렸음


쓰러진 미망인이 더이상 행동이 불가능함을 확신한 선불은 이제 저만치 튕겨나간 무기 2자루를 꺼리낌없이 회수해왔음

허리 뒤쪽에서 치밀어오르는 격통 때문에 말할 힘조차 남지 않은 여기사는 분노에 찬 눈길로 저 무뢰한을 노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기사의 목숨과도 같은 무기와 명예를 빼앗고도 그 악당은 성이 차지 않았던 것임

보물처럼 빛나는 황금빛 곡검의 도신을 홀린 듯 쳐다보던 선불은 이윽고 정신을 차린 후, 휘파람까지 불러가며 키아란의 장비를 탈착시키기 시작함


상황을 깨달은 여기사는 위대한 대왕의 신명과 죽은 정인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보지만 응답이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없는 비극 아래 신은 언제나 방관자였던 것.


언제일까, 여자친구를 가져본 것이.

사냥꾼의 꿈이라 했던가?

다른 세계선의 주인공들이 모여드는 회합의 장소에서,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ㅡ


너무 공허해서 아픈 기억들을 떠올린 선불자는 분노로 입술을 깨물며 행동이 거칠어지기 시작함

여기사의 장비는 최대한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벗겨내려 했으나 조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던 물욕이 순간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국에는 울부짖고 있는 여인의 몸뚱아리까지 찢어지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음


이미 온몸에 새파랗게 멍이 들고 따귀도 두어 번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버린 왕의 암살자는, 마지막 힘을 모아 몸을 일으켜선 무뢰배를 올려다보았음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저놈에게 겁에 질린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원독에 찬 눈길을 쏟아보내던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에 비친 것은

저녁노을로 바래진 태양을 후광삼아 그림자를 드리워내고 있는 추정강화수치 30강쯤 되어보이는 또다른 그레이트클럽이었음


고통으로 정신을 잃기 전, 남편의 무덤가에 무릎을 꿇은 여인은 어떤 목소리를 들었음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