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에 엘든링 기다리면서 쓴 글인데 내가 프롬 좋아하는 이유를 정열적으로 서술해밧음.
<게임계의 동시대미술, 소울리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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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전제조건, 필요충분조건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이다. 이미지 자체가 내용이며, 내용은 이미지 너머에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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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시리즈는 집요하리만치 모든 플레이에 명분을 제공한다. 플레이상 불이익과 불친절, 불편함 모든 것이 실제로 게임 내 주인공이 겪는 모든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이 ‘집요한 디테일’을 통해 주인공과 플레이어의 일치를 만들어내어 내가 곧 소울본 시리즈의 세상을 해쳐나가는 듯한 경험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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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소울본 시리즈가 선택한 장르인 액션 어드벤쳐가 이미지의 형식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그들이 선택한 불친절한 스토리텔링 방식이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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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실제 삶에서 우리는 모든 사건들을 ‘몸으로 맞는다’. 그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우린 직접 그것에 대한 충분한 리서칭을 해야 한다. 소울본 시리즈의 스토리 텔링이 그렇다. 무엇 하나 ‘이 세상은 이렇고 이 적은 이 이유 때문에 너와 싸우는거야’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유들은 퍼즐의 형태로 게임 곳곳에 숨겨져있는 단서로 존재한다. 소위 “프롬뇌”라 불리우는 것이다.
(때문에 그 흔한 퀘스트 안내창, npc대가리 위에 떠있는 금색 물음표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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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작품은(게임이라 말하기 굉장히 곤란하다. 게임 형식의 그것들을 전면으로 맞서 탈피했으니), 게임의 고질적인 문제 “죽음과 재시작”을 해결하였다. 죽음이란 토픽은 제작자 입장에서, 게임에서 처리하기 굉장히 불합리한 문제이다. 플레이어들은 실패와 죽음을 통해 문제해결을 하여 성취감과 성장을 통한 만족을 얻기 위해 게임을 하는데, 죽음이 곧 진짜 죽음,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체크포인트”에서의 무분별한 재시작 기회는 죽음을 죽음답지 않게 다루게 되는 형식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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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은 오로지 이 “체크포인트에서의 재시작”이란 명분을 위해 세계관과 내러티브가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이 무분별한 재시작이란 형식을 이미지의 내용과 일치시켰다. 게임 업계의 불문율과도 같던 ‘부활’이란 치트키에 전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어떤 게임도 이 ‘부활’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지 않는가. 오로지 이 부활만을 위한 내러티브, 그것이 모든 소울본, 세키로 시리즈의 정체성이다.
(“스탠리 페러블”등 죽음과 재시작의 문제을 메타픽션적으로 해결한 작품과는 궤를 달리한다. 메타픽션은 제도에 대한 도전이며 말하자면 주체적인 작품보단 “비평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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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도 이 부활 문제를 해결하니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질 수 있었고, 때문에 죽음과 반복, 소위 말하는 모든 ‘삽질’이 내가 다루는 캐릭터가 모험하는 여정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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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프롬뇌”와 “프롬손”은 마치 현대미술에 접근하는 방식처럼 플레이어의 경험과 능동성, 직관에 많은 것을 맡기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이 시도는 굉장히 성공적이어서 작가가 구성해놓은 모든 세계가 파헤쳐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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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세키로를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우린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 Npc의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나의 삽질이 이야기에 “실제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게 설계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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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삶에서 길찾다가 발 헛디뎌서 낙사한 병신같은 내가 재의 귀인으로 불릴 리가 없지 않은가. 프롬 게임에선 길찾다가 낙사한 병신같은 나도 재의 귀인이자 장작의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바로 이 점이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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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재밌네 잘 읽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