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최후의 사자가 될 이 몸이..! 이런 곳에서! 안 돼!!"


카사스의 지하묘 최심부, 심연으로 끌려가는 것을 성검과 성직자의 팔찌로 간신히 버티며 연명하던 패왕 워닐은 비참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심연으로 떨어졌다.


워닐의 성배 앞으로 돌아온 재의 귀인은 저 멀리 닫힌 문을 열기 전, 카사스의 유적을 탐사하고자 하였다.

본디 카사스는 심연의 감시자들에 의해 멸망하기 전 수 많은 나라들을 통일 하였던 강국이었기에 그 무기나 전술 도구들은 필히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워닐의 방에서 나와 나무 다리에 발을 올리자, 다리 건너편에서 해골 하나가 칼을 빼 들고 다가왔다.


"그렇게 당하고서 아직도 두려움을 모르고 맞서는 건가.."


재의 귀인은 방패를 들고 허리춤의 롱소드를 꺼내 전투를 준비하였다.


"... ...... ....!!"


"저 놈 지금 뭐 하는....!!"


해골은 재의 귀인에게 다가오는 듯 하더니, 느닷없이 재의 귀인이 서 있던 나무 다리를 단칼에 잘랐다.


재의 귀인은 재빨리 재빨리 뒤로 달렸지만, 너무 늦게 반응한 탓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은 재의 귀인이 마주한 것은 절벽 밑의 공간이었다.


"이 곳은...?"


어차피 다시 올라갈 길도 없기에 재의 귀인은 절벽을 따라 걷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운이 좋다면 화톳불이라도 발견할 수 있겠지.."


그렇게 절벽을 따라 가던 귀인이 마주한 것은, 과거 불사자의 거리에서 보았던 데몬이었다.


"데몬이 이런 곳에도 있다니.. 이 곳은 싸우기가 너무 불리한데.."


불사자의 거리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이 곳은 너무 협소하였고, 지크벨트와 같이 그를 돕는 기사 또한 없었다.


"재빠르게 빠져나가자"


마침 저 멀리 데몬은 들어오지 못 할만한 좁은 통로가 있었기에 재의 귀인은 재빨리 달리기 시작하였다.


"쿠와아아아아!!!"


재의 귀인을 보고 포효하는 데몬을 재빠르게 지나쳐, 재의 귀인은 미리 봐 둔 통로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데몬과 통로 사이에는 많은 수의 해골이 있던 상황, 재의 귀인은 죽음을 떠올렸다.


"제대로 확인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내 실책이군.."


그러나 재의 귀인이 마주한 것은 뜻밖의 상황이었다.


재의 귀인을 노리고 달려오던 데몬이 해골을 밟아 으스러트리자 다른 해골들이 데몬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데몬은 해골들을 향해 그의 도끼를 휘둘렀지만, 수가 많고 부활까지 하는 해골들을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데몬은 비참하리만큼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불사자의 거리에서 본 데몬도 그렇고 데몬이라고 해도 그렇게 압도적인 것들은 아니군.. 과거의 기록에서 본 데몬들은 훨씬 더 강대했다고 보았는데."


팔란의 성채에서 만난 오벡과 그의 서재에는 비단 마술 뿐만이 아닌 많은 기록들이 있었고, 그 곳에는 소의 머리를 한 데몬, 산양의 머리를 한 데몬, 지네의 형상을 한 데몬 등, 데몬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었고. 또한 그 기록들은 모두 데몬의 강력함과 흉포함을 설명하며 마치 종말의 사자인 듯 표현을 하였다.


물론 몇몇 기록들에서는 데몬을 처치한 이야기가 쓰여있었지만, 망자들을 가두던 수용소를 지키던 데몬을 수용소의 한 망자가 주먹으로만 쳐서 쓰러뜨렸다는 허황된 얘기 뿐이었다.


기록이 과장된 것인가 데몬이 약해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재의 귀인은 더 고민하지 않기로 헀다.

재의 귀인이 바라는 것은 지식이 아닌 소울과 잔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몬의 소울을 사용하자 들어오는 많은 양의 소울을 재의 귀인은 마치 잘 숙성된 와인을 음미하듯이 즐겼다.


데몬이 있던 방을 얼마 지나지 않고, 재의 귀인은 화톳불을 발견하였다.

본디 화톳불을 이용해 다시 워닐의 방으로 가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화톳불을 따라서 이어진 길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재의 귀인은 길을 따라 나선다.


좁은 동굴길을 지나 나온 것은 적색 빛을 띈 호수. 

사방의 발광하는 적색 빛에 재의 귀인은 마치 불에 휩싸인 듯 황홀경에 빠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묵직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쾅!!


멀리서 날라온 거대한 화살을 간발의 격차로 구르기로 피한 재의 귀인.


"큰일 날 뻔 했군. 그나저나 이 화살은 대체 뭐지? 고문에서 보았던 용사냥꾼의 화살보다도...."


쾅!! 쾅!!


화살을 보고 생각에 잠긴 재의 귀인은 뒤따르는 두 개의 화살을 보지 못하고 맞고 만다.


"이런..! 빨리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겠군"


저 멀리 건물의 입구과도 같은 형상을 발견한 재의 귀인은 재빠르게 그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스즈아아아!!!!"


"젠장, 이건 또 뭐야!"


재빠르게 달리던 그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타나는 거대한 벌레. 하지만 그것은 벌레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하였고 또한 전기를 뿜고 있었다.

전기를 뿜으려는 벌레를 보며 재의 귀인은 전류가 자신에게 닿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쾅!! 쾅!! 쾅!!


다행히도 화살이 벌레에게 직격하여 큰 혼란에 빠진 듯 하였고, 그 틈을 타 재의 귀인은 건물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이제 한 숨 돌릴 수 있겠군.. 그나저나 이 방은 대체 뭐지? 저기 쌓여있는 것들 혹시.."


재의 귀인이 들어온 방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데몬의 유해들이 있었다. 그곳에는 재의 귀인이 기록에서나 보았던 데몬들의 모습도 보였다.

많은 수의 데몬의 유해들을 본 재의 귀인은 혹시라도 남은 소울이 있을까 싶어 유해로 발을 옮겼다.


"누구인가.."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낮게 깔리고 근엄한 목소리에 재의 귀인은 놀라 목소리가 나온 쪽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우리 데몬들의 묘이다. 어서 나가라"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 없는 데몬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온 다른 데몬들과는 다르게 수염이 나고 허리가 굽은 등, 노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이 확연히 보이는 데몬이기도 하였다.


"그러는 너는 누군가"


불사자의 거리에서 만난 데몬을 상대 하기 전, 기사 지크벨트가 그 데몬에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다는 것이 생각난 재의 귀인이 데몬에게 물었다.

더군다나 거대한 망치를 짚고 겨우 서있는 모습을 보고서 큰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한 점도 있다.


"나는.. 데몬들의 늙은 왕이다.. 그리고 이 곳은.. 안식을 가질 땅 한 뼘도 가지지 못 한 채 죽는 내 종족들을 위한 묘다.."


"그렇단 말이지?"


쌓인 수 많은 데몬의 유해들과 앞에 서 있는 늙은 데몬에게서 소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린 재의 귀인은 롱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는 분명 명예로운 기사지만 또한 불 꺼진 재, 소울과 잔불을 갈망하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니 놈에게 데몬의 왕의 힘을 보여주마!"


일순 망치를 꼬나잡더니 전신에서 불을 내지르는 노왕을 보며, 그를 얕잡아 보던 재의 귀인은 오히려 지금 앞에 서있는 데몬이 지금까지의 데몬들 보다도 더 강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잘못 건든 거 같은데.. 일단 적당한 거리에서 상황을 좀 지켜볼까"


적당히 거리를 벌리는 재의 귀인, 그를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노왕은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


"아앗!"


당황하여 뒤로 구르는 재의 귀인을 마치 이 행동을 유도라도 했다는 듯, 노왕은 유연하게 망치를 들어 재의 귀인을 향해 내려 찍었다.


"그래.. 생긴 것 만큼 싸움 짬이 있다 이거지?"


큰 부상을 입었지만 에스트를 마셔 회복한 재의 귀인은 전략을 바꿔 노왕을 밀어 붙이기로 한다.


"무기가 큰 만큼 공격과 공격 사이의 공백도 크다. 뒤 쪽으로 돌며 공격을 하는 편이 좋겠어"


가까이 붙어 노왕이 휘두르는 망치를 피해가며 노왕에게 공격을 하는 재의 귀인

재의 귀인에 대응하지 못 하고 몸 곳곳이 찢기고 뜯겨나가는 노왕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인지, 노왕은 자신의 몸에 이전보다 더 큰 불을 내지른다.


"이놈!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크게 호통치며 망치를 땅에 내려치는 노왕, 재의 귀인은 이번에도 망치를 가볍게 피하고 칼을 휘둘렀다.


"땅에서 불이..!?"


그러나 망치를 기점으로 퍼져 나오는 불을 미쳐 피하지 못한 재의 귀인은 그 열기에 중상을 입고 만다.


"이런..!"


다리의 상처를 확인하려는 찰나, 재의 귀인은 노왕이 망치를 치켜들고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본다.

망치의 위에선, 화염옥은 비교를 하는 것이 실례일만큼의 거대한 홍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시전을 막기엔 이미 늦은 상황, 에스트를 마셔 다리의 상처를 회복한 재의 귀인은 거대한 홍염들을 굴러서 피한 뒤, 다시 노왕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타 죽어라!!"


쏟아져 내려오는 홍염들을 스치듯이 피하며 노왕에게 다시 접근한 재의 귀인은 아까보다는 조금 조심스럽게 노왕에게 공격을 이어나갔다.

물리적인 타격에 화염을 섞어 공격하는 것은 심연의 감시자들에게서 겪었던 것이었다. 바록 공통점은 그 정도였지만 이미 비슷한 적을 상대해봤다는 자기 암시는 재의 귀인의 전투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전투를 이어나가던 중 노왕의 몸에서 느닷없이 거대한 불의 폭발이 일어났다.


재빠르게 방패로 막은 재의 귀인은 아직도 노왕이 수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여 망치가 닿지 않을 정도의 먼 거리에 자리하였다.


그러나 노왕의 상태가 지금까지와 달랐다.

몸에는 불이 꺼져 마치 다 타버린 장작과 같았고, 숨을 헐떡이는 노왕의 모습은 마치 죽기 직전의 시체와 같았다.


"나는..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어떻게든 일어나보려는 노왕, 그러나 일어나려고 짚은 무릎은 쌓아놓은 모래성을 무너뜨리듯 쉽게 무너졌고 망치를 쥐고 있던 손은 자신의 악력도 견디지 못 하는지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우..리 종족이.. 왜.. 그러..ㅎ게나 강대했..던 데....몬 들이.."


무너져 내리는 몸과 마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에 재의 귀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괴라는 단어의 현현 같아 보였던 노왕의 비참한 상태에 애도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는 강대한 소울을 탐하는 법, 재의 귀인은 노왕의 앞에서 롱소드를 꺼내들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데..몬들은.. 그 히..ㅁ의 원천인.. 혼..돈의 불을.. 공유한다..마..지막.. 데..몬인.. 왕자..만..큼은.. 죽이..지 않아.. 주겠나.."


"알겠다. 약속하마."


"고..맙다.."


데몬들이 힘을 공유한다면, 마지막 남은 데몬은 그 힘을 흡수할 가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재의 귀인은 노왕의 말에 긍정해주었다.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긍지 높았던 그를 치하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 했을 수도 있다.


"잘 가라, 데몬의 늙은 왕"


재의 귀인의 롱소드가 노왕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찢었다.

전신이 찢기거나 뜯겨나가고, 목마저 베어진 채 몇몇 관절마저 무너진 노왕은 그 어떤 데몬의 유해보다도 비참하였으나 기록의 어떤 데몬보다도 긍지 높았다.


노왕의 소울을 취한 뒤, 재의 귀인은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르게, 사뭇 무겁게 자신의 여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왕의 죽음으로 이자리스의 혼돈의 불을 목도한 모든 이들이 죽어 없어졌다.

니토는 잊혀졌으며 그윈은 아직 불의 계승을 수호하나 그 불의 계승 자체의 여력이 없어졌다.


그렇게.. 세상은 점점 어긋나있던 순리에 따라 어둠으로 흘러간다.


시대를 풍미했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