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반지의 제왕의 빌보 배긴스가 아라고른을 위해 지은 시를 보고가자


황금이라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황하는 자가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못한다.


타버린 재에서 새로이 불길이 일고,


그림자에서 힌줄기 빛이 솟구칠 것이니.


부러진 칼날은 다시 벼려질 것이며,


왕관없는 자 다시 왕이 되리라.


The Lord of the Rings 라는 유명한 책의 제목은 엘든 링의 파편을 나눠가진 데미갓들을, 빛나지 않는 황금이 왕이 되리라는 예언은 빛바랜 자의 여정을 연상케 하지 않는가? 엘든 링의 신화를 제공한 조지 마틴이 스스로 톨키니스트를 자처하는바, 틈새의 땅의 거대한 황금나무는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점에서 북구신화의 위그드라실보다 실마릴리온의 라우렐린을 떠올리게끔 하는 등, 톨킨의 작품에 나오는 몇몇 소재를 모티브로 비틀어 놓은 결과물들을 종종 찾을 수 있으며 이같은 비틂은 톨킨에 한정되지 않는데 그중 엘든 링의 핵심을 관통하는 설정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기독교신화를 비튼 것이다.


절대적이고 선한 야훼는 절대성과 선악이 모호한 거대한 의지로,

인류의 고향인 에덴은 후천적으로 부과된 황금률의 지배하의 세상으로,

그 영향에서 이탈한 원죄를 가진 인간과 빛바랜 자,

에덴에서 추방되게끔 한 원죄에대한 속죄로 십자가형에 처한 하느님이자 성자인 예수와

황금률 아래 존재들을 해방키 위해 엘든 링을 부순 죄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여신 마리카 등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엘든 링은 개성이 강한 변주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에는 고전적인 신화적 구도를 견지하고 있다. 예컨대 전작들의 화방녀, 샤날롯 등으로 낯설지 않은,

오디세이아의 아테나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인도자적 여성으로서의 멜리나,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크레온과 안티고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미야자키의 입김이 많이 닿은 라이커드 정도를 제외하면)남성상과 보다 인간 본연의 것을 추구하는 여성상 등이 있다


먼 혈연에 불과함에도 황금의 일족임에 집착하는 고드릭, 자신이 속한 카리아의 운명을 틀어막는 행위임에도 황금률을 위해 별들을 붙잡은 라단,

멸시받고 버려지는 흉조임에도 황금률을 수호하려는 모르고트, 황금률의 왕/여왕 체제로 새 왕조를 창시하기 위해 미켈라를 납치한 모그,

마리카에게 통수맞고도 끝까지 황금률 시대에 충심을 보이는 말리케스, 황금률의 개로 불린 라다곤 등

반면 여성들은 황금률에 저항한 바가 있거나 저항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황금률의 라다곤에 맞서던 레날라, 부패의 권능에 저항하려했던 말레니아, 황금나무를 태우고 공평한 죽음을 가져오려는 멜리나, 제육신을 죽임으로서까지 벗어나려 했던 라니, 모종의 이유로 황금률에대한 태도를 바꿔 엘든 링을 조각낸 마리카 등이 그렇다.

이같은 상징성들이 엔딩에서 어떤식으로 드러나는가?


노멀엔딩과 그 부속물들에 대해선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이들은 단순히 두손가락의 체계를 되돌리거나, 금가면, 피아, 대변 먹는 자 각각이 생각하는 체계의 모순을 보완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미친 불 엔딩은 얼핏 보기엔 파국적인 점에서 소울시리즈의 어둠의 왕을 떠올릴 수 있지만 게임을 해보면 잘 알다시피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두손가락의 질서는 그릇된 것이니 그 질서와 그아래 모든 존재를 불사르고 흩어진 황금의 은총을 하나로 되돌리는 것이다. 두손가락이니 세손가락이니 하는걸 보면 러시아 정교회의 고의식파 분열을 떠올리게 한다.


17세기 중반 니콘 러시아 총대주교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지나치게 현지화된 러시아 정교회에 순수성을 되찾고자 개혁을 시도하는데 대표적으로 두손가락으로 긋던 성호를 세손가락으로 긋는 것으로 되돌린 것이며 개혁에 반발한 이들이 고의식파로 두손가락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은 바, 차르와 개혁파들에 의해 파문되고 화형당하기까지 했고 오늘날까지 통합되지 못했다.


절대자인 신 앞에서 두손가락이니 세손가락이니 하는 건 시덥잖은 것으로 보일테고, 하물며 그 신의 위치에 있는 거대한 의지의 의문성이나, 두손가락 세손가락들도 의지의 매개자에 불과하며 그 교신도 불확실함을 게임 내에서 확인할 수 있기에 옳은 결정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남긴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달의 세기 엔딩은 어떤가? 앞서 말한 상징성과 장치가 라니를 묘사함에 있어 특별히 더 신경쓴 것이 눈에 보인다.

자신의 명징한 지성의 열매인 정약을 무기삼아 무려 반신에게 도전하는 틈남충 셀브스 교수님과의 일화는 뭇사람들에게 단순한 블랙유머라거나, 예민한 분들에겐 불쾌한 성의식따위로 치부될 수 있지만, 이는 셀브스에게 라니가여느 꼭두각시들과는 다른 특별한 인형이 될 기대의 대상이듯, 반신이라는 거창한 지위도 라니에게 있어 특별한 꼭두각시의 위치에 지나지 않으며, 라니가 이에 대해 가지는 혐오감을 셀브스 퀘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게끔 한 것이다.


라니는 반신이라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꼭두각시극의 소재인 인형이 되면서까지 두손가락의 규율에서 벗어나고자 행동하는데 이는 여느 황금률의 저항자들과 구분되어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황금률이 깔아놓은 판에서 움직이는 존재는 이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레날라는 라다곤과 왕/여왕 체제를 맺으면서 종국에 미쳐버리고 말았으며, 미켈라는 권능으로 새 나무를 창조하고 말레니아와 왕/여왕 체제를 구성하려 함으로써 끝내 이루지 못하고 납치당했다. 말레니아는 부패에 맞서겠다는 각오, 패배를 모른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순간마다 부패에 의존함으로서 진작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해버린, 어느 모로 보나 결국 패배하여 꽃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며, 고통스러운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 주인공의 도움으로 겨우 숨돌릴 틈이나 찾았음에도 제 고통의 근원인 말레니아를 위해, 운명에 저항한다는 숭고한 의지를 전하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최후까지 제 자신으로서 죽는 밀리센트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에 불과하며 이는 내 몸에 무수한 부패가 새겨졌기에 하는 근거없는 비방이 아니다.


셀브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크소울3의 앙리의 전례가 있는 바, 라니와의 결혼도 단순히 이벤트성으로 넣은것이 아니다. 라니를 섬김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로지에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주인공의 라니에 대한 봉사는 죽음의 주흔을 거래로 한 암묵적 계약이며 라니 본인도 이를 명확히 알고 주인공이 이를 가지고 무엇을 할지도 알겠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라니의 목적은 자신의 규율을 실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두손가락을 살해하는 것이며, 주인공이 두손가락에게로 가는 마지막 방해물인 재앙의 그림자를 처치했을 때 반지가 든 상자를 열쇠를 준다는 점, 혼약의 순간 라니는 그대는 적합한 선택이다(Thou'rt a fitting choice.)라고 말하는 것에서 결혼은 라니의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임이 다분하며 라니는 이 마리카를 배제한 왕/여왕의 결합 그리고 그 주체인 그들이 땅을 떠남으로서 황금률을 완전히 배제하고 마리카를 해방하며 비로소 라니의 규율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규율은 라니가 언급하듯 황금률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황금률은 틈새의 땅 어디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빛나는 황금나무처럼 규정한 개념이 실감할 수 있을만큼 분명한 것이며, 규율이 정의한 것은 반드시 실재해야하며 어긋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게임을 진행하면 고리모양의 대륙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구분으로 매우 뚜렷게 나눠진 각 지역을 거슬러 올라가며 틈새의 땅의 일반인들 사이에 거니는 신적인 존재를 만난다. 고스토크같은 하층민은 목에 찬 칼이 보여주듯 하층민이기에 하층민이며, 흉조는 흉조이기에 흉조이다. 엘데의 왕과 신인 여왕이 존재해야하며 그 여왕은 마리카여야 하기에 마리카가 무슨 죄를 저지르든 그 위치에서 벗어날 순 없다.


반면 라니의 그것은 규정하는 개념들이 뚜렷히 체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라니 스스로가 규율과 함께 땅을 떠나면서 더욱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마치 차가운 밤하늘의 별과 달처럼.


라니가 반신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의 존재들을 동정해서 이를 획책했다는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드러나는건 진정한 자유에대한 갈망이며, 자신의 규율을 실현한 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규율이 절대적인 잣대를 들이댐으로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반발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기존의 도덕성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기존의 규율을 뿌리채 뒤흔들고 새로운 규율을 규정하는 라니는 니체의 초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리고 새로운 규칙을 정하는 이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비판이 노예도덕을 초월한 라니에게 향할 수 있다. 고드윈 암살의 여파가 황금률 아래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가져왔으며 게임 내 틈새의 땅이 저 모양인 것은 결국 라니의 책임이다. 대안이라고 내놓은 규율도 사실상 독선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자유를 선고한 것이며, 라니는 책임을 지지도, 질 수도 없는 밤하늘 저편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현한 채 건너간 것이다.


무엇보다 아쉬운점은 주인공으로서의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이다. 노멀엔딩의 수수한 이야기도 어찌됐든 왕이되어 통치하는 꼴은 하고있고 미친 불의 왕은 그 사상이 세손가락의 발상이든 어쨋든 간에 이에 동조하여 주축으로서 직접 실현시킨다. 반면 라니의 엔딩은 아무리 주인공이 라니를 섬기기로 동의했다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들러리이자 하수인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인 라니를 추종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라니가 레날라의 네 밤을 실현시키렴(Weave thy night into being.)이라는 말대로 그 규율을 실현시켰지만 주인공의 도움 없이 그 목표의 근처에라도 갈 수 있었을지 의문인 점과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시점의 틈새의 땅의 그 꼴을 감안하면 더욱 유감스럽다.


엘든 링은 그 기반이 되는 신화를 마틴에게서 제공받아 이야기를 구성해서인지, 인물들을 게임내에 이용함에 있어 다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으며 부패가 생명의 순환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고려하면 분명 말레니아아 관련한 엔딩이나 이야기가 있을법 함에도 잘려나간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혹여 dlc로 나오게 된다면 보다 신경써서 다뤄주길 기대한다.


-원래 소울시리즈에서 스콜라의 이질성과 엘든링과의 유사성을 쓰려고 했는데 이도저도 아니게 돼서 빼버림. 그래서 이상하게 연결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